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69화 (69/500)

69화. 크라켄 (1)

하늘을 꿰뚫을 듯하던 기둥이 그대로 오르투스를 향해 쓰러지는 광경.

그 모습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 그 누구도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오직 한 사람, 타이니를 제외하고는.

“젠장! 전하, 그럼 약속대로!”

왕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불경한 태도였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국왕 역시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황급히 자신의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타이니에게 던졌다.

“부탁하네, 타이니 경!”

그 말에 대답할 새도 없이 타이니는 창문을 깨부수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재앙이 오르투스를 후려쳤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르르릉.

대도시 오르투스를 단번에 두 동강 내 버릴 듯한 재앙.

괴물의 다리가 떨어진 곳을 기준으로 도시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그 중심부에서부터 시작된 충격이 지진을 일으키며 온 세상을 뒤흔들었다.

“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왕성 가까이에 몰려 있던 사람들 대다수가 비명과 함께 주저앉는 그때.

성벽 위에서 거대한 늑대 위에 올라탄 작은 인영이 날듯이 허공으로 튀어나왔다.

두 손에 든 기다란 망치에 거대한 문어처럼 보이는 것을 매단 채로.

쿵.

“가자!”

“크르르르르.”

월랑이 그의 뜻에 따라 질주하면서도 불쾌한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것은 타이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웬만한 악마추종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끈적끈적한 마기가 등 뒤에 넘실거리고 있었으니.

‘사체인데도 그 엘프 흑마법사보다 기분이 나빠.’

악마추종자들처럼 사체가 부패하거나 가루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으면서 마기가 끈적하게 뭉쳐져 더 존재감이 강해진 느낌이었다.

심지어 성령 결계 안에서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마물을 먹고 산다는 전설의 마수 크라켄의 특성이 궁금해져 해부라도 해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야 없지.’

처음 발견했을 때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사체를 훼손할 수 없었고, 후에는 무려 해일의 마도사 게일 앤더슨이 목숨까지 희생해서 작업을 해 놓았다는 것이 밝혀졌기에 건드릴 수 없었다.

괜히 건드렸다가 일을 그르쳐서 고인의 유지를 헛되게 만든다면,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이제는 해부 같은 걸 해 볼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이것을, 죽은 새끼의 사체를 어미에게 전달해야 한다.

게일 앤더슨이 남긴 메시지를……!

- 소신은 마나를 이용해 크라켄 새끼의 몸에 놈들의 형상을 새겨 놨습니다. 제가 놈들의 수법에 당해 크라켄의 새끼를 가두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재앙을 꾸민 놈들의 이미지를 마수의 몸에 주입한 것입니다.

- 실제 크라켄의 지능이 전설로 전해진 것의 반의반 정도라고 가정해도, 자신의 새끼를 죽인 진짜 원흉을 인식할 수 있도록…….

‘그러니…….’

파바바박.

‘……더 빨리!’

파아아앙.

전력을 다해 질주하자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터져 나가며 주변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오르투스를 반으로 갈라 놓은 거대한 다리가 다시 허공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도 느릿하게 시야에 비쳤다.

타이니는 그 소름 끼치는 다리 옆을 빠르게 지나쳐 순식간에 부두에 다다랐다.

아직은 가속도가 죽지 않은 순간 중력 속성을 이용, 최대한의 관성으로 새끼의 사체를 크라켄의 본체를 향해 던지려는 생각이었는데.

‘젠장! 멀어!’

생각보다 거리가 훨씬 멀었다.

그 짧은 순간, 마음이 급한 탓인지 시간이 더욱 느리게 느껴지며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지는 듯했다.

그러다.

‘그냥 저 다리를 향해…….’

마지못해 차선책을 택하려던 순간.

- 컹!

월랑이 그냥 계속 달리겠다는 의지를 전해 왔다.

‘뭐? 이 앞은 바다야!’

그야말로 황당한 주장이었지만, 월랑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 컹! 컹!

할 수 있다!

녀석이 제 의지를 다시 한번 강경하게 전달하는 순간, 일전에 보았던 월랑의 생전 광경이 다시금 타이니의 머릿속을 스쳤다.

집채만 한 늑대가 허공을 디뎌 연달아 도약하고, 물 위를 평지처럼 밟으며 질주하는 기억.

영혼의 냄새를 맡는(Soul Sight) 능력 외에 월랑이 가진 또 하나의 특기, 공간 밟기(Space Step).

‘그게 그렇게 갑자기 될…….’

- 컹!

너는 준비가 되어 있다.

월랑은 그렇게 의지를 전하면서,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바다로 돌진했다.

그러다 마침내 바다를 향해 점프하는 순간.

더욱 느려진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타이니는 정신을 온전히 월랑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야 깨달았다.

‘월랑의 말이 맞아.’

마나유저, 기사로서의 성장을 토대로, 정령술사의 역량 역시 이제야 비로소 한 단계 올라설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이게 바로…….’

정령술사 3단계.

- 권능개화(權能開花, Power Link.)

우우웅.

짜릿한 쾌감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했다.

월랑과 연결된 보이지 않는 끈이 더욱 굵어짐과 동시에 두 영혼의 파장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하더니, 각자의 영혼의 질이 한 단계 상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쾌감 속에서 상당량의 마나가 월랑에게 흘러들어 가며, 질주하는 녀석의 발밑으로 투명한 마나의 발판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월랑은 그것을 밟으며 그대로 바다 위를 질주했다.

그 속도가 이전보다 더욱 빨라진 듯한 느낌은 결코 착각은 아닐 터였다.

“우와아악!”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질주하는 타이니는 본능적으로 스탬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크라켄의 본체.

다시금 하늘 위로 올라간 거대한 괴물의 다리가 또다시 지상에 재앙을 일으키려 하고, 바닷속에선 또 다른 다리들이 꿈틀거리며 수면 위로 솟구치는 섬뜩한 광경이 또렷이 보였다.

‘지금이다!’

그는 한순간 정신을 집중해 월랑과 자신의 신체를 8배로 무겁게 만드는 동시에, 스탬프에 걸린 크라켄 새끼의 사체는 8분의 1의 무게로 만들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했던 중력 속성의 절묘한 이중 활용.

그리고 그 무게의 차이와 반동을 극한까지 활용하여, 모든 힘을 동원해 팔을 휘둘렀다.

“으아아압!”

파아아아앙!

망치 머리에 걸려 있던 크라켄 새끼의 사체가 요란한 파공음을 내며 깊은 바닷속 어미를 향해 던져졌다.

한순간 높게 솟아오른 문어 형상의 사체는 쏜살같이 허공을 날아, 거대한 다리가 뚫고 나온 수면 바로 아래 지점으로 풍덩 빠졌다.

그 순간.

- 그오오오오오오오!

고막이 터져 나갈 것만 같은 괴성과 함께, 바닷속 한가운데에서부터 엄청난 살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컥!”

그 살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뒤집어쓴 타이니는 그야말로 심장이 멈출 뻔한 충격을 느끼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 순간, 생존을 위한 본능이 그의 마나를 움직여 전설의 포식자 앞에서 멈춰 버린 육체를 강제로 다시 작동시켰다.

“커, 커헉.”

끄르르륵.

동시에 하마터면 바닷속으로 가라앉을 뻔한 월랑이 간신히 물살을딛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섰다.

“허, 허윽. X발!”

자칫하면 허무하게 죽을 뻔했다.

타이니가 직전의 공포와 그로 인한 분노가 담긴 눈으로 살기가 터져 나온 곳을 다시금 바라보는데, 그 섬뜩한 살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어……라?”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다시금 오르투스를 향해 떨어지려던 다리가 허공에 멈춰 서 있는 게 보였다.

게다가 수면 위로 솟구칠 기세를 보이던 다른 몇 개의 다리 역시 그대로 물속에 잠긴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단숨에 상황을 파악한 타이니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됐다!!”

게일 앤더슨의 유산이 제대로 통했다.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데.

“컹!”

월랑의 울음소리가 그 짜릿한 감상을 방해했다.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였다.

‘윽.’

그에 타이니 역시 그제야 육체가 텅 빈 듯한 감각을 느꼈다.

바다 위를 달려 나갈 때마다 지속적으로 소비되는 마나 때문이었다.

크라켄 새끼의 사체를 던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직후이니, 바다 한가운데에서 마나를 유지하기가 점차 버거워지고 있었다.

‘그래, 일단은 돌아가자.’

타이니는 떨어지려다가 허공에 멈춰 선 크라켄의 다리를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느닷없이 재앙을 맞이한 오르투스 왕실에 이 희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가 부둣가에 발을 디딜 때까지, 크라켄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 설치된 거대한 조각처럼 미동도 없었다.

“흐아아.”

자연스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움직이던 모습 그대로 멈춰 선 괴물의 형태는 여전히 소름이 끼쳤지만, 그것이 먼저 떠나보낸 자식에 대한 애도라 생각하니 저 거대한 괴물의 모습도 조금은 애처로워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 그오오오오오오!

갑자기 바닷속에서부터 터져 나온 괴성, 그리고 다시 오르투스 전체에 엄습하는 살기는 그 얕은 감상을 완벽하게 깨트려 버렸다.

“무슨……!!?”

그그그그극.

그 살기와 함께 다시 떨어져 내리는 크라켄의 다리를 보며, 타이니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게 헛수고라고?’

게일 앤더슨이 남겼던 그 절절한 유언을 생각하면, 당장의 공포보다도 그의 보람 없는 희생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컸다.

하지만 빠르게 다가오는 거대한 그림자는 상념에 빠져 있을 시간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젠장!”

파바바박.

타이니의 의지를 따라, 월랑은 머리 위로 쇄도하는 다리의 궤도를 벗어나 왕성을 향해 달렸다.

‘이제 믿을 것은 성물의 결계뿐이야.’

물론 크라켄 새끼의 사체조차 어쩌지 못한 결계의 힘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 크라켄은 다른 마수나 마족들과는 태생부터 다르다.

- 신화시대의 약속…….

국왕에게 들은 고대의 신화에 기대어, 결계의 안쪽만큼은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뿐.

다행히 그 실낱같은 희망은 이어 갈 잠깐의 틈은 주려는 것인지, 다시금 내리쳐지는 다리의 궤도는 왕성을 노리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공격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대도시 위로 다리가 떨어지자, 일대의 저택이 일직선으로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우르르르르릉.

그 타격점에서 시작된 지진은 그 주변의 모든 지형을 뒤틀며 광범위한 파괴로 이어졌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피해!”

“……대가 당했다. 끄윽.”

“으윽, 이렇게 재수 없는 경우…….”

그에 인상을 일그러트리던 타이니는 이내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백성들은 웬만하면 다 왕성 가까이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비명이 많지?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불쾌한 기운이 질주하는 그의 전신을 옭아맸다.

“윽!?”

파아아아앙!

그 기운, 마기는 이내 흩어졌지만, 잠시 멈칫한 사이 검은 기운이 실린 칼날들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동시에 귓가를 울리는 음성들.

“죽어!”

“타겟이다!”

“마나가 약해! 지쳤다!”

그 목소리들이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타들어 가던 타이니의 가슴에 기름을 부었다.

“이 쓰레기들이!!”

콰아아아아아앙!

아무리 지쳤어도 고작 하급 마병들에게 당할 그가 아니었다.

다시 질주하기 시작한 월랑의 위에서 휘두르는 기다란 스탬프가, 다가오는 마병들과 흑마법사를 연달아 으깨어 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 고오오오오오.

다시금 퍼지는 크라켄의 괴성과 함께, 타이니는 머리 위를 뒤덮는 농밀한 살기를 느꼈다.

그리고 완전히 해가 진 것처럼 깜깜해지는 주변.

불길한 예감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대한 빨판이 달린 괴물의 촉수가 보였다.

피하긴 늦었다.

“젠자아아앙!!”

타이니는 비명 같은 고함과 함께 전신에 푸른빛 마나의 갑옷을 둘렀다.

그리고 푸르게 빛나는 워해머를 휘둘러 최대한 충격을 상쇄해 보려 하는데.

“힘 빼세요, 타이니 군.”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은빛 바람이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꽈아아아아아아아앙!

크라켄이 만들어 낸 세 번째 충격파가 오르투스를 강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