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65화 (65/500)

65화. 마물과 성물

뻐어어억.

“끄……!”

쾅.

털썩.

가장 먼저 달려들던 기사 둘이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피떡이 되어 벽에 처박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사에 그 뒤를 따라 돌진하던 기사들의 발걸음이 주춤하는데, 그 틈 사이로 작은 몸이 파고들며 워해머를 연달아 휘둘렀다.

쾅! 뻑!

꽈아앙!

열한 명의 기사들이 지하 동공의 여기저기에 피떡이 되어 널브러진 것은 그야말로 순간.

“흠…….”

그리고 그 참상을 만들어 낸 주인공은 여기저기 피가 튄 몰골로,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남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트루먼 경? 1왕자님? 안 들어오십니까?”

“이, 이…….”

“이런 젠장!”

뒤늦게 트루먼이 바람의 속성을 전신에 두르며 검을 뽑았지만, 고작 움직임이 조금 빨라진 정도로는 타이니의 워해머를 피할 수가 없었다.

콰아아아앙!

“나, 난 고, 공정한 나라를…….”

단 일격에 하반신이 뭉개진 트루먼이 허망한 목소리로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보는 순간.

1왕자, 루에리 폰 카룬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아…… 아으…….”

그 모습을 보며, 타이니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국왕에게 자식의 생명은 보장해 주겠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가랑이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놈의 꼴을 보고 있자니 굳이 더 손을 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게 왜 그 쓰레기 놈들과 손을 잡으셨어요, 왕자님.”

짧게 혀를 차는 순간.

“타이니 경!”

“저기다!”

“성물로 향하는 통로 앞이다!”

일단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동시에, 그들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오, 이런!”

“트루먼 경도!”

“타이니 경, 아무리 그래도 이런…….”

오랜 평화에 익숙해진 왕실 기사들이 눈 앞에 펼쳐진 참상에 경악하는데, 정작 그 참상을 만들어 낸 당사자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공격하길래 대응한 것뿐입니다. 다행히 왕자님은 멀쩡하시지요.”

……도발에 대응해서 덤볐으면 그냥 죽였을 텐데.

국왕과의 약속이 새삼 마음에 걸렸다.

‘악마추종자와 협력한 쓰레기를 살려 둬야 한다니.’

살짝 아쉬운 본심은 당연히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내 당혹감을 수습한 기사들이 왕자를 향해 다가갔다.

“왕자 저하, 모시겠습니다.”

왕실 기사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그럼에도 왕자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질 뿐이었다.

“누, 누구 마음대로!!!”

“국왕 전하의 명이십니다. 예산 횡령에 대한 명백한 증좌가 확보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 참상의 이유 역시, 가셔서 설명하시지요.”

“우, 웃기지 마라!”

기사의 말에 이를 악문 왕자가 덜덜 떨며 품 안에서 검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칙칙한 색의 구슬일 뿐이기에 기사들은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러나.

“내, 내가 이대로 끝날 줄 아느냐!?”

쾅.

왕자가 그 검은 구슬을 핏물이 흥건한 바닥에 내리꽂는 순간.

쩌저적.

금이 간 검은 구슬이 순식간에 주변의 피를 빨아들이더니, 이내 폭발적인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무슨!?”

“마기다!”

“막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들이 부대장의 명에 따라 황급히 무기를 휘두르는데.

우우우우웅.

콰아아아앙!

일순간 자욱하게 번져 나온 마기는 그들의 공격을 모조리 튕겨 내며 공간을 장악했다.

그러더니 이내.

우드드드득.

콰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빠르게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느새 핏물과 시체까지 사라진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얼핏 사람의 형태처럼 보이지만, 까만 피부, 붉은 눈, 박쥐 날개, 이마에서부터 솟구쳐 뒤통수까지 휘어진 두 쌍의 뿔은 분명한 괴물의 것이었다.

“키에에에에에에!”

불길하게 타오르는 검은 연기를 사방으로 뿜어내는 괴물이 갑자기 괴성을 토해 내며 자세를 낮추었다.

마치 전면으로 뛰어들려는 듯한 기세에 모두가 긴장하는데.

“다 죽여라! 그리고 나, 나를 보호해!”

괴물의 바로 뒤에 있던 왕자의 외침이 괴물의 시선을 돌렸다.

그 결과.

콰직.

“아아아악!”

괴물의 커다란 손이 왕자를 집어 들고는 곧장 입가로 가져갔다.

서서히 벌어지는 괴물의 입.

날카로운 가시처럼 촘촘히 박힌 검은색 이빨들을 본 왕자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는데.

“악마!”

“마족이다!”

“막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괴물을 향해 일제히 돌진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어느새 괴물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소년은 이미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왕자를 잡고 있던 괴물의 왼쪽 어깨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왕자님!”

“잡아!”

놈을 향해 돌진하던 기사들이 왕자를 향해 달려갈 때.

“캬아아아아악!”

타이니는 괴물의 비명을 들으며 사납게 웃었다.

“지성이 없나? 비명뿐이네?”

살기를 뿜으며 다가서는 그를 보며 주춤주춤 물러나던 괴물은 이내 방향을 바꿔 다시금 돌진했다.

타이니가 튀어나옴으로써 비어 버린 공간.

성물이 있는 곳으로.

하지만.

“어딜!”

어느새 접근한 타이니가 돌진하는 놈의 옆구리를 다시 후려쳤다.

콰아아앙!

뻐어어억.

“키에에엑!”

우르르릉.

쩌저적.

놈이 부딪힌 벽에 금이 가고, 거센 진동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좀 전의 일격으로 한쪽 골반까지 으스러진 괴물이 사방에 피를 뿌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 크르르르.

‘굳이 너까지 안 나와도 돼.’

타이니는 영혼의 단짝을 다독이며, 놈을 향해 느긋하게 다가갔다.

그그그극.

길게 늘어트린 스탬프가 바닥에 긁히며 듣기 싫은 쇳소리를 냈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괴물이 말을 듣지 않는 듯한 다리를 질질 끌며 다시금 성물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 했다.

그 모습을 본 타이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목표는 확실히 심어 놓은 모양이군.”

쾅!!!

“키, 키에엑!”

“좀 더 힘을 내 봐. 설마, 이게 끝이야?”

“키, 키륵.”

남은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며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던 놈의 나머지 한 손마저 박살 낸 타이니가 잔혹한 표정으로 웃자, 괴물이 오히려 겁을 먹은 듯 몸을 움츠렸다.

누가 괴물인지 착각할 만한 광경.

그에 눈살을 찌푸린 기사들이 고함을 질렀다.

“타이니 경! 빨리 끝내시오!”

“저런 참담한 것을 굳이……!”

하지만.

“그만! 왕자나 잡아! 이놈은 내가 알아서 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지른 타이니의 고함에, 왕실 기사들은 그때까지도 잘려 나간 괴물의 손에 쥐여 있던 왕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 이럴 수가……. 어찌, 이럴 수가…….”

괴물에게 잡아먹힐 뻔한 왕자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같은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축축하게 젖어 든 아랫도리에선 지린내까지 풍겨 왔다.

누가 봐도 완전히 정신이 나간 모습.

“……빨리 사제들한테 데려가야겠는데.”

그러나 부대장마저 차마 수하들을 재촉하지 못하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타이니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왕자의 상태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 타이니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괴물 앞에 섰다.

“키, 키륵.”

그를 보자마자 기어서 멀어지려고 하는 괴물.

그 방향은 역시 통로 안쪽, 성물이 있는 곳이었다.

“생존 본능보다도 명령이 우선이라……?”

콰아아앙!

타이니가 놈의 머리를 밟아 버리자, 그 압력에 짓눌린 머리통이 그대로 돌계단에 박혀 들었다.

“커, 키에에!”

힘겹게 바동거리는 몸체.

그런 놈의 반항을 타이니는 냉정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힘보다는 내구도에 집중되어 있어. 내구도만 따지면 슈페리어급은 될 것 같은데.’

인간 형태에 박쥐 날개, 그리고 뿔.

세간의 인간들이 흔히 생각하는 악마의 모습.

하지만 이것은 신의 대적자라고도 불리는 진정한 의미의 고위 악마는 아니었다.

그저 수많은 인간을 제물로 만들어 낸 전투용 마물일 뿐.

더구나.

“끼이…….”

놈을 압박한 것은 결코 타이니 개인의 무력만은 아니었으니.

실제로 처음 소환된 시점부터, 이 데빌족 괴물의 피부는 조금씩 타들어 가고 있었다.

우우우웅.

놈이 마기를 뿜어내던 그 순간부터, 성령 결계의 힘이 놈을 압박하고 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녹아 버리겠지만, 저 거대 수정을 파괴하거나 아예 통째로 들고 사라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겠지.’

힘보다 내구성이 강한 데다 비행까지 가능한 마물…….

놈들의 속셈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고위 흑마법사도 없는데 블레이더급 마물을 형성하는 마법이 순식간에 이뤄진다고? 그것도 성령 결계 안에서?”

마기를 감쪽같이 숨기는 수법도 놀라웠지만, 이런 마법은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물론 이런 것이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랬다면 놈들이 굳이 왕자를 이용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악마추종자들의 마법 능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말인데…….’

이런 놈들이 17, 18년 뒤까지 힘을 길러 난을 일으켰는데도 실패했다고?

아르곤이 그렇게까지 뛰어난 녀석이었던가?

아니면…….

“무언가 내가 모르는 변수가 있었거나…….”

조금 떨어진 곳, 넋이 완전히 나가 버린 왕자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본 타이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발에 힘을 더했다.

콰직.

“끼이이.”

마지막 단말마와 함께 검은 재가 되어 사라지는 마물.

카룬 왕실 내부의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의 끝이었다.

* * *

쾅.

“실패? 실패라고!?”

어두운 암실에 분노에 찬 고함이 울려 퍼졌다.

“그분께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이제 몇 개 남지도 않은 작품! 그런데 실패!? 대체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진동하는 살기 속에서 암실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그러다 상석에 있는 이의 시선이 어딘가로 꽂히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그림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또 그놈이 끼어들었답니다.”

“그놈?”

“모르스 가문의 놈 말입니다.”

“그놈이 어찌 알고!?”

“……모르겠습니다.”

“빌어먹을!!!”

쾅!

와장창.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만이 잇따라 들려왔다.

그러다 한참 후.

“후욱, 훅. 변수가 너무 많아졌다. 이렇게 되면 나머지 일이 그대로 진행된다고 해도 왕족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져. 다른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냉정을 되찾은 듯한 상석의 그림자가 그리 말하자, 다른 구석진 곳에 있던 그림자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크라켄이 오르투스의 외성까지만 박살 내 줘도 왕족들이 뛰쳐나오지 않을까요? 그럼 그때 암살을……!”

그 말이 상석의 그림자를 다시 폭발시켰다.

“이 정신 나간 새끼가!!”

쾅.

“너라면 크라켄이 날뛰는데 밖으로 뛰쳐나오겠냐, 내성 안에 숨겠냐? 뇌가 있는 놈이 그따위 헛소리를 해!?”

상석의 그림자가 길길이 화를 내는데, 다른 그림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카룬의 멸망이 우리 조직의 출사표입니다. 비록 세상에 대놓고 알리지는 못하지만 말이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8호?”

“그래서 그분께서 직접 나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랬으니 일을 더 철저히 해야 했고! 그런데 실패를 했잖……!”

“그분께서 직접 가신다고 하셨으니, 방도를 찾지 않으실까요? 크라켄이 날뛰는 공간 안에서 카룬의 병력이 그대로 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은?”

“카룬의 병력만 무너진다면, 고작 성물 결계 따위가 그분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이지요.”

성물 결계는 마기를 거부하지만, 그것이 만능은 아니었다.

조직은 그 약점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물론 지극히 이용하기 어려운 약점이었지만.

“……그렇겠지.”

“그럼 이 정도 변수는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분께 솔직히 보고드리고 처분을 기다리시는 게 나을 것 같단 말입니다.”

8호라 불린 그림자의 말에, 다시금 암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상석의 그림자는 그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바로 딴지를 걸었다.

“……이미 변수가 너무 많이 나왔다. 전설의 마수를 동원한 일이야. 괜히 그분께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우리 조직의 꿈은 못해도 이십 년은 후퇴하게 된다.”

“크라켄이 직접 그분을 노리기라도 한답니까? 그 정도의 변수가 아니고서야…….”

크큭.

8호의 그 말에 암실 안 여기저기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상석의 그림자에게서 자욱한 살기가 풍겨 나오자 이내 잦아들기는 했지만, 반대하던 그 역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분께 보고드리고 처분을 기다린다……. 3호, 그분의 명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

“……예.”

“그리고 8호, 후셀에게 일러 그분의 명이 떨어지는 즉시 게일을 처리하라 이르라.”

“예.”

“그리고 왕자에게 얻어 낸 자원은 계획대로 동부의 조직원들에게 전달하라. 가능한 모든 이들을 동원해. 오르투스의 일을 최대한 끔찍하고 불가사의하게 만들어야 한다.”

“예. 그런데, 모르스 가문의 꼬마는 어찌할까요?”

“그분께 알리고, 처분을 일임하라. 거사를 그르치려는 놈인 만큼, 그분께서 직접 처리하는 것도 괜찮겠지. 그리고 우리 내부 정비를 다시 시작한다. 혹시 놈에게 정보를 제공한 배신자가 있는지 반드시 색출해 내.”

“……알겠습니다.”

“이제 머지않았다. 이제…….”

낮은 목소리를 끝으로, 암실의 그림자들은 하나둘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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