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시작
“이제 연말인데, 자네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나? 휴가 좀 쓰고, 오르투스를 즐기다 와. 대륙 최고의 해양 도시에서 노는 법도 알아야지.”
“……예.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네. 근무나 수련도 좋지만, 쉴 때도 잘 쉬어 줘야지. 한 2주 푹 쉬다 오게. 내 직권으로 휴가를 늘려 줄 테니.”
트루먼의 그 말을 들었을 때, 타이니는 확실히 깨달았다.
‘그 기간에 일을 벌이시겠다?’
전생과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도 재앙의 시기는 얼추 비슷하게 맞춰져 가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뭘, 자네 같은 젊은 인재가 와 줘서 우리 부대의 위상도 높아졌는데 말이야.”
트루먼은 그리 말하며 푸근하게 웃었다. 얼마 전까지 왜 1왕자님을 뵈러 오지 않느냐며 은근히 타박을 주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그것만 아니면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 같은데.’
실제로 1왕자와 관련된 건을 제외하면 주변의 평판 역시 좋기만 했다.
그에 대한 평을 대략적으로 종합하자면, ‘욕심이 없고, 마음이 넓은 사람.’ 정도로 볼 수 있었다.
다만 왜 1왕자의 충복이 되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것은 타이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엇이 인생의 말년에 이른 노기사가 무모한 도박을 하게 만들었을까?
1왕자가 악마추종자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알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며 입이 근질거렸지만. 이제 와 다른 변수를 만들 수는 없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래도 저는 여기에 연고가 없는지라, 휴가 기간에도 종종 수련이나 하러 오겠습니다. 잠도 웬만하면 숙소에서 자렵니다. 이제 막 익숙해졌는데요.”
“아니, 휴가 중에 무슨 수련을……! 하, 크흠. 뭐, 그거야 마음대로 하게. 근무만 안 하면 휴가지, 그럼.”
근무만 하지 마라.
트루먼의 말은 딱 그렇게 들렸다.
그리고 그날, 타이니를 평소와 다르게 대한 것은 트루먼만이 아니었다.
“……신빙성 높은 정보를 얻었네. 자네가 말한 악마추종자와 관련된 일이야.”
“……극비일 텐데, 제게 말씀해 주셔도 되는 겁니까?”
리암의 말에 타이니는 걱정스레 반문했지만, 속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제이 녀석, 확실히 일을 잘해.’
왕실에서 파견되는 것이 암벽의 기사 리암 폰 피터슨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제이가 독하게 버티는 바람에 발렌티아에서 누가 왔는지는 끝내 못 들었지만, 카룬의 패가 리암이라면 크게 걱정할 건 없을 듯했다.
“전하께서는 이미 허락하셨네. 다만, 동행은 어려울 것이네. 아무래도 변장을 해야 하는 임무라…….”
위아래로 자신을 훑어보는 리암의 눈.
그 의미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니,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저는 그냥 왕성을 지키겠습니다. 말씀드렸듯, 전 놈들의 목적이 성물이라 생각하니까요.”
헨리 왕자에게 말한 비밀은 이미 그들에게도 다 전해 주었다.
그렇기에 리암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편이 더 안심이 되긴 하지.”
리암은 그리 말하며 타이니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 왕실 기사단장 리암 폰 피터슨이 깨달음을 얻어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는 말이 왕성 내부에 퍼지기 시작했다.
* * *
- 아우우우우우.
자신의 머릿속에만 울리는 월랑의 울음소리에 타이니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나 보네.’
깊은 밤, 왕성의 첨탐과 첨탑 사이를 영체 상태로 뛰어다니며 달빛 샤워를 즐기는 월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파수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 크르르르.
‘아, 미안. 집 지키는 개 취급을 한 건 아니야, 진짜로!’
- 킁.
……약간 예민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타이니는 방에서 적당히 휴식을 취하며 월랑의 소식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애초에 내가 오감을 전부 동원해서 감시해 봤자, 월랑한텐 한참 못 미치고.’
- 킁!
피식.
그래, 너 잘났다.
그렇다고 완전히 잠들 수도 없으니, 적당히 깨어 있기 위해서라도 잡생각은 필수였다.
‘왕실 기사단장이 깨달음이니 폐관 수련이니 하는 말을 꺼내 들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카룬은 동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단 말이야.’
왕국 연합이나 아스란 제국만 해도, 기사가 무슨 깨달음 운운한다면 미친놈 보듯이 볼 게 뻔하다.
그렇기에 핑계가 생각보다 더 쉽게 먹힌 것이기도 했다.
‘1왕자 쪽에서도 그렇게 쉽게 생각해 줘야 할 텐데 말이야.’
그가 알기로는, 크라켄이 오르투스를 초토화시켰을 때 성물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정말 마법으로 크라켄을 유인하는 거라면 그 전에 성물을 빼돌리려 할 테니, 이번 자신의 휴가 기간 내에 일을 벌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당연했다.
오늘로 휴가 5일 차.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배를 추적하는 일도 어찌 진행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제이의 추측대로라면 슬슬 입김이 올 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나저나, 악마추종자한테 성물을 넘기는 조건으로 1왕자는 뭘 받았을까? 설마, 정말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 아무리 현재 성물이 유명무실하게 느껴진다 해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닐 텐데. 분명 뭘 더 받았을 거야. 뭘까…….’
하지만 실제로 전생에 카룬은 완전히 망해 버렸으니, 1왕자가 무엇을 얻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뭐, 정말 권력욕에 취해 바보가 된 걸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을 이어 나가던 찰나.
- 컹!
월랑의 신호가 왔다.
* * *
“저하, 그래도 성물은 인류의 보배입니다. 그 정도 대가로 넘기기에는 좀…….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심이 어떨까요.”
“그만, 트루먼 경. 이제 와서 나를 실망케 할 셈인가?”
“하오나…….”
“반론은 받지 않겠네, 트루먼. 마지막 권고네. 따를 텐가, 이제 와서 돌아설 텐가?”
스릉.
검을 뽑아 드는 루에리 왕자의 모습에 트루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작 1서클, 마나유저도 아닌 마법사가 휘두르는 검에 당할 정도로 그는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은 왕자도 알고 있었다.
“왕실의 수많은 기사를 키워 낸 공로, 기사단 체제 정비……. 모두가 자네가 이룬 공이지. 그러나…….”
왕자는 이내 검을 거꾸로 잡더니 트루먼에게 슥 내밀었다.
“……리암은 오직 무재가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기사단장에 백작까지 되었는데, 자네는 영지도 없는 남작으로 은퇴하고 말겠지.”
내민 검을 외면하듯 눈을 내리깔아 보지만, 왕자는 억지로 그 검을 트루먼의 손에 쥐어 줬다.
“헨리 역시 마찬가지야. 그 건방진 놈이 고작 마법적 성취 좀 뛰어나다고 왕위를 이어받아?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국가를 다스리고 백성을 잘살게 하는 일이 개인의 무력으로 하는 일이던가? 그 말도 안 되는 미래를 순순히 받아들이려는 건가? 그럴 거면 자네가 지금 나를 베게!”
눈을 질끈 감고 팔을 벌리는 왕자.
그를 보는 트루먼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보는 이가 없는 상황에서 검을 준다는 것은 그에게 목숨을 맡긴다는 뜻.
‘……일 리가 없지.’
이제는 안다.
저 호방해 보이는 퍼포먼스는, 오직 상대가 자신을 벨 배짱이 없다고 확신할 때나 나온다는 것을.
그가 지금 왕자를 해하고 다른 줄을 잡아 봤자, 결국 왕족을 시해한 죄로 사형에 처해질 뿐이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1왕자가 손을 잡은 세력이 악마추종자들이라는 것만 알았더라도 선택을 달리했을 것이다. 그것만 봐도, 루에리 왕자가 무재뿐 아니라 왕재로도 헨리 왕자에게 뒤처진다는 걸 확신했을 테니까.
그러나.
“개인의 힘에 휘둘리지 않는 왕권과 공과에 대한 확실한 평가. 그것이 자네가 원하는 것 아니었나? 그것은 나만이 만들어 줄 수 있어, 나만이! 카룬의 핏줄임에도 마나의 재능이 없는 나만이!”
왕자의 저 말이, 예전에 그랬듯이 지금도 그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대마도사의 후손이라 자부하는 카룬 왕실의 장손임에도 마나에 재능이 없어, 편법으로 새겨 넣은 1서클.
끝없이 동생들과 비교당한 루에리 왕자.
그리고 천재 기사를 동기로 둔 탓에 한없이 비교당했던 늙은 기사의 설움.
왕자와 그가 가진 유일한 공통점이 다시금 그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래, 그랬지.’
검술로는, 무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수련에 힘을 쏟는 대신 수많은 공훈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그런 그가 말년에 손에 쥔 것이라고는, 영지도 없는 남작위와 한직인 성물 수호대로의 발령뿐이었다. 자신과는 달리 수련에 더욱 몰두한 동기, 리암과는 이미 신분부터 하늘과 땅만큼 벌어져 버린 것이다.
‘공정하지 않아…… 현왕이라 불리는 전하조차!’
그러니 자신은 이래도 된다.
오랜 세월 가슴 아래 쌓아 온 분노가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계획은 확실한 것입니까, 저하?”
“어차피 게일 앤더슨이 사라진 이상, 우리 왕실은 그들을 막을 힘이 없어. 타이니? 미래의 초인? 흥, 그 줏대 없는 녀석이 당장 힘이 되지도 않을 테고 말이야.”
“그렇다면…….”
“우리 왕국은 그들의 힘을 빌려 다시 대륙의 강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개인의 무력에 의지하지 않고 지혜로운 이들이 지배하는 나라로, 그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발전할 것이야.”
“……따르겠습니다.”
“좋아.”
1왕자파의 마지막 남은 양심의 소리는 그 순간 사라지고 말았고.
“오늘 성물 수호대의 경비는 저를 따르는 기사들뿐입니다.”
트루먼과 그를 따르는 기사들은 1왕자와 함께 조용히 내성의 지하로 향했다.
“성물을 옮기는 방법은 확실하겠지요?”
“그들이 마련해 준 수단이 있다. 충분히 가능해. 희생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왕자가 품 안에서 꺼내 든 검은 묵주는 왜인지 섬찟하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마지막 말도 마음에 걸렸다.
‘희생이라…….’
그 말에 트루먼의 눈동자가 다시금 흔들렸지만, 그는 이내 얌전히 벽에 출입증을 댔다.
우우우우웅.
그그그그긍.
오랜 세월 그나마 자신의 마음을 치료해 주었던 따스한 빛을 마주한 순간.
“거기까지.”
탁.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문이 자리한 복도 끝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에리 왕자, 트루먼 폰 에니스, 이하 11인. 국가 반역 행위 및 악마추종자 협력 행위로 체포하겠다! 모두 꿇어라!”
이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환한 빛이 새어 나오는 복도 위로 무거운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어려 보이는 외모에 웬만한 성인 여자보다 작아 보이는 덩치였지만, 지금 이곳에 그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그에게 당한 전적이 있는 마손 등의 기사들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타이니의 무력을 직접 본 적이 없는 다른 기사들은 자신들의 수적 우세를 믿었다.
“감히!”
“지금 누구 앞에서 헛소리를!”
“저하, 명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왕자와 트루먼의 반응은 달랐다.
그들의 눈빛이 재빠르게 교차하고.
“……아, 타이니 경. 휴가인 줄 알았는데, 여긴 어쩐 일인가?”
“왕자님께서 성물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잠시 내려온 것뿐이네.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타이니 경?”
흔들리는 눈을 빠르게 추스른 왕자와 트루먼이 태연하게 반문했다.
등 뒤에 있던 기사들이 오히려 당황할 정도의 태세 전환.
그러나 타이니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왕자님. 품 안에 그것, 제게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무, 무얼 말인가?”
“좀 전에 자랑스레 말씀하신 ‘그들이 마련해 준 수단’ 말입니다.”
그 말에 왕자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하, 뭘 말하는지 모르겠군.”
“그럼 제가 뒤져 봐도 괜찮겠습니까?”
“……감히 지금 왕족을 능멸하겠다는 건가?!”
왕자가 호통을 쳐 보지만, 타이니는 살벌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국왕 전하께서는 악마추종자와 관련된 모든 이에 대한 처벌 권한을 제게 일임하셨습니다. 거리끼는 것이 없다면 제게 수색을 허락하시지요.”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거부하실 겁니까?”
검은 눈동자가 살기를 품고 번뜩이는 순간.
- 아래다!
- 침입자다!
- 잡아!
계단의 위쪽에서부터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설마 시간을 끌었……!?’
이대로 잡히면 절대 안 된다.
기겁한 왕자가 이를 악물며 소리를 질렀다.
“쳐라!”
그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열린 문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래, 사실 나도 이게 편해.”
타이니 역시 사납게 웃으며 워해머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