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재앙 도래
“오르투스 선박 파괴, 완료되었습니다.”
“이상 사항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이의 입에서 쇠가 긁히는 것 같은 듣기 싫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고개를 숙인 사내의 어깨가 순간 부르르 떨렸다.
이내 사내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으, 은폐 마법진 중 세 군데가 들켜서 파괴되었습니다. 합동 마법진의 효율이 60% 이상 가, 감소하게 될 것 같습니다.”
꿀꺽 침을 삼키며 보고하는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데, 검은 로브가 그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사내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하, 한 곳에서는 암벽의 기사가 등장했습니다!”
“조용히.”
검은 로브의 한마디에, 흥분한 듯 커졌던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작아졌다.
“……다, 다른 두 곳의 흔적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왕실 기사단이 동원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에 검은 로브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보고하던 사내가 그대로 쿵 소리 나게 바닥에 머리를 찍으며 소리를 질렀다.
“죄, 죄송합니다! 이 실수는 반드시 만회를……!”
“잘됐군.”
“……해서, 예?”
사내는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를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멍하니 고개를 들어 검은 로브를 올려다보았다.
‘은폐’ 마법진이 효율이 60% 이상 감소한다는 것은, 단순히 효과가 그만큼 주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카룬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크라켄의 몫이었고, 이번 작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와중에 혹시나 살아남을지 모를 왕가의 핏줄이나 고위 귀족들을 몰살해 왕국의 명맥을 끊는 것이었다.
그런데 은폐 마법진의 효율이 줄면, 그 광범위 색적, 테러 작업을 해야 할 조직원들을 숨겨 줄 마법이 그 역할을 다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조직원들이 다수 희생되어야 하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만약 마기를 사용하는 조직원들을 목격한 이가 살아남기라도 하면 조직의 미래에 크나큰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잘……됐다고?’
공포에 질린 사내가 내심 의아해하면서도 차마 입을 열어 묻지 못하는데, 웬일로 검은 로브의 입에서 친절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성물의 결계 안에서 챌린저급을 상대하는 건 나에게도 버거울 수 있지. 암벽의 기사를 성안에서 빼낸 것만으로도 마법진은 충분한 역할을 했다.”
그 때문에 조직원들이 입을 피해는 염두에도 두지 않는 말이었지만, 사내는 감히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 모르스 가문의 후예는?”
“와, 왕성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향후 행보도 추측이 되지 않는 놈이라…….”
“여전히 놈에 대해 확인된 것은 없고?”
“죄, 죄송합니다.”
사내가 쿵 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머리를 박자, 짧게 혀를 찬 검은 로브가 바로 돌아섰다.
“됐다. 내가 직접 잡아서 확인해 보지. 뇌를 꺼내서라도 놈의 속셈을 알아내야겠어.”
“……예.”
“좋다. 크라켄이 오고 있다, 모두 몸을 낮추고 대기하라. 바다의 재앙이 물러간 직후에 작전을 개시한다.”
“예!”
무사히 대면이 끝났다는 것을 자각한 사내의 입가에 가까스로 미소가 걸렸다.
이제 남은 건 전설의 마수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이삭을 줍는 것뿐.
조직의 최고위 수장이 함께하는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으니까.
* * *
우르르르르르릉.
높이만 해도 거의 30m에 이르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광경은,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옥죄이는 듯한 공포심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 파도가 오기 전부터 준비를 마치고 있던 카룬의 병력들은 애써 마지막 남은 용기를 짜내고 있었다.
“장벽을 올려, 더 높이!”
“마법사들, 준비 더 확실히 해!!”
“왼쪽 방벽 더 올려!”
그그그그긍.
오르투스를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파도에 대항하듯, 동부 항구에서는 높이가 20m 가까이 되는 방파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서 솟구쳤다.
동부 해안가 전체를 방어하듯 우뚝 솟아난 거대한 방벽은 카룬 왕국이 자랑하는 막대한 자본으로 만들어 낸 걸작.
그럼에도 다가오는 파도를 막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장벽의 중심부 바로 뒤편으로 다수의 마법사들이 올라서기 시작했다.
“내 고향, 오르투스를 위하여……!”
“카룬의 운명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막아 낼 수 있어!”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듯 연신 소리를 지르는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푸르게 빛나는 돌을 들고 있었다.
마나가 고정되어 고여 버린 돌, 마정석.
그 희귀하고 값비싼 마법 재료가 백여 명의 마법사 모두의 손에 들려 있었다.
카룬 왕국 소속의 마법사와 용병 전원에게 지급된 마정석이, 현재 카룬 왕실의 부유함을 또 한 번 증명하고 있었다.
“잠시만 버티면 된다! 장벽을 넘어서는 큰 파도는 한 번뿐이다! 지진도 없어!”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마법을 동원하라! 실드도 좋고, 불 계열도 좋다! 멍청하게 전기 계열 마법만 쓰지 마!”
“아직 대피하지 못한 백성들이 많다! 이 중앙부는 절대 뚫려서는 안 된다!”
왕실 소속 마법사들이 연신 소리를 지르며 사기를 북돋웠다.
대략 10m 간격으로 솟구친 방벽의 뒤편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선 마법사들은 저마다 자신 있는 마법을 캐스팅(Casting)하며 다가오는 재앙을 대비했다.
그리고 이내, 집채만 한 파도가 다가오는 순간.
그 압도적인 자연의 폭력 앞에서도 마법사들 대다수는 마법을 시전하는 데 성공했다.
“실드!”
“파이어 월!”
“파이어 봄!”
“바람이여!”
투명하고, 붉고, 하얀 색색의 마나가 솟구치며 장벽의 위를 넘어서려는 파도를 막아 냈다.
콰르르르르릉.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마법사들에게는 정말 억겁과 같이 느껴졌을 한순간이 지나가고.
우르르르르르릉.
그들이 미처 막아 내지 못한 오르투스 외곽은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이 흔들리며 주변 모든 것들이 박살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애초에 예상했던 피해에 비하면 이 정도는 피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모두가 숨죽여 지켜본 첫 번째 파도가, 오르투스의 변두리만을 파괴하고 지나간 것이다.
“우와아아아아!”
“우리가 해냈다!”
“막아 냈어!”
“카룬 만세!!”
환호성을 지르는 마법사들.
하지만 그들의 밑에서 창백한 안색을 간신히 수습한 병사들의 임무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었다.
“아직 재앙이 끝난 것이 아니다!”
“백성들 모두 왕성으로 집합시켜!”
“빨리 움직여, 빨리!”
“자, 다들 살고 싶다면 왕성으로 가!”
재앙을 막아 낸 줄 알고 환호성을 지르던 백성들은 그런 병사들의 태도에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다.
개중에는 격렬히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다.
“……왜, 왜 왕성으로 가란 거야!?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높으신 분들이 사는 곳에 들어가라는 말은, 일반 백성들에겐 결코 좋게만 들리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마수가 다가오고 있다, 왕성만이 안전하다!”
“전하의 결단이시다! 모두 왕성 내부로 대피하라!”
이어진 병사들의 목소리에는 모두가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로 왕성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수……?”
“그게 무슨 소리야!?”
처음에는 대다수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지만.
“전하께서? 그, 그럼 맞……지 않을까?”
“제, 젠장! 그럼 가야지!”
“나, 나도!”
한두 사람이 속도를 내며 왕성으로 향하기 시작하자, 곧 경쟁하듯 달려가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그 결과.
“다 비켜! 내, 내가 들어갈 거야!”
“애들 먼저! 우리 애가 여기 있어요!”
“애는 무슨, 시끄러워! 나부터 살고 봐야지!”
“거기, 줄 서라고! 줄!!”
성문에서는 우르르 들이닥친 사람들과 그들을 통제하려는 병력 사이에 엄청난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소란은 무려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이틀 뒤.
귀족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예상보다 사람이 더 많습니다, 전하.”
“내성 가까이에 있는 저택들을 전부 동원해도 백성들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 전에 크라켄이라니……. 그게 사실입니까, 전하!?”
전례 없는 국가 비상사태에 왕성 안으로 모여든 귀족들.
그중에서도 대전에 모여든 대신들의 시선은 옥좌에 앉은 왕을 향했지만, 정작 그 왕은 아래에 시립해 있는 작은 덩치의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스레 대신들의 시선도 작은 체구의 기사, 타이니에게 집중되었다.
“……타이니 경의 주장이었습니까? 그의 무력이야 인정한다지만…… 너무 터무니없습니다, 전하!”
“맞습니다! 해일이야 그럴 수도 있다고 치지만, 크라켄이라니요? 너무 말도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대체 누가 그런 헛소리를 했나 했더니…….”
여기저기서 들끓는 평민들을 받아 주느라 격에 맞지 않는 협소한 공간에서 이틀간 생활해야 했던 귀족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단순히 불만만은 아니었다.
“전하, 대체 어쩌자고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고작 악마추종자들 몇을 처리했다고, 이런 황당한 말까지 믿어 주시면 아니 되옵니다.”
최근 몇십 년간 악마추종자에 대한 위협을 피부로 느껴 본 적이 없는 귀족들이 대다수였다. 1왕자의 성물 도난 미수 사건은 극비에 부쳐졌으니, 그것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카룬에 와서 무엇 하나 이룬 바 없는 어린 기사에게 왕이 휘둘리는 꼴로 보인 것이다.
현왕 에머드 폰 카룬의 영향력이, 귀족들의 입을 고작 이틀 닥치게 하는 수준에 그친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 적대적인 시선들을 보면서도 타이니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국왕에게 자신의 감각만을 근거로 주장하던 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해일이 밀려오던 시각, 그는 월랑의 인도를 따라 게일 앤더슨의 마나가 끊긴 지역을 다녀왔으니까.
동부의 바닷속을 헤엄쳐 외부의 공기가 들어오는 지하 동굴까지 들어가 봤고, 마침내…….
그들을 발견했다.
“어제 오르투스 동부 한 지하 동굴에서, 크라켄의 새끼로 보이는 마물의 사체와 게일 앤더슨 경의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타이니가 무거운 표정으로 내뱉은 말에 대전의 분위기가 한순간 들끓었다.
“뭐!!?”
“게일 경이!”
“해일의 마도사가 왜!?”
“전하, 그게 사실입니까!?”
아무리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도, 실제로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의 충격은 또 다르기 마련이다
게일 앤더슨의 죽음이 일으킨 경악의 파도가 대전을 덮쳤다.
그리고 왕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켄은 온다. 해일은 그 전설의 마수가 움직이기 시작한 전조일 뿐이야. 그러니 모두 성안에서 대기하라.”
그 말에 잔뜩 달아올랐던 대전의 공기가 한순간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항해가 가능한 선박이 모조리 박살 난 테러……. 그 범인으로 추정되는 악마추종자들이 지금 오르투스에서 암약하고 있을 겁니다. 모두 얌전히 성안에만 계시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입니다.”
외성 경비대장 틸란의 부언에, 얼어붙었던 대전 안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뭐라!?”
“그게 무슨 말이요, 틸란 경!?”
“대체 이 나라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전하!”
“그만! 그만!”
쾅.
옥좌의 팔걸이를 내리치는 소리에, 모여든 귀족들의 목소리가 금세 잦아들었다. 옥좌에서부터 퍼지는 푸른 마나가 서늘한 기운을 품고 대전의 열기를 강제로 가라앉힌 것이다.
그 상황에서 국왕은 엄숙한 얼굴로 선언했다.
“……우리 카룬은 이 위기를 헤쳐 나갈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낙관에 불과한 말.
하지만 수명을 유지하기에도 버거웠던 희미한 마나서클을 쥐어짜 보여 준 작은 퍼포먼스는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믿어야지요.”
“암요, 전하께서 언제 허튼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국왕이 평생을 걸어왔던 길. 카룬 왕국의 부흥을 이어 온 그의 인생이, 그 다짐에 불과한 선언에 설득력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자 국왕은 파리한 안색을 감춘 채 다시 옥좌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감추며 담담한 표정으로 대전을 내려다보았다.
“게일 엔더슨은, 내 친우는 결코 허망하게 죽지 않았으니……. 그의 유산이 우리 왕국을 구할 것이다!”
국왕의 그 말은 결코 근거 없는 말이 아니었다.
게일 엔더슨의 시신이 국왕에게 전해졌던 날, 오열하던 국왕의 손이 그의 시신에 닿는 순간 떠올랐던 메시지.
시신을 전달했던 타이니 역시 그것을 같이 보았다.
- 전하,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떠나는 불충한 신하를 용서하시옵소서. 다만 소신이 전하를 위해,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웠다는 것만은 믿어 주십시오. 여기 그 증거를 남기오니, 제 시체가 부디 전하의 손에 전해지기를 간절히 또 바라고 바라옵니다.
- 소신은, 크라켄 새끼의 몸에…….
자연스레 그 내용을 떠올린 타이니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살아생전 만나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는 생각이 계속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거대한 마기가 느껴졌다.
“젠장! 이렇게 빨리!?”
장내의 모든 이목이 갑자기 소리를 지른 타이니에게 집중되는데, 그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부릅뜬 눈으로 동쪽 창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창밖에 보이는 괴물의 일부를.
우르르르르릉.
이제는 수 미터 수준으로 낮아진 파도 너머.
해수면을 뚫고 하늘마저 꿰뚫을 것처럼 거대한 기둥이 솟구치고 있었다.
마치 문어의 다리를 수십만 배 확대해 놓은 듯한 비현실적인 형태의 기둥.
그 기괴하고 끔찍한 모습의 기둥에서는 먼 거리를 격하고도 전해질 만큼 끔찍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저게 뭐야……?”
누군가의 말이 침묵을 뚫고 대전에 던져지는 순간.
구름에 닿을 듯 솟구쳤던 그 거대한 괴물의 다리가, 오르투스를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