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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75화 (75/500)

75화. 제나스

“놈이 사라졌다!”

“악마추종자의 수장이 도망쳤다! 쫓아라!”

크라켄이 뿌린 독기 속에서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익스퍼트급 이상의 기사들이 연달아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아직은 크라켄의 독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황.

시야도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데다가, 탐지 마법도 사용할 수 없었다. 뒤늦게나마 전장에 합류하려던 마법사들이 검은 안개에 휩싸인 순간 죄다 기절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흑마도사가 사라진 방향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는 것은 단 두 명뿐이었다.

“내궁입니다!”

“내궁 방향이다! 쫓아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단숨에 달려 나가려던 제나스와 리암의 시선이 마주치고, 두 사람이 동시에 움찔했다.

서로가 만만치 않은 실력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등을 보이기가 쉽지 않았던 탓.

상황상 아군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기사의 본능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지금 이럴 때가…….’

실책을 깨달은 리암이 바로 소리를 지르며 먼저 돌아섰다.

“뉘신지 몰라도 조금만 더 손을 빌려주시오!”

그 말을 남겨 놓고 질주하는 그의 등을 보며 제나스가 눈을 빛냈다.

“물론이지요.”

대답과 동시에 리암을 앞질러서 사라지는 은빛 바람.

그 뒷모습을 보며, 리암은 복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카룬의 왕실 기사단장으로서, 대놓고 복면을 쓴 채 정체를 숨기는 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심정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르투스 근처의 서쪽 섬에서 흑마법진의 일각을 파괴하고 돌아온 것이 조금 전이다.

난리가 난 오르투스, 개판이 된 왕성.

거기에 동쪽 하늘에 보이는 무시무시한 전설의 마수까지 애써 무시하고 왕성에 돌입하자마자 목격한 게 좀 전의 광경이었다.

당연히 그 전투에 곧바로 끼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힘이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체감하고야 말았다.

더구나.

‘젊은 나이에도 챌린저급, 게다가 바람과 얼음을 다루는 이중 속성이라……. 머리 색은 변장이겠군.’

하관만 가린 상대의 신분이 얼추 짐작이 갔다.

평상시라면 카룬의 일에 섣불리 끼어들었다간 큰 문제가 되었을 만한 신분이지만, 지금은 고맙기만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조심하시오, 당신 부하들이…….]

작은 은빛 바람이 그의 귓가로 스며들며 메시지를 남겼다.

마치 일부분이 잘려 나간 듯 부정확한 메시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바람 속성을 다루는 챌린저라고 해도, 마법사는 아니니 실로 대단한 재주였다.

하지만 그 놀라운 감정은 이내 더 큰 놀람에 묻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적이다!”

“막아라!”

“죽여!”

붉게 충혈된 눈을 번들거리며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부하들.

그 칼끝이 향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무엇보다.

“젠장!”

리암은 앞서 달려 나간 지원군처럼 속도에 특화된 기사가 아니었기에, 온전히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없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쾅.

퍼억.

“정신 차려라, 이놈들!”

최선을 다해 부하들을 밀치고 튕겨 내며, 조금 느리게나마 내궁을 향해 달려가는 것뿐이었다.

* * *

“마, 막아!”

“웬 놈이냐!”

“으아아악!”

급작스레 날아와 창문을 깨며 난입한 한 흑마법사.

반사적으로 놈을 요격하려던 기사가 검은 불꽃에 휩싸여 추락하자, 내궁의 대전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흑마법사다!”

“죽여!”

그나마 다행이라면 평민들과 섞이기 싫었던 고위 귀족들 대다수가 호위 병력과 함께 대전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

“놈을 죽여!”

“악마추종자를 죽여라!”

- 하, 겁도 없이 감히.

꽈과과과광!

“끄아아악!”

한 명의 희생만으로는 적의 경지를 파악하기 어려웠는지, 과감하게 돌진한 기사들이 검은 벼락에 직격당해 불타올랐다.

거기다.

- 지금 누구를 공격하는 게냐, 어리석은 것들아.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검은 바람이 대전을 휩쓰는 순간.

대전 안에 있는 이들 중 절반에 가까운 이들의 눈에 붉은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 정신 차리고, 적을 죽여라.

그 말 한마디에, 눈이 붉게 물든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을 향해 무기를 겨눴다. 무기가 없는 이들은 촛대나 식사용 나이프라도 집어 들고 살기를 뿜어냈다.

“적이다!”

“죽여!”

“뭐, 뭐야 당신들 미쳤어!?”

“미친놈들……!”

“마법! 흑마법이다!”

한순간에 대전이 혼란에 잠기는데.

- 버러지들…….

침입자의 시선은 그들을 스쳐 지나가 왕에게 꽂혀 들었다.

- 하, 너희는 그나마 좀 낫다 이거지……?

왕을 수호하고 있는 십여 명의 왕실 기사들.

모두가 익스퍼트급 이상의 기사들인 카룬의 정예들은 대단위 현혹에 걸려들지 않은 것이다.

“전하를 지켜라!”

“으아압!”

틸란을 비롯한 왕실 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적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 그래 봤자다.

우르르르릉.

듣기 싫은 목소리와 함께 검은 벼락이 연달아 쏟아졌다.

“끄아아악!”

“끄르르.”

직전의 패기가 무색하게, 왕실 기사들은 비명과 함께 인형처럼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끄으으.”

그나마 블레이더급에 이른 틸란만은 멀찍이 튕겨 나간 채 방패를 부여잡고 간신히 서 있었지만.

“쿨럭, 쿨럭. 저, 전하. 피하십…….”

갑옷 사이로 드러난 녹아내린 피부와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보면, 그 역시 한순간에 전투력을 상실한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곁을 쏜살같이 지나쳐 가는 흑마법사를 보면서도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더더욱.

- 버러지치곤 제법이야.

얼핏 여유로운 듯한 목소리.

하지만 흑마법사의 행동에서는 왠지 모를 조급함이 묻어났다.

그리고 이내.

“네놈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게로구나!”

국왕의 분노를 마주한 그는 검은 후드 아래로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 오늘이 카룬의 마지막 날이다.

그 말과 함께 그의 손에서 검은 번개가 솟구치는 순간.

쾅.

느닷없이 나타난 은빛 마나블레이드가 그의 손을 내리찍었다.

파지지직.

- 끄으. 이, 이놈!

인간 같지 않은 힘을 가진 흑마도사도 사람임을 증명하듯, 반쯤 잘린 그의 손목에서 새빨간 피가 솟구침과 동시에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 검의 주인은 전신에서 검은 번개가 번뜩이는 흑마도사를 응시하며 피식 웃었다.

“겉멋이 몸에 배었군요. 시간을 끌어 줘서 다행입니다!”

여유로운 음성과 달리, 이를 악문 제나스는 검을 든 손에 최대한 힘을 실으며 적을 밀어붙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우우우우웅.

파지지지직.

그가 우위를 점한 것은 충돌 직후의 한순간뿐이었으니.

- 네놈…….

흑마도사가 그 한마디와 함께 소매 속에 다시 손을 감춘 뒤부터 제나스는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직.

우르르르릉.

‘빌어먹을!’

까드득.

점차 가까워지는 검은 번개를 보며 재차 이를 악물어 보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끼어들기는 했지만, 애초에 정면에서 힘을 겨루는 것은 그의 특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경지가 더 높은 적을 상대로, 승산 없는 대치 상황을 만든 것이다.

거기다.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이제 확실히 알겠군. 네놈이 누군지!

검은 로브 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그러나 어차피 정체를 오래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각오를 다지며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자신의 이중 속성은 희귀하기도 하거니와, 이 정도 강자와 상대하면서 검술을 숨길 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 그렇다면 내 원대한 계획을 망친 진짜 범인이 누군지도 뻔하군.

흠칫.

- 발렌티아 공작이라……. 그래, 그래야 말이 되지! 우리가 엉뚱한 혼혈한테 신경을 쏟고 있었어. 흐흐흐.

이렇게 되면.

까드득.

“여기서 죽여 드리지요, 말 많은 쓰레기 두목.”

모험을 감수할 수밖에.

결심이 서는 순간, 사방으로 퍼지던 그의 기세가 일순간 체내로 수렴했다.

- 흐,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나스의 전신을 덮치는 검은 번개.

검은 후드 아래로 드러난 하관에 살벌한 미소가 번지는 순간.

번쩍.

그의 검에서 찬란하고도 싸늘한 은빛이 솟구쳐 올랐다.

발렌티아 검술, 제나스식 절기 1식.

얼어붙은 칼의 노래.

꽝!

폭음은 짧았다.

그의 검에서 솟구친 은빛이 흑마도사를 꿰뚫었고, 거의 동시에 검은 번개가 제나스의 몸을 강타했다.

“이, 이런…….”

우우웅.

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막강한 위력을 담은 검은 번개는 이내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그럼에도 제나스는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린 듯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 크, 크흐흐. 이런 미친놈이…….

쿨럭.

가슴을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던 흑마도사는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그것을 본 늙은 왕은 일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 이제 정말…….

비틀거리던 적이 다시금 자세를 바로 하는 순간에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 ……끝이다.

놈의 손끝에서 검은빛이 번뜩이려는 찰나.

콰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검은 로브의 몸이 통째로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회백색 기운이 넘실거리는 대검을 든 노기사가 여전히 전방에 검을 겨눈 채 약식으로 예를 표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리암 경!!!”

국왕이 반색하며 소리를 지를 때.

“적을 처리한 후, 다시 정식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그의 대검이 흑마도사를 양단할 듯 휘둘러졌다.

꽈아아아아앙.

하지만.

-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라……. 일이 어쩌다가……!

어느새 그 궤적을 벗어난 검은 로브는 리암의 검이 닿지 않는 대전의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이놈!”

리암이 살벌한 고함을 터트렸지만, 칼이 닿지 않는 곳에 적을 둔 채 등 뒤의 왕까지 지켜야 하는 그로선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 그래도 우리의 목적은 이루어질 것이다.

파지지지직.

대전의 천장을 모조리 뒤덮을 듯 넓게 퍼지는 검은 번개.

-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쿨럭.

놈도 무리한 것인지 검은 로브 아래로 대량의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결코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도 더욱 강해진 적의 기세는 큰 부상이 무색하게 삼엄하기만 했으니까.

“그냥 둘 것 같으냐!!”

콰앙!

리암이 사방에 굴러다니는 돌 조각 하나를 집어 들고는 힘껏 던졌지만,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겉으로 보이지 않음에도 그 서늘함이 느껴지는 시선이 더욱 강렬해졌을 뿐.

- 그러니 이제 죽어라.

번쩍.

콰아아아아앙!

그 어느 때보다 짙은 번개가 옥좌에 앉은 왕에게로 쏟아졌다.

그 순간.

“안 돼!!”

어느새 달려 나간 리암이 노쇠한 왕 앞을 가로막으며, 그 벼락을 온몸으로 막아 냈다.

심지어 왕과 그 사이에는, 어느 틈에 데려온 것인지 기절한 제나스까지 끼어 있었다.

‘미안하오, 발렌티아의 검이여.’

왕에게 가는 충격을 한 단계라도 완화시키기 위한 조치.

사실상 은혜를 원수로 갚는 짓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챌린저의 육체는 오러유저 아래 단계 중에서는 최고의 마나 적합성을 가졌으니,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어떤 수단보다 마법을 막기에 적합했으니까.

왕을 지켜야 한다.

그가 평생을 지켜 온 최우선 가치는 그 외의 생각을 못 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해서건, 내가……!!’

콰아아아아아앙.

파지지지지지직.

“……지킨다!!!”

회백색 돌의 마나를 전신에 두른 노기사의 외침이 검은 벼락을 뚫고 대전에 울려 퍼질 때.

파직.

본의 아니게 그 뒤편에서 흑뢰의 여파를 뒤집어쓴 제나스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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