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플락센
- 크르르.
타이니의 감각, 정확히는 월랑의 감각이 마기를 감지한 것이다.
‘여기서? 대체 어디에……!?’
모르스 가문에 대한 고민을 멈추고 선상의 이곳저곳을 슬쩍 둘러보자, 영혼의 냄새를 맡는 월랑의 능력이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악마의 기운을 다시금 찾아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예상 밖이었다.
‘하나, 둘, 셋…… 뭐, 뭐야!?’
얼추 보이는 것만 다섯. 그중에는 선원도 있었고, 승객으로 보이는 이도 있었다.
예전의 그 흑마법사처럼, 모두가 겉으로는 마기 한 점 풍기지 않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에 타이니는 순간적으로 격한 갈등에 휩싸였다.
‘당장 다 때려죽여? 아니면 돌아 나가서 딴 배를 타?’
심중의 살기를 감춘 채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타이니는 이내 다른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만약 저놈들이 자신을 쫓아온 게 아니라면.
‘……카룬에서 일을 벌이려는 놈들 중 일부일 수도 있어.’
이제는 카룬의 재앙은 악마추종자가 일으켰을 것이라는 추측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저들을 몰래 쫓는 것만으로도 놈들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참자……. 운 좋은 줄 알아라, 이 쓰레기들아.’
어차피 하루 뒤면 카룬의 수도 오르투스에 도착한다.
타이니는 반사적으로 솟구친 혐오감과 불쾌감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렇게 간신히 발휘한 인내심은, 배가 출발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쓸모가 없어졌다.
“다 꺼져! 인생 망한 놈 처음 봐!?”
뱃머리 갑판 쪽에서 행패를 부리는 남자.
“어으, 취한다. 비켜, 넌 뭐야? 꺼져!”
대낮부터 술을 마신 듯, 석양이 저물어 가는 시간에 이미 만취 상태가 된 듯했다.
“……어우.”
“뭐야…….”
놈이 다가올수록 술 냄새가 진동을 하니, 자연스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사내를 피해 멀어졌다.
하지만 타이니는 놈을 보며 슬쩍 안색을 굳혔다.
‘익스퍼트급의 마병…….’
월랑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마기를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전의 습격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접근. 상황을 지켜보던 타이니는 속으로 혀를 찼다.
설마 목표가 또 자신이었던가.
‘……뒤끝이 긴 놈들이군.’
물론 자신은 지금 그 뒤끝이 훨씬 길어질 만한 일을 하러 가는 중이었지만, 짜증이 솟구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형지물에 상관없이 일직선으로 에낙센까지 왔으니, 자신의 목적지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마기를 은폐하는 데에 자신이 있어도 그렇지, 저렇게 노골적으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유지한 채, 타이니의 감각이 주변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주정뱅이가 비틀거리며 그에게 몸을 부딪쳐 왔다.
“끅. 비, 비켜라, 꼬마.”
술 냄새에 질린 척 눈살을 찌푸리며 슬쩍 비켜서는 순간.
팔을 휘젓는 주정뱅이의 소매 안에서 흐릿한 검은 빛으로 둘러싸인 비수가 튀어나오며, 돌아서는 타이니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러나 이내.
우드드득.
“끄아악!”
비수를 휘두르던 팔이 작은 손에 의해 으스러진 주정뱅이가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자연히 모여드는 시선들.
“끄아아악!”
“뭐야!?”
“무슨……!?”
일순간에 흩어지는 주위의 인파. 하지만 그중에서도 오히려 두 사람에게 접근해 오는 이들이 있었다.
“거기, 꼬마! 꼼짝 마라!”
“감히 배 위에서 피를 보다니!”
“잡아!”
바로 이 배의 선원들이었다.
놀란 얼굴의 그들이 타이니와 주정뱅이에게 빠르게 다가오던 그때.
타이니는 떨어진 비수를 걷어차서 그대로 주정뱅이의 심장에 틀어박히게 했다.
푸우욱.
“끄륵.”
주정뱅이가 피를 토해 내며 그 자리에 쓰러진 순간, 놈의 몸뚱이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며 매캐한 연기와 함께 악취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우웩!”
“뭐, 뭐야!?”
“이게 무슨 냄새야!?”
갑판 위가 더욱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 그 기현상의 원인을 아는 이 몇몇이 기함하며 소리를 질렀다.
“악마추종자!”
“흑마법사다!”
“이런……!”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가오던 선원들이 주춤거리다가 이내 멈춰 섰다.
“무, 무슨 꼬마가…….”
그들의 시선은 죽은 주정뱅이의 시신과 타이니를 빠르게 왕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린 한 선원이 헛기침을 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정황상 악마추종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만, 더 정확한 상황 파악을 위해 우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꼬…… 흠, 흠, 손님…….”
“……그래?”
“예, 절차에 따라…….”
“절차?”
선원의 말에 타이니는 피식 웃으며 태연하게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은 왜?”
선원이 어리둥절해하는데, 타이니는 그대로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우드드득.
“끄아악!”
손목이 으스러지는 통증에 선원이 비명을 지르고.
“잭!!”
“그냥 잡아들여!”
놀란 동료들이 일제히 튀어나오는 순간.
“흥.”
타이니는 코웃음을 치며 손에 잡힌 선원을 그대로 휘둘렀다.
쾅.
꽈아앙!
콰아아앙!
불과 몇 번의 소음이 울려 퍼진 끝에, 그의 주변은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꺄아아악!”
“우악!”
“미친……!”
순식간에 벌어진 학살극을 목격한 이들이 공포에 질린 비명을 내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살인이다!”
“살인마가 나타났다!”
“도망쳐!”
한순간에 난장판이 된 선상.
그런데 그 순간.
“내, 냄새!”
“악취다!”
“저건……!”
조금 멀리 떨어져 상황을 살피던 손님들이 오히려 진상을 빠르게 파악해 냈다.
타이니에 의해 박살이 난 선원들의 시체도 그전의 주정뱅이처럼 순식간에 썩어 들어가며 지독한 악취를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선원들이……?”
“전부 악마추종자였어!”
“이, 이게 대체……!”
한순간에 달라지는 분위기.
소란스러움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무작정 타이니를 피해 도망가는 이는 없었다.
물론 악마추종자에 대해 모르는 이들도 있었지만.
“악마추종자?”
“죽으면 시체가 바로 썩는대.”
“그럼 저게 다……?”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정보가 퍼지며, 빠르게 사건의 본질이 파악되고 있었다.
병이나 범죄에 당해 죽는 사람에 비해, 몬스터에 의해 죽는 이의 수가 절대 적지 않은 시대.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는 시선이 바뀌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럼 저 꼬마, 아니 저 사람이 잘한 거야?”
“그럼.”
“당연하지.”
심지어 호기심 많고 간이 큰 손님들은 타이니의 주변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이게 다가 아닐 텐데?’
그 변화하는 상황을 지켜보며 사방을 살피던 타이니가 오히려 고개를 갸웃할 때.
- 뭐라고!!?
그제야 선상의 난리를 파악한 듯 함교에서부터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우당탕탕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대한 중년인이 굴러떨어지듯이 함교의 계단을 내려왔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 어찌 이런 일이……!”
근엄한 인상에 턱밑까지 풍성하게 기른 구레나룻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
홍안의 사내가 푹 눌러쓴 베레모에는 이 거대 함선, 플락센의 선장임을 뜻하는 황금빛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어, 어째서 내 부하들이 전부 이런……!”
목이 메는 듯,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선장.
뒤늦게 내려온 다른 선원들이 그런 그에게 귓속말을 하며 타이니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타이니를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긴장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그 순간, 한 차례 숨을 크게 들이켠 그가 타이니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폐를 끼쳤습니다, 손님. 상황을 보아하니 악마에 홀린 부하들이 벌인 일인 것 같지만, 후속 조사가 필요하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조금 전까지 잔뜩 흥분하던 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절제된 태도.
“역시…….”
“선장이라면 저래야지.”
지켜보던 승객들이 그의 됨됨이에 감탄할 때.
“물론이죠. 참 훌륭하신 선장님이시군요.”
싱긋 웃으며 대답한 타이니가 선장을 향해 다가가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렇게 연기도 잘하시고.”
그 말에 선장이 움찔하는 순간, 타이니는 등에 메고 있던 스탬프로 그를 찍어 버렸다.
꽈아아아아앙!
그날.
에낙센에서도 손에 꼽히던 거대 함선 ‘플락센’의 선장과 일급항해사들이 한 소년에게 몰살당해 끔찍한 악취를 풍기는 시체가 되었다.
그 덕분에 함선 플락센은 예비 선원들의 필사적인 노력 끝에 해가 완전히 진 뒤에나 간신히 오르투스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고, 선상에서 벌어진 일이 승객들의 입을 타고 오르투스 전역으로 퍼지기까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시, 실패했습니다.”
암실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상석의 그림자가 움직이자, 일순간 방 안에 자욱하게 살기가 퍼졌다.
“……자세히 고하라.”
“사, 상처조차 남기지 못했답니다. 마치 ‘장막’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흑기사들을 제압했다고 합니다.”
톡. 톡.
그 말에 상석의 그림자는 대답 없이 탁자만 두드렸다.
그러자 보고하는 그림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자, 장막을 두르고 하는 암습은 두 수 이상의 적들을 상대로도 효과가 있음이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1차, 2차, 3차로 나누어 정교하게 짠 계획이었고, 플락센의 선장은 무려 블레이더급의 흑기사……!”
“그만.”
“……였습니다. 놈이 장막을 꿰뚫어 보는 게 아니고서야 결코 실패할 리가 없는 작전이었습니다!”
상석의 그림자가 제지했음도 보고하는 이는 끝내 할 말을 다 마쳤다.
“흐…….”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실린 목소리와 함께 암실의 살기가 더욱 진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저, 저는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카룬의 일로 부족한 자원을 최대한 쥐어짜서……!”
“쯧.”
펑.
어떻게든 살고자 발버둥 치던 이의 최후는 머리가 터져 나가는 작은 소음뿐이었다.
“장막을 꿰뚫어 보는 꼬마라……. 내 최대 위업을 무용하게 만드는 적이 나타났구나. 더구나 그 나이에 트윈 헤드 트롤을 잡는 무력이라니? 대체 이게 말이 되나?”
“최근, 녀석이 엘프 혼혈이라는 정보도 입수되었습니다. 스무 살이라더군요. 이쯤 되면 녀석이 필레스에 의도적으로 잠입했다고 봐야 합니다. 아마 바꿔치기를 한 거겠지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상석의 목소리에, 바로 응답하는 또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부터 우리를 노리고 한 짓이었다? 그래, 그래야 오히려 말이 되지…….”
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상석의 그림자는 이내 결정한 듯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명령을 내렸다.
“후셀 장로에게 전하라. 1차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먼저 녀석을 정리하라고. 사로잡으면 좋지만, 죽여도 상관없다. 찜찜함을 남기는 것보다는 나으니.”
“……예.”
짧은 대답과 함께 암실은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 * *
우걱우걱.
“아니, 카룬은…….”
꿀꺽.
“일 처리가…… 빠르다더니.”
쩝쩝쩝.
“지금 이틀째…….”
촵촵촵.
“뭐 하는…… 짓이야, 이게.”
츄릅.
“그 와중에, 음식은…… 참 맛있네.”
히죽 웃은 타이니가 손에 든 접시를 다시 탁자 위에 쌓았다.
고급스러운 비단 이불이 깔린 푹신한 침대 앞에는 방 안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접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마치 수십 명이 한 방에서 잔치라도 벌인 듯한 모양새였지만, 이 모든 것은 오직 이 검은 머리 소년 한 명이 만들어 낸 광경이었다.
더구나.
“……그럼 점심은 이쯤에서 끝낼까? 끄윽, 배부르네.”
그 어마어마한 접시의 탑은 고작 한 끼를 먹은 결과였다.
그때, 혼잣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다.
- 타이니 님, 계십니까!?
그에 타이니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드디어!?
“들어오세요!”
끼이이.
문이 열리자 번듯한 갑옷을 입은 중년 기사가 들어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확인이 끝났습니다. 모두 악마추종자가 확실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에낙센 도시 정부와 카룬 왕국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타이니 님.”
“별말씀을……. 그럼 전 가도 되나요?”
“물론이지요, 어디든 가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더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네?”
“카룬에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숨어 있던 악마추종자들을 토벌한 영웅에 대한 소문이 말입니다.”
“오!?”
“게다가 타이니 님께서 카룬에 종사할 뜻이 있으시다는 것까지 전달했으니, 내일 중으로 왕실에서 마중 나오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중년인의 말에 타이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었다.
‘그냥 악마추종자 놈들 때려죽인 것뿐인데.’
함선에서 벌어진 전투에 뜻밖의 이득이 뒤따라 주었다. 덕분에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을 듯했다.
‘이제 여름이 끝나 가니, 얼추 네 달 정도 남았다. 이 정도면 충분해.’
웃음이 절로 나올 만한 일이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틸란 경. 그럼 저는 여기서 하루 더 묵어도 될까요?”
그 말에 오르투스의 외성 경비대장, 기사 틸란의 굳세 보이던 표정이 순간 쩌저적 금이 가듯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왜 그러시죠?”
“하, 하하……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뭐…… 지금 나가나, 내일 나가나…….”
타이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답하자 틸란의 안색이 다시금 창백해졌다.
뭔가 망설여지는 것처럼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가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저기. 타이니 님……?”
“예, 말씀하세요.”
“아시다시피 이 살롱(Salon)이 오르투스에서도 최고급 숙소라서…….”
“……그런데요?”
타이니가 영 알아듣지 못하자, 틸란은 붉어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더니 대뜸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제, 제발 오늘 저녁은 조금만 드셔 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 예산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라서요, 죄송합니다!!”
조직 생활과 예산의 압박에 얽매인 중년 사내의 서글픈 고백.
타이니는 잔뜩 쌓인 접시와 고개 숙인 경비대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