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50화 (50/500)

50화. 에낙센

도시 국가 연합.

중앙 대륙, 그리고 동대륙인들에게는 서대륙이라 불리는 이 땅의 동남부 끝에 존재하는, 기묘한 형태의 인류 연합체를 이르는 명칭이다.

그 시작은 카룬 군도를 통해 들어오는 동대륙의 산물들을 놓고 경쟁하듯 모여든 상인들의 모임이었다.

하지만 사백 년 전, 해상 왕국 카룬의 모험왕 발칸이 대규모 선단이 안전하게 오갈 수 있는 항로를 개발하면서 교역의 규모가 점차 커짐에 따라 상황이 달라졌다.

그 교역에서 생기는 수익의 한 달 치 세금만 해도 웬만한 왕국의 일 년 치 예산을 훌쩍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대륙의 수많은 나라와 종족이 이권 다툼에 끼어들어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결국 카룬 군도 바로 위에 자리한 왕국 연합과 대륙 중앙을 장악한 아스란 제국의 협상에 의해 중립 지역으로 선포되었고, 그 이후로 교역은 오히려 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지배자가 없어진 상인들의 땅은 각 종족과 세력에 따라 일곱 개의 도시로 나뉘었고, 그 가운데엔 양 대륙의 교역품들을 사고파는 대륙 최대의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중 에낙센은, 동대륙의 문물을 직접 수입하며 가장 큰 혜택을 본 해상 왕국 카룬으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항구 도시였다.

가까이 있는 만큼 카룬 왕국의 입김이 강했으며, 종족으로 나뉜 일곱 도시 중 인간족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항구 도시의 특성상 대륙의 온갖 종족이 모두 모여들었기에, 신분 검열이 굉장히 느슨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에낙센이라 해도…….

“거, 거기 정지!!”

한 손에는 자기 몸만 한 트롤 머리 두 개를, 다른 한 손에는 3m는 될 것 같은 도끼를 든 채 거대한 늑대 위에 올라타 태연하게 성으로 들어오려는 꼬마를 본다면 일단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다급히 불러 세우긴 했지만, 경비대원들 사이에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 듯 아무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으악! 왜? 왜 내가?”

결국 에낙센의 경비대원 얀이 동료들에게 떠밀려 강제로 튀어나왔다.

그는 거대한 늑대 위에서 멀뚱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꼬마를 보며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흠, 흠, 저…… 그, 그게……. 그렇게 흉악한 물……건을 들고 들어오시면…… 아, 안 되는데요.”

“이거 현상금 없어요?”

“……예?”

“트윈 헤드 트롤이 무기까지 들고 있길래, 당연히 현상금 있을 줄 알고 가져왔는데?”

“트, 트윈…… 뭐요?”

얀이 당황해서 기억을 더듬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상단 도살자!”

얀이 뒤를 돌아보니, 성문으로 들어갈 생각은 않고 이 엽기적인 꼬마를 바라보고 있던 관중들 사이에서 다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왕국 연합 남부에서 유명한 마수요! 밤중에 중소 상단만 습격해서 몰살시켜 버린다는……!”

“대륙 상인 길드에서 현상금을 꽤 많이 걸었다고 알고 있는데, 왜 저기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군중의 설명에 꼬마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얀을 바라보았다.

“상인 길드 지부, 여기도 있을 텐데요. 그쵸?”

“……그, 그렇죠.”

“그럼 지나가도 될까요?”

“무, 물론입니다! 실례했습니다!”

얀은 자신도 모르게 상관에게나 하는 경례를 하며 소년의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의 생각은 대동소이했다.

- 쟤, 분명 보통 꼬마는 아니다.

“……평범한 인간은 아니겠지?”

“드워프 피가 섞였나?”

“그렇다고 하기엔 제법 귀엽게 생겼는데?”

“그럼 엘프 쪽인가……?”

수군거리며 추론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타이니는 성문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동네는 이때도 여전하군.’

이곳에서 주목받는 건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아니라 작은 체구뿐이다.

전생에서도 자신의 덩치에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의 태도가 참 신기했는데, 심지어 옆 동네인 무법 도시 타란에 가면 더했다.

‘검제의 말대로 카룬에 동대륙 혼혈이 많다면, 그쪽 분위기는 아마도 더 편하지 않을까.’

새로운 도시에 들어설 때마다 외모 때문에 귀찮은 일을 겪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일이 덜할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다만…….

“꺄악! 저, 저거 뭐야!?”

“트롤 머리 같은데…….”

“무기도 엄청난 걸 들고…… 저 괴물 무기인가?”

“아니 무슨 말만 한 늑대를 타고 다녀?”

다른 쪽으로 주목을 받는 거야 어쩔 수 없었다.

- 너 진짜 네가 머리 색 때문에 차별받고 주목받는다고 생각하는 거냐? 허, 대체 양심은 어디…….

옛 동료의 음성을 떠올리며 피식 웃은 타이니는 그대로 월랑을 타고 상인 길드를 찾아갔다.

* * *

쿵.

탁자 위에 놓인 돈주머니가 듣기 좋게 묵직한 소리를 냈다.

슬쩍 열린 틈으로 보이는 금빛 역시 타이니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중년의 대머리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비볐다.

“300골드…… 최근 일 년 내 최고의 현상금입니다, 손님! 놈의 무기까지 챙겨 오신 건 정말 잘하신 겁니다. 안 그랬으면 그냥 트롤 두 마리 값밖에 안 쳐 드렸을지도 몰라요.”

“이제 가 봐도 되죠?”

“예, 물론입니다. 언제든 다시 찾아 주십시오. 4.5급 마수를 잡은 쿼터 엘프 정령술사라면, 저희 길드의 단독 의뢰도 충분히 수행하실 수 있을 겁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용병 길드에서도 바로 B급으로 올려 드렸습니다. 사실 A급 이상도 충분하실 무력인데, 아시다시피 실적이 조금부족해서……. 하하하.”

벌써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이 대머리 지부장의 너스레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상인 길드와 용병 길드는 거의 공생하는 관계인지라, 항상 인재에 목이 말라 있다는 점은 똑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는, 그런 것보다는 지부장이 뱉은 한 단어가 더 신경 쓰였다.

‘내가 쿼터 엘프라니…….’

발렌티아에서 만들어 준 신분증에는 나이가 일곱 살이 추가되고 엉뚱한 혈통까지 쓰여 있었지만, 바뀐 것은 그것뿐이었다.

이름은 본명을 그대로 썼는데, 그것은 카룬의 일이 잘 풀릴 경우 그 왕실과 연을 만들어 두기 위함이었다. 굳이 변장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혹시라도 일이 잘못될 경우엔…….

- 그딴 재수 없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잘못된다면 그만큼 인류가 위험해지는 거야!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아니, 성공한다. 실패는 없어!

‘……그래, 실패는 없다. 절대로!’

타이니는 검제의 말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고는 다시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안겨 준 전투에서 알아낸 사실을 동맹에게 전해야 했으니까.

끼이이.

낡은 문이 옅은 소음과 함께 열리는 순간, 왁자지껄한 펍 안의 소리가 잦아들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열 살이나 좀 넘었을까 싶은 꼬마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카룬에서나 가끔 볼 수 있을까 싶은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소년.

짧았던 침묵은 이내 야유로 변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뭐야, 저 재수 없는 눈깔은?”

“꼬마야, 꺼져! 여기는 애들 오는 곳이 아냐!”

“마스터, 우유 한 잔! 푸하하하!”

“웬 애새끼가……!”

소년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고 곧장 카운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그때.

“어이, 꼬마야. 어른들 말 못 들었냐?”

비대한 몸집의 털보 하나가 히죽 웃으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낮부터 얼굴이 벌게져서는 악취까지 풍기는 것을 보니 심각한 알코올 중독이 아닐까 싶었다.

타이니는 굳이 대꾸해 줄 가치를 느끼지 못해 사내를 그대로 지나쳤다.

“아니, 애새끼가! 어른이 물었으면 답을……!”

딱.

“크르르르르르.”

소리를 지르며 겁박을 하려던 목소리는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집채만 한 늑대의 영체 앞에서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으헉!”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은 놈의 가랑이 사이로 샛노란 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지만, 타이니는 그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리고는 가던 길을 그대로 걸었다.

좀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고요해진 펍.

다시금 모여드는 시선 속에서 타이니는 바에 서 있는 마스터를 향해 은화 한 개를 던졌다.

팅.

“버번 진하게, 위스키도 타서.”

말이 되지 않는 주문에 펍 마스터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손님, 술 종류를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버번이 위…….”

“난 원래 그렇게 먹어.”

어처구니없는 말에 주변 주당들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지만, 주변을 매섭게 살피는 타이니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음, 그렇다 해도, 저희는 아이에게 술을 팔지 않습니다.”

마스터의 그 말에, 주변의 모든 손님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크큭, 이게 무슨…….”

다만 이번의 웃음은 타이니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어이, 꼰대 아저씨! 여긴 자유 도시라고!”

“이봐, 마스터! 언제부터 여기가 제국 법을 따랐어!?”

“난 열두 살 때부터 술을 마셨는걸?”

“난 열 살!”

휘이익.

휘파람까지 섞인 야유가 마스터를 향해 쏟아졌다.

그 소음 속에서, 타이니는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엘프 혼혈. 스무 살이야. 그러니 우유 따위는 섞지 말라고.”

그 농담이라기에도 애매한 추가 사항은 약속된 ‘암구호’였는데, 말을 하고 나니…… 굉장히 쪽팔렸다.

‘어떤 놈이 이따위 암호를 만들었는지…… 대가리를 깨 버리고 싶네.’

그의 머릿속엔 이미 금발의 푸른 눈, 능글맞게 웃고 있는 중년의 초인의 얼굴이 떠올라서 이가 바득바득 갈리고 있었다.

그런 타이니에게 마스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혼혈이요?”

그에 타이니는 품 안에서 신분패를 꺼내 마스터에게만 문양이 보이도록 슬쩍 내밀고는 도로 집어넣었다. 좀 전에 상인 길드에서 썼던 가짜 신분증이 아니라 검은 독수리의 신분패였다.

문양을 확인한 마스터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아, 그럼 아까 그건 역시 정령이겠군요! 엘프 혼혈이시라니, 그럼 그럴 수 있지요. 아, 그럼 엘프분들이 좋아하시는 걸로 추천해 드릴까요?”

그 대화에 다시 주변의 시선이 몰렸다.

“엘프들이 술도 좋아해?”

“아, 그런 게 있다고 나도 듣긴 들었어.”

“나도. 뭐라더라, 원숭이가 담근 술이라던가?”

“그런 게 있어?”

그 시선 속에서 타이니는 속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암구호가 너무 눈에 띄잖아, 영감탱이!!’

하지만 그의 우려와는 달리 주변의 반응은 뜨거웠다.

“마스터, 그런 게 있으면 우리한테도 말해 줬어야지!”

“맞아, 맞아. 엘프 술이라니!”

“우리도 달라! 우우우우!”

주당들은 한목소리로 마스터를 재촉해 댔지만.

“한 병에 1골드입니다.”

……그 말을 듣고는 다 같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 남자의 술은 위스키지.”

“무슨 소리야 맥주지, 시원하게!”

“난 진이나 럼이 좋아. 찌르르 골통이 울리지 않으면 술 같지가 않아서…….”

“하긴 뭐, 엘프들이 마시는 술이야 밍밍하겠지.”

우리가 돈이 없어서 못 마시는 게 아니다. 그저 취향에 맞는 걸 마시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 가며 다시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마스터가 다시 타이니를 보며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손님?”

“너무 비싼데? 더구나 진짜인지도 모르겠고.”

타이니가 고개를 젓자, 마스터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면서 다가와 슬쩍 귓속말을 했다.

“시음 정도는 1실버만 받고 하실 수 있습니다. 딱 한 잔, 어떠십니까?”

“흐음……. 그 정도라면야.”

귀가 밝은 마나유저라면 들을 수도 있는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

이 대화까지가 암구호의 끝이었다.

“맛이나 봐 볼까.”

“좋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마스터는 슬쩍 웃으며 바의 안쪽으로 향했고, 타이니는 그 뒤를 여유롭게 따랐다.

하지만 바 내부에 마련된 안가에서 나눈 대화는 서로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후셀이요? 글쎄요, 인간족 이름 같지는 않은데요? 아무래도 오크나 수인족 쪽 같은데…….”

“머리가 터지면서 뱉어 낸 정보다. 적어도 놈은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일단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보다는 당장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큰 문제라니?”

“추천장을 받아 줘야 할 해일의 마도사 게일 엔더슨이 실종 상태입니다.”

그 말에 타이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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