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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60화 (60/500)

60화. 정리와 증명

“하, 그걸 버텼다고?”

오랜만에 느껴 보는 짜릿한 손맛에 미소를 짓던 것도 잠시.

바닷속에서 오히려 더 큰 존재감을 풍기는 적을 보며, 타이니는 인상을 구겼다. 월랑의 반실체화도 포기하며 남은 힘을 모조리 쏟아부었는데도 놈을 끝장내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래도 적이 받은 타격이 훨씬 클 것이라는 사실 정도였다.

타이니의 시선이 중천에 떠오른 보름달을 흘깃 바라보았다.

저것이 좀 걸리긴 하지만…….

‘아무리 만월 아래 수인족이라 해도, 그만한 충격을 회복하는 건 쉽지 않을 거야.’

그 추측을 증명하듯, 밤바다 아래서 꿈틀거리는 적의 그림자는 더 이상 인간 형태가 아니었다.

새카만 수면 아래로 언뜻 보이는 유선형의 실루엣.

타격을 회복하기 위해 짐승의 형태를 택한 것이 틀림없었다.

‘범고래(killer whale)라고 했던가.’

고래라고 하길래 전생에서 한 번 보았던 거대한 물고기를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훨씬 작은 4~5m 수준에 불과했다.

저것도 고래라면 새끼 수준의 크기가 아닐까 싶었다.

‘뭐, 인간이었던 몸이 저렇게까지 불어나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지만.’

자연스럽게 전생의 동료 중 한 명이 생각났다.

평소에는 호리호리한 일반인 체격이었지만, 수인화하면 전생의 자신보다도 커졌던 수인족의 초인, 문나이트.

나아가, 그가 한 말 또한.

- 당연히 비스트 폼(Beast Form)도 가능하긴 하지만 보통의 동족들은 잘 쓰지 않아. 짐승으로 격하된 느낌이 드는 데다가…….

- 우리도 결국 인간이잖아.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수인화(Beast-Human Form) 상태가 가장 편하니까.

‘그런데 서슴없이 동물화를 택했어. 확실히 일반 수인족과는 다르다 이거지.’

물론, 물속에서는 반(半)인간 형태보다는 고래 형태가 효율적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뭐, 진짜 고래만큼 커지지 않은 게 어디야.’

어쨌거나 그 크기가 작다 한들 본질은 슈페리어급의 물 속성 마나유저이니, 바다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러니 끝장을 내려면 육지에서 붙어야 했다.

‘저 상태로 육지에서 활동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타이니가 적을 노려보며 마나를 회복하는데, 갑자기 검은 실루엣이 방향을 트는 것이 보였다.

육지가 아닌, 보다 깊은 바다로 향하는 듯한 움직임.

“……그냥 도망간다고?”

황당한 타이니의 시선이 난장판이 된 부둣가로 향했다.

이미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악마추종자들의 시체는 그렇다 치더라도.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한 듯 벌벌 떨고 있는 짐꾼 몇몇.

그리고 바다 아래로 가라앉은 정체 모를 화물들.

이 모든 것이 놈이 악마추종자와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가 될 텐데?

‘그래도 연관성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곳에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이 있나?’

혼란스러웠지만, 당장 바닷속에서 고래를 쫓아갈 수는 없었다.

“젠장…….”

그래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는데.

- 크르르. 컹!

영혼 저편에서 월랑이 의외의 뜻을 전해 왔다.

‘쫓아갈 수 있다고?’

아, 영체 상태로…….

‘……는 안 될 텐데? 놈이 어디까지 갈 줄 알고?’

영체화한 월랑을 보낸다 해도 자신과 거리가 멀어지면 역소환될 수밖에 없다. 영체 상태가 술사의 부담을 최소화한다 해도 거리의 한계까지 없애지는 못하는 것이다.

저기 건너편에 보이는 작은 섬 정도가 한계일 텐데.

- 컹! 컹!

그 상념이 전해지자 월랑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전해지는 녀석의 기억.

살아생전 거대했던 월랑이 그 무게가 무색하게 허공을 밟고 연달아 도약하는 광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물 위를 평지처럼 밟으며 질주하는 장면 또한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생전의 월랑이 가졌던 또 하나의 특기.

- 컹!

지금의 너라면 할 수 있다고, 얼른 힘을 회복하고 날 소환하라고.

월랑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이니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미안한데, 전혀 감이 안 잡혀.’

- 크르르르.

월랑의 짜증 섞인 울음이 그의 입가에 쓴웃음을 만들 때.

이미 범고래과의 수인족은 더 이상 기척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설령 할 수 있다 해도…….’

그래선 안 된다.

- 혹시나 그가 적이라면, 바다 위에선 싸울 생각을 하면 안 되네.

국왕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좀 전의 전투만으로도 충분히 체감했다.

육지에서도 간신히 물리친 놈이니, 지금 상태로 바다에서 싸우는 건 절대 안 될 일이다.

거기다.

- 1번 부두다!

- 서둘러!

뒤늦게, 멀리 성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을 두고서 자리를 비울 수도 없었다.

짜증이 치밀어 괜스레 남은 짐꾼들을 노려보는데.

“흐아악!”

“사, 살려 주십쇼!”

“저, 저희는 아무것도 모, 모릅니다. 제발……!”

부둣가에 있던 짐꾼들이 그대로 엎드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야밤의 추격전은 그렇게 절반의 성공으로 끝이 났다.

* * *

“죽은 시신들을 확인했습니다. 통제를 벗어난 마기에 의한 부식으로 보아, 전부 악마추종자가 확실합니다.”

“가라앉은 화물들은?”

“대부분이 마법적 의식에 쓰이는 물품과 보석들입니다. 하나하나가 마법 물품치고는 비싼 것이 아니지만, 양이 상당합니다. 전부 합한다면 왕국의 반년 치 예산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말에 대전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흠칫 놀랐다.

단일 국가로는 아스란 제국 다음으로 부유하다 자부하는 카룬의 반년 치 예산이 작은 배 한 척에 들어 있었다니?

게다가 그 배를 운항하려던 건 악마추종자들이었다. 놈들이 수도 오르투스에서 무슨 일을 벌이려고 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보고를 들은 이들 중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국왕 에머드 폰 카룬이었다.

“……으음, 살아남은 짐꾼들도 있다고 들었다.”

“심문 중입니다만, 지금으로서는 아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야간에 수당을 몇 배로 준다는 말에 동원된 이들입니다.”

“허…….”

외성 경비대장, 기사 틸란은 그 말을 끝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국왕의 시선이 그 옆에 서 있던 노기사에게 향했다.

“리트만 경이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찾았나, 리암?”

“……없습니다. 다만 내성에 있어야 할 리트만 경이 전하께 보고도 없이 사라진 것만은 확실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되겠는가?”

“……죄송하지만, 짐꾼들도 쌍검의 번뜩이는 빛과 리트만 경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워터블레이드를 목격했습니다. 묘사하는 외모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만…….”

부둣가에 있던 건 리트만, 아니 후셀이 맞는 것 같다는 뜻이었다.

왕실기사단장 리암의 말에 국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도 모르게 붙였던 전문 미행자들도 모두 후셀의 종적을 놓쳤다.

‘정말 아니길 바랐는데…….’

상황은 전부 그가 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려 오자 그저 누워서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야 없지.’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금 정신을 다잡았다.

수명이 다해 가는 육신이 무리하지 말라며 비명을 지르는 듯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 나라를 지켜야 할 국왕이니까.’

아들 중에서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막내도 아직 부족하기만 하니…….

‘내가 지금 무너져선 안 돼.’

늙은 왕은 몇 번의 심호흡을 토해 내더니, 한순간 몇 년은 더 늙은 듯한 얼굴로 다른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얌전히 시립한 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검은 머리 소년이 있었다.

그를 보며, 왕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15년, 아니 16년 전인가. 그가 내게로 온 이후로 우리는 새로운 동방 항로를 두 군데나 더 개척했네. 그것만으로도 우리 왕국의 재정은 두 배 이상 풍족해졌지.”

왕의 멍한 시선은 소년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의식은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버림받은 돌연변이도 세상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며, 야망에 불타던 남자였다. 그리고 그것을 실력으로 증명했지. 그런데 왜……?”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망연한 어조로 나온 말은 그 자신의 각오와 달리 서글픔만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송구하옵니다만, 전하. 리트만의 공을 아는 자가 거의 없더군요. 실종된 항로 탐색 대원들이나 알고 있을까요.”

검은 머리 소년은 그런 왕의 논리에 담긴 허점을 지적했다.

정말 그가 세상에 자신을 증명하고자 했다면, 왜 이룬 공을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았느냐는 뜻이었다.

그에 왕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그가 원한 것이었다. 성과를 거둔 직후 짐에게 마나의 맹세를 요구했을 정도로. 그래서 보통은 그를 탐사대의 호위 기사 정도로만 알고 있지.”

그 말에 틸란과 리암의 눈이 크게 흔들렸지만, 검은 머리 소년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욱 의심해 보셨어야 했습니다. 세상에 능력을 증명하고자 하는 이가 왜 정체를 숨기려고 하는지.”

“그야 웨어비스트 왕국의 추살대가…….”

“본명이 아닌 리트만의 이름만 알렸어도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정체와 능력은 숨기더라도요.”

“그것은…….”

‘그랬다가는 정확한 공과에 대한 추궁을 피할 수 없다.’, ‘그가 당당하게 정체를 알릴 시기를 보고 있었다.’ 등등,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국왕의 입에선 말 대신 밭은기침과 함께 옅은 피가 배어 나왔다.

맹세를 어긴 반동이, 마음이 심약해진 국왕으로 하여금 피를 토하게 만든 것이다.

“전하!”

“전하!! 사제를 불러라! 사제를!!”

틸란과 리암이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국왕에게로 달려갔다.

그런 그들의 시선에는 타이니를 향한 적개심이 묻어났다.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이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내 힘없이 올라간 국왕의 손에 의해, 바쁘게 달리던 신하들은 주춤거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 난 아직, 괘, 괜찮다. 흐, 흐흐. 그래, 타이니 경.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야. 그 긴 시간의 충성이 없었다면, 나 역시 그를 믿지 않았을 것이니.”

“……죄송합니다.”

“죄송할 이유는 없지. 정황이 명확하니 말이야. 하지만 그 긴 시간이 전부 거짓일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카룬은 쿠……, 쿨럭. 커흑.”

“전하!”

“……리트만 경의 흔적을 쫓되, 생포를 우선으로 하라. 리암, 자네가 나서게.”

“……예, 전하.”

연신 기침을 토해 내는 국왕의 얼굴을 보며, 노기사는 안색을 굳힌 채 무릎을 꿇었다.

국왕의 처절하기까지 한 몰골에 대전의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다만 한 사람.

현왕, 에머드 폰 카룬의 업적을 직접 겪지 않은 소년 기사만큼은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가 악마추종자들과 꾸민 음모가 카룬의 안위를 위협한다 해도 말입니까?”

“타이니 경!”

“무엄하다!”

늘어서 있던 대신들과 카룬의 고위 기사들이 일제히 기세를 피워 올리며 그를 압박했지만, 타이니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국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 자리에 앉은 뒤 많은 업적을 이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이라곤 단 하나뿐이니…….”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사람을 믿고, 신뢰를 받고, 그 신뢰에 보답하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현왕이라는 과분한 호칭을 얻었다.”

좀 전의 초췌했던 모습은 거짓이었던 양, 왕은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위엄이 깃든 눈으로 대전을 내려다보았다.

“전하!”

“……전하.”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노인에게 평생을 고수해 온 삶의 방식을 바꾸라고 강요하지 말게, 어린 기사여. 나는 이 삶의 끝까지 내 방식을 지켜야겠으니……”

늙은 왕을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이 복잡한 심경을 담고 엇갈리는데.

“……하지만 젊은 피의 의견을 마냥 무시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지. 타이니 경, 그대는 그대의 뜻대로 하게. 단 그대가 카룬의 병력보다 후……셀을 먼저 찾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네.”

늙은 왕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자신이 한 맹세의 반동을 견뎌 냈고, 그 말을 듣는 모든 이들의 눈이 빛났다.

특히나 왕실 기사단장 리암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무슨…….’

엄연히 카룬의 기사로 임관을 청한 타이니를 카룬과 별개의 사람으로 대하는 듯한 말이었으니까.

거기다.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해서든 카룬에 들이닥칠 재앙을 막아 내겠습니다. 반드시!”

어린 기사마저도 그것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으니.

“……물러가거라. 그리고 일의 진행 상황을 시간 단위로 보고하도록.”

왕의 마지막 명령에도, 장내의 모든 시선은 검은 머리 소년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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