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리암
“후셀이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마음부터 꺾여 버린 마손은, 이제는 타이니의 물음에 성심성의껏 답해 주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인가? 전하께서 언급하신 이름인데?”
“어…… 특이한 이름이니까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반드시 기억이 났을 겁니다.”
그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마손을 통해 만난 자칭 선임 기사들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처, 처음 들어 보는 이름입니다.”
어린놈이 건방지다며 주먹을 휘둘렀던 트렉이 시퍼렇게 멍든 눈을 문지르며 그렇게 대답했고.
“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입이 간이 부었다며 정강이를 걷어차려던 길버트는 한쪽 다리를 쩔뚝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듯했고, 대답에서도 절절함이 묻어나는 것이 적어도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물론 타이니는, 쓸데없이 군기를 잡으려던 놈들의 심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도움 되는 놈이 없네.’
아무리 한직이라지만 왕실 기사들도 모르는 이름을 왕이 안다?
‘무슨 이유일까.’
왕은 안다. 그런데 그 휘하의 기사들은 모른다.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질 뿐이었다.
타이니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저기…….”
“음?”
괴물을 끌고 들어왔단 이유로 선배들의 눈총을 받고 있던 마손이 슬쩍 끼어들었다.
“……대장님이라면 아실 수도 있습니다.”
“대장?”
“예. 저희 성물 수호대 대장, 트루먼 경께서는 가장 연륜이 깊으신 만큼 왕실의 대소사에 빠삭하시니까요.”
그 말에 타이니가 다른 기사들을 바라보자, 그들 역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후면 휴가에서 복귀하십니다.”
“직접 물어보심이…….”
‘트루먼 경이라.’
다른 기사들의 꼴을 보면 성물 수호대의 대장이라는 그조차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이제 막 배치를 받았는데 왕실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일주일 동안은 조용히 왕실의 분위기나 살펴야겠어.’
타이니는 그렇게 다짐하며 연신 새어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그러나 그런 그의 다짐은, 당장 그날부터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네가 그 헛소문의 주인공이냐? 나는 왕실 기사단의 그렉 심볼이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닌 네놈의 실체를 까발려 주겠다! 검을 들어라!”
……뭐지, 이 미친놈은?
입 안에 음식을 쓸어 넣던 타이니는 한숨을 쉬며 접시를 내려놓았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신고식(?)을 마친 후 얌전히 식당에서 밥이나 먹으려 했는데 웬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이제 막 에피타이저 열두 접시를 해치우고 본격적으로 먹어 보려던 참인데 말이다.
“……그, 그 지저분한 식사 예절만 봐도 소문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겠구나. 어서 검을 들어라!”
그 말에 타이니는 내려놓은 접시와 제 몸 이곳저곳을 무의식적으로 훑어보았다.
‘깨끗하기만 한데?’
……설마, 지금 한창 성장기인 소년이 밥 좀 많이 먹는 거 가지고 시비를 거는 건가?
음식이 맛있었던 만큼 짜증이 배로 치솟아 올랐다.
탁.
“……나가지.”
“오냐, 따라와라. 악마학살자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잠재우고 이 그렉 심볼의 명성을 증명하겠다. 네놈이 진짜 실력이 있다면 성물 수호대 따위에 들어갈 리가…….”
주절주절 떠드는 목소리에 손이 절로 근질거렸다.
그리고 딱 5분 후.
우드드득.
쾅!
꽝.
콰아앙.
“끄, 끄륵.”
철푸덕.
그렉인지 뭔지는 검을 휘두르던 손목이 붙들린 동시에, 연무장 바닥과 격한 포옹 세 번을 끝으로 피를 왈칵 토해 내며 의식을 잃었다.
“쯧.”
딴에는 20대에 익스퍼트에 올라 자신감이 넘쳤던 모양이지만, 이미 타이니에게 동급의 기사 정도는 식전 운동도 되지 않았다
“……잘 배웠습니다.”
다만 보는 눈들을 생각하여 나름대로 정중한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좀 살살할 걸 그랬나.’
왠지 뒤통수에 시선이 많이 몰린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그날부터 현실이 되어 매일같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렉 경을 이겼다고 들었다. 나, 타닌 로이어가 우연인지 판단을…….”
꽈아아앙.
전날 식사를 방해했던 놈보다는 조심스러워진, 하지만 여전히 건방진 놈을 또 패대기쳐 주고.
다음 날.
“왕실 수호대 수위 기사 로버트 덤벨이 그대에게 대련을 청합…….”
쾅!
조금 더 정중하게 나온 놈은 그나마 살짝 손봐 줬다.
또, 다음 날.
“왕실 기사단 부대장 란돌프 그란체스가 그대와 실력을 견주어 보고 싶소.”
뻐어어억.
정중히 대련을 청한 기사는 그 수준에 맞춰 무기까지 든 채 상대해 주었다.
그렇게 마지막 부대장, 블레이더급의 왕실 기사가 무너진 이후에야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기사들의 대련 신청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갑자기 영입된 기사, 그것도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타종족 혼혈(?) 기사의 실력에 대한 의심이 확연히 사라진 것이다.
“휴, 이제야 좀 마음 놓고 먹을 수 있겠네.”
식당에서 차분히 접시를 쌓아 가는 타이니의 얼굴에는 며칠 만에 미소가 돌아왔다.
시비를 거는 기사들의 태도가 점점 정중해지긴 했지만, 지난 며칠간은 꽤 귀찮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중에서는 그나마…….
‘란돌프 경이라고 했던가? 그 블레이더급 기사는 좀 쓸 만했지.’
처음으로 스탬프를 휘두르게 만드는 왕실 기사단 부대장을 떠올리며 타이니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강자와의 대련은 그에게도 약이 되는 것이지만, 요새는 손맛을 느낄 만한 상대를 만나기 힘들었다. 개량된 염체의 비전과 중력 속성 덕에, 경지에 비해 너무 압도적인 무력을 갖게 된 탓이었다.
“그래도 그 사람 정도면 제법이긴 했어.”
더구나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적당한 운동과 폭식을 병행했더니, 마나량이 소폭 늘어나고 키도 한 치는 더 큰 것 같았다.
그만큼 몸이 조금 더 단단해지고 무거워졌는데, 그 성장세가 가슴속에 쌓인 답답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계속 잘 먹을 수만 있으면, 일 년에 머리 하나 정도 더 크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은데.’
물론 그렇다 한들 전생처럼 무식하게 몸을 불릴 생각은 없었다.
딱 타고난 한계까지만 성장할 것이다. 그것이 마나 효율을 최적화하는 길이라는 걸 명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제 1년 정도면 클로이랑 키가 비슷해지려나? 다시 만나면 놀라게 해 줄 수 있겠군.’
맛있는 음식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
잠시나마 후셀에 관한 일을 잊고 흐뭇한 미소를 지은 타이니는 배가 적당히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또 한 접시를 비워 냈다.
탁.
“여기, 스테이크 딱 세 접시만 더 가져오게.”
“……예, 기사님.”
그 말에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질린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체구보다 더 많은 양을 먹는 자신을 보고 당황하는 반응엔 제법 익숙해졌으니까.
그런데 그때, 뒤쪽에서 심상치 않은 기척이 느껴졌다.
“호오, 자네가 바로 그 신성인가? 우리 애들을 무참히 박살 내고 다닌다는…… 악마학살자라느니, 포식의 악마라느니. 희한한 별명도 붙었더군.”
포식의 악마는 또 뭐야?
그 어처구니없는 별명에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보자, 금발과 흰머리가 반쯤 섞인 중후한 인상의 노기사가 보였다.
웃는 얼굴에는 여유가 넘쳐 보였고, 은근하게 풍기는 기세는 그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음에도 도무지 경계를 풀 수 없게 만들었다.
“쿼터 엘프라더니, 정말 어려 보이는군. 더군다나 드워프보다 많이 먹고, 허허허……. 그런데 자네, 익스퍼트급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란돌프를 이긴 거지? 이거 신기한 친구구먼?”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노기사.
하지만 그를 보는 타이니의 감각은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슈페리어급 최상…… 아니, 아니야. 챌린저급 초입인가? 허…….’
생각지도 못한 강자의 등장에 그 역시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뉘신지요?”
“음? 아…… 하하, 이거 실례를 했군. 이곳에서 내 소개를 해 본 지가 오래되어서 말이네. 카룬의 왕실 기사단장, 리암 폰 피터슨일세.”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타이니는 상대에게서 느껴진 기세를 납득할 수 있었다.
왕실 기사단장이라면 명실공히 카룬 왕국 기사의 정점.
그라면 이 정도 기세를 풍길 만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즉시 타이니 역시 자세를 바로 하고 예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실례했습니다, 각하.”
‘폰’이라는 첫 번째 성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가문이나 승계권을 가진 귀족이라는 사실.
본래 왕실 기사는 보안을 위해 그 태생부터 가려서 뽑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기사는 하나의 성만을 가진, 승계권이 없는 다른 왕실 기사들과는 근본 신분부터 다른 인물일 터였다.
“아니, 그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는 없네. 나 같은 늙다리 퇴물이야 자네 같은 젊은 인재를 보면 즐거울 뿐이니. 아, 혹시 나와도 어울려 줄 수 있겠는가?”
“……예?”
“대련을 하잔 말일세. 그…… 자네가 묻고 다닌다는 후셀이라는 이름은 나도 모르네만, 그럼 안 받아 주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영광일 따름입니다.”
카룬 왕실에 얼마나 오래 있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왕실 기사단의 실세와 척을 지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됐다.
무엇보다 눈앞의 노기사와 친분을 쌓을 수 있다면, 앞으로 카룬에서의 일이 굉장히 수월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기사들의 친분 쌓기는 역시 대련이니까.’
여태까지 그가 박살 내 버린 기사들이 과연 그를 친근하게 여길지를 생각해 본다면 심각한 결함이 있는 사상이었지만, 어쨌거나 이미 타이니의 눈은 한껏 달아오르고 있었다.
‘챌린저급이라!’
우웅.
꿈틀거리는 염체 역시 새로운 경험을 새길 준비를 하며 기쁘게 진동했다.
“듣자 하니 나이 스물에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도 성물 수호대에 지원했다던데, 이유가 뭔가?”
연무장 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리암이 불쑥 물었지만, 이미 투지를 끌어 올린 타이니는 사납게 웃으며 스탬프를 꺼내 들 뿐이었다.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자네 같은 인재가 왕실 기사단으로 오지 않고 한직을 자청했다는 게 의아해서 그러네.”
“저를 이기시면 이유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허? 자신감이 지나치구먼. 아무리 젊다지만…….”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법이지요. 혹시 제가 이긴다면, 제 부탁이라도 들어주시렵니까?”
“허, 천재는 오만하기 마련이라지만…… 쯧. 좋아, 그러지. 자네를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교훈을 심어 줄 필요가 있겠어. 오게!”
연습용 가검을 쥐고 반대쪽 손을 까닥이는 리암을 보니 오히려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회귀 이후, 챌린저급과 제대로 싸워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황태자의 호위 기사와 몇 수 부딪쳐 본 적은 있지만, 그때는 무기도 없어서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달라.’
경지는 그대로지만 숙련도가 올랐고, 미약하게나마 육체와 마나도 성장했다.
무엇보다, 중력 속성을 극대화할 아티팩트 스탬프가 손안에 있다.
‘더구나 이건 대련이다.’
목숨을 걸 필요도 없이 압도적 강자를 상대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
“적당히 수준을 맞춰 주겠지만, 각오는 단단히 해야 할 거야.”
“그럼, 감사히…….”
탓.
타이니는 짜릿한 기분을 만끽하며 그대로 리암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여유로운 표정의 리암의 머리 위로, 전력을 다해 스탬프를 휘둘렀다.
‘생각보다 화끈할 겁니다.’
꽈아아아아아앙!
콰콰콰콰콰.
사방이 막힌 연무장에 때아닌 돌풍이 불어닥쳤다.
한순간의 격돌이 만들어 낸 충격파의 잔향.
1m 남짓한 전투 망치가 비슷한 크기의 검과 부딪친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바닥의 석판에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허!?”
그 중심에서 타이니는 무척 놀란 듯한 리암의 표정을 보며 마주 웃었다.
그그극.
“쉽게…… 생각하시면…… 낭패를 보실 겁니다!”
쩡!
순간적으로 무게를 줄인 스탬프로 검날을 흘리며, 동시에 옆으로 파고 들어간 태클.
작은 키를 더욱 낮춘 타이니의 오른쪽 다리가 180도 회전하며 리암의 정강이를 후려 찼다.
뻐어어억.
하지만 리암의 다리는 어느새 회백색으로 변해 있었고, 타이니의 일격으로는 그를 몇 걸음 물러나게 만든 것이 고작이었다.
‘돌…… 속성?’
애초에 리암이 전력을 다하게 만들기 위한 첫 격돌인 만큼 크게 무리하지는 않았지만, 상대의 타격이 생각보다 더 적은 듯했다.
그것이 마음에 안 들어 인상을 쓰는데, 그 표정을 본 리암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크, 크하하하! 이놈 이거, 걸물이구나!”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회백색 마나가 뿜어져 나오면서, 그 주변의 짧은 공간이 살짝 일그러지는 듯한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역시.’
그가 시전한 것은 막 챌린저급에 올라선 이가 마나로 공간을 장악하는 재주가 능숙하지 않을 때 주로 쓰이는 방어 기술이었다.
자신의 철신갑 역시 저 기술을 모태로 만들어진 스킬인지라, 꽤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거기다 연습용 가검에 솟구친 거검 형태의 회백색 소울웨폰까지.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회백색 기운이 전신을 둘러싼 리암의 모습에서, 타이니는 그의 스타일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단단하고 무거운, 공방 일체의 기사!’
“으하하하! 적당히 맞춰 준다는 말은 취소해야겠군.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재미있겠네요!”
타이니는 진한 미소로 응답했고.
“그래, 나도 재미있을 것 같구나!”
말년이 지루하기만 했던 기사의 얼굴에도 이내 타이니와 비슷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