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카룬
“플락센의 선장은 블레이더급의 마병…… 일급항해사 둘은 익스퍼트급이었고, 그 외 하급 마병이 다섯 명 더 있었습니다. 승객으로 위장했던 익스퍼트급 마병을 제외하면 전부 함선 플락센의 운항을 책임진 이들로, 5년 전부터 에낙센과 우리 카룬을 오가던 이들입니다.”
“음…….”
너른 집무실 안을 울리는 담담한 목소리에 카룬의 국왕, 에머드 폰 카룬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내 그가 새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곳 카룬에서라면 모르지만, 대륙 본토에서는 희귀한 검은 머리. 그러면서도 동방인의 혼혈 같지 않은 새하얀 피부의 소년을.
“타이니라고 했던가? 특이한 이름을 가진 어린 영웅이여, 그대는 블레이더급 마병이 탄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어야 하는지 아는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전하.”
“그래, 그럼 짐이 자세히 말해 주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최소 수백일세. 산 사람이면 수백, 시체라면 수천 명을 악마에게 공양했겠지. 그놈 하나만 쳐도 말일세.”
부르르 떨리는 주름진 손을 힘껏 움켜쥐는 노왕을 보며, 타이니 역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굳이 나설 상황이 아니기에 적당히 겸양했을 뿐.
‘인류의 해충들…….’
왕이 말한 예외적인 경우라 함은 보다 높은 경지의 마나유저나 마법사, 즉 슈페리어급의 마나유저나 5서클 마법사를 셋 이상 악마에게 산 채로 공양하거나 그 아래 급 열 명 이상을 공양하는 것을 말한다.
악마추종자들이 섬기는 악마란 곧 마계와 중간계에 자리한 차원의 벽을 뚫고 힘을 뿌릴 수 있는 고위 마족들을 의미하니, 보통 군단장이나 칠죄종(七罪宗)들과 함께 마왕급으로 분류되는 최강의 마족이나 차원의 벽 너머로 힘을 전하는 게 가능하다.
게다가 차원을 뚫고 힘을 전하는 ‘비용’을 감안하더라도 악마추종자가 바치는 제물 대비 그들에게 돌아오는 힘은 10퍼센트 정도일 뿐이니, 인류의 현자들은 악마추종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군단장들이나 마왕이 강해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혹은 군단장급에 준하는 마족이 새로운 군단장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고 했지.’
어느 쪽이든 최악이었다.
“……악마추종자들은 보이는 족족 쳐 죽여야 하는 놈들입니다.”
타이니의 살벌한 목소리에 국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미친놈들이야. 그러나 최근 30여 년간은 거의 잡히지 않았으니, 드디어 뿌리를 뽑은 것이 아닌가 하는 희망찬 기대마저 나오고 있었지.”
회한 섞인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은 왕은 이내 무거운 눈으로 다시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제국에서 귀족 하나가 흑마법사로 밝혀지고, 플락센에서 자네에게 떼죽음을 당한 놈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것이 바로 연고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그가 일국의 국왕과 이리 마주하게 된 이유였다.
- 세상이 속고 있었는데, 너는 어찌 알았느냐.
늙은 왕의 눈은 그리 묻고 있었다.
그에 타이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데, 주변의 모든 이들이 모르는 것이 더 신기했습니다.”
“그냥 알았다?”
“……제 정령이 특별하기 때문이지요.”
“호오?”
그가 정령술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국왕의 눈에 새삼 이채가 번뜩였다.
“정령은 각자 고유의 능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 정령이 가진 능력이 바로 놈들을 판별하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영혼의 냄새를 맡는 능력이었지만, 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 말만으로도 주변의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까.
“……과연 그러한가. 그럼, 내가 그 정령을 실제로 볼 수 있겠는가?”
“폐하!?”
그 말에 한옆에 서 있던 신하, 시종장 로이만이 한 발 앞으로 나와 소리를 질렀고, 국왕의 등 뒤에 있던 두 호위 기사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정령술사에 대해 모르는가, 로이만?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이만이 정령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상식이거늘.”
“……순수하게 악할 수도 있습니다, 전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작은 곤충이나 동물에게 더욱 잔혹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로이만에 말에 타이니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맞는 말이지.’
상식적으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인간은 경험과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어려서 착했던 아이가 악당으로 자라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륙에서 정령술사에 대한 인식은 이상하리만치 좋았다.
‘정령술사는 착한 사람’이라는 이상한 공식이 상식으로 여겨질 정도로.
‘아마도 엘프들 때문이겠지.’
항상 순리를 따르고 평화로운 삶을 고수하려는 대다수의 엘프들 때문에 자리 잡은 상식이자, 십여 년 뒤 라프탄이라는 정령술사 악당 때문에 박살이 나는 상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래서 자네는 그 순수하게 악한 정령술사에 대해 보거나 들은 적이 있나, 로이만?”
일국의 국왕이 저리 말할 정도로 인식이 굳건했다.
로이만이 대답하지 못하자, 국왕이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가 늙은 내 몸을 걱정하는 마음도 알고 있네. 더구나 최근에 게일 그 친구의 일도 있었으니, 행여나 또 심하게 놀라기라도 하면 무리가 올 것을 염려한 게 아니더냐.”
그 말에 움찔하며 고개를 숙이는 로이만을 보니, 그 역시 실은 그 잘못된 상식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엘프가 아닌 정령술사는 처음 보니 말이다. 허나, 나는 이 어린 영웅이 지닌 힘의 실체를 보고 싶구나.”
국왕은 그리 말하며 다시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흠…….”
조금 찜찜했지만, 지금은 이 잘못된 상식을 최대한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라프탄 그놈이 ‘그 사고’를 치기 전에 하루빨리 처리해야겠어.’
새삼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하며, 타이니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바라신다면 기꺼이…….”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월랑의 영체.
“크릉, 킁.”
왜 불렀냐는 듯 시큰둥한 모습의 월랑이었지만, 지켜보는 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오!”
“저것이……정령.”
왕이 놀라 탄성을 터트렸고, 소환을 반대하던 로이만조차 집채만 한 월랑의 영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과연 훌륭하다! 훌륭해! 필히 거대한 숲의 주인이었을 정령! 멋지구나, 멋져……. 정말 대단하구나, 어린 영웅이여!”
왕은 손뼉까지 쳐 가며 크게 웃었다.
늙은 왕의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세 개의 서클은 수명이 다해 가는 듯 미약하기만 해 걱정이 되었었는데, 다행히 나쁜 자극을 받지는 않은 듯했다.
프흣.
왕의 찬사에 세게 콧김을 내뿜은 월랑의 고개가 빳빳이 세워졌다. 심지어는 그 상태로 시선을 흘끗 내려 타이니를 깔아 보기까지 했다.
‘봤냐? 내가 이런 늑대다!’라고 말하는 듯 얄미운 표정이 실로 압권이었다.
‘허…….’
어이가 없어진 타이니는 바로 소환을 해제했다.
슈우욱.
순식간에 사라지는 영체.
- 컹! 컹!!
영혼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월랑의 항의를 깔끔하게 무시한 타이니가 다시 국왕을 바라보았다.
“이제 증명이 되었을까요?”
“푸하하, 그래. 시험을 해서 미안하네. 그래도 정령을 눈으로 보니 확실히 믿을 수 있겠군.”
그 말에 타이니는, 라프탄 놈을 되도록 빨리 처리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왕은 홀가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의심을 풀었으니 이제 사건을 정리해야지. 미안하지만 자네도 함께 들어 줬으면 하네.”
“이 자리에 전하를 뵙고 있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영광입니다.”
왕은 타이니의 말이 흡족한 듯 웃었지만, 이내 무거운 시선으로 상황을 보고하던 신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파악된 희생자 수는?”
악마추종자들은 힘을 얻을 때뿐만이 아니라, 그 힘의 유지를 위해서도 정기적으로 제물을 바쳐야 했다. 그것이 처음 계약할 때만큼의 막대한 수는 아니라지만, 필연적으로 희생자가 계속 나오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왕의 그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놈들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 그놈들과 관련된 사람 중 지금 소재 파악이 안 되는 이들만 5년간 100여 명이 넘습니다. 이쪽에서는 에낙센이나 대륙 내부로 갔다고 했다는데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고, 에낙센에서도 저희 카룬으로 갔다는 이들이 그보다 많다고 합니다. 물론 정말로 입국한 자는 극소수입니다.”
“……전부 제물이 됐겠군. 왕으로서 면목이 없다, 면목이…….”
왕이 탄식을 토해 내며 얼굴을 쓸어내리자, 신하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 전하의 실수가 아닙니다! 양쪽을 다 따져 봐도 일주일에 한 명 꼴인 데다가, 개중에는 이방인도 많아서 소재를 파악하기가…….”
“변명은 필요 없다, 로이만. 그 모두가 과인의 허물이니.”
그러자 로이만이라 불린 신하가 움찔 몸을 떨며 바로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소신을 비롯한 신하들의 잘못입니다. 저희에게 죄를 물어 주십시오, 전하!”
‘……과연.’
왕의 말이나 신하의 반응을 볼 때, 이 노왕이 카룬의 현왕이라 불리는 데에는 확실히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만큼.
“타이니 모르스, 어리지만 이미 기사의 자격을 갖춘 이여. 그대가 과인의 허물을 그나마 덜어 주었다. 이 감사를 어찌 표현하면 좋겠느냐?”
타이니에게 내려질 보상 역시 후할 터였다.
‘모르스’라는 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왕 내친걸음이다. 왕실에 들어서기에 이만한 기회도 또 없을 터였다.
“……가문의 한이 서린 제국을 떠나 먼 곳에 정착하고자 온 걸음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카룬의 봉신이 되어 이곳에 뿌리를 내릴까 합니다.”
선해 보이는 사람을 속이려고 하니 다시금 양심이 따끔거렸다.
‘이 거짓은 카룬의 재앙을 걷어 내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타이니는 그렇게 다짐하며 왕 앞에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다행히 그 말에 노왕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역시 그러한가. 과인이 인복이 있으니, 그대 같은 인재가 제 발로 품에 들어오는구나. 어찌 승낙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로이만, 준비한 것을 가져오라.”
왕의 명령에 로이만이 고개를 숙이며 돌아서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잠시 후,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검과 은빛의 신분패가 놓인 비단보를 든 시종이 천천히 걸어 들어와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은 곧바로 검에 손을 뻗다가 어느새 무릎을 꿇고 앉은 타이니를 보며 멈칫하더니, 이내 옆에 있던 신분패를 집어 들었다.
“과인은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으니, 때아닌 검의 의식은 생략하겠다.”
“전하?”
로이만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왕은 손짓으로 충실한 신하를 말렸다.
그리고.
“그대는 이미 기사의 자격을 충분히 증명했으니, 카룬 왕실의 이름으로 그대 타이니 폰 모르스를 기사로 임명한다.”
정말로 단순한 선언과 함께 은빛의 신분패를 내밀었다.
‘응? 이렇게 쉽게……?’
양어깨와 머리를 검으로 훑으면서 카룬의 왕실에 충성하고, 기사도에 따르고…… 뭐 그런 종류의 양심에 걸리는 맹세를 해야 할 것을 상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타이니로선 반색할 만한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현생에 처음 받은 기사의 작위.
재앙에 대비하기 위한 거짓 신분이 들어가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묘한 감정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누나, 이제 다시 시작이야. 이번에는 반드시…….’
타이니가 손안에 들어온 신분패의 촉감을 음미하며 다시금 결심을 다지고 있자니, 그 모습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던 왕이 주변을 향해 손짓했다.
“그대들은 나가 보라. 짐은 이 어린 영웅과 잠시간 이야기를 나눠 볼 터이니.”
타이니로서도 의외의 말.
자연히 그 말에 대한 반응은 격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
“어찌 외부인과 독대를……!”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노왕의 태도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대들은 감히 지금 짐이 직접 작위를 내린 기사를 외부인이라 칭하는가!”
그 매서운 일갈에 로이만과 호위기사는 대번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이 불안한 얼굴로 물러나 문이 닫히자, 왕이 어리둥절한 표정의 타이니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쿼터 엘프라는 말은 거짓이겠지? ‘어린’ 영웅이여, 악심을 가진 것 같지는 않으니 자네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을 듣고 싶구나.”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