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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46화 (46/500)

46화. 성년식

그그그긍.

문이 열리자 새하얀 빛 속에서 발렌티아 일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이 행렬의 선두에 서는 평상시와는 달리, 가장 앞에 서 있는 이는 단정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클로이였다.

아스란 제국 성년식의 관례에 따라 장식이 과하지 않은 흰색 드레스를 입었을 뿐이지만, 수수한 차림으로도 빛나는 그녀의 모습에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오!!?”

“과연!”

“발렌티아의 천사라더니…….”

클로이의 별명은 외모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대전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그 감탄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더없이 화려하게 꾸며진 대전이 자아내는 환상적인 분위기와 순백의 단아한 드레스, 그리고 클로이의 빛나는 외모가 너무나도 잘 어울렸으니까.

타이니 역시 한순간 그녀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여자를 습관적으로 멀리해 온 그조차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말 아름다워.’

긴장한 듯 상기된 얼굴에 떠오른 어색한 미소를 보니, 그녀가 아직은 어리다는 사실이 새삼 와닿아서 자연스레 미소가 나왔다.

‘이 시절에는 이렇게 축복받은 환경에서 지냈구나…….’

그렇게 생각이 이어지다 보니 이십 년 뒤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고, 괜스레 기분이 씁쓸해졌다.

그때도 그녀는 빛나는 웃음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저렇게 천진난만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랬어…….’

그 차이를 인식하는 순간, 타이니는 아련한 감상에 젖어 들었다.

클로이의 호의로 인해 인생이 크게 달라졌다. 비록 슬픈 일을 겪기도 했지만, 그건 그녀의 탓이 아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말세가 오기 전에 스러질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녀는 그에게 있어 인생의 은인이었고, 그 누구보다 먼저 인정받고 싶었던 삶의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은.

- 그럼 누나라고 불러.

피식.

‘누나……라니.’

개인적인 인연까지 더해졌다.

짧지만 그렇기에 더 특별한 인연이.

물론 아직은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했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한 단 한 명의 누나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었고, 클로이는 가족이라기보다는 은인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드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또 그렇기에 진심으로 바랐다.

‘부디 이번 생에는 행복하기를…….’

그렇게 속으로 기원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옆구리를 푹 찔렀다.

“뭐 해? 안 할 거야?”

흠칫 놀라 돌아보니, 붉은 머리 여기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타이니는 영문을 몰라 일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뭘?”

“뭐긴, 월 말이야. 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재촉하는 비비안.

‘……아!’

클로이의 굳은 얼굴과 비비안의 손짓을 번갈아 보던 타이니는, 그제야 잊고 있던 약속을 떠올렸다.

뒤늦게 제나스를 바라보자, 그가 뒷짐을 진 채 손가락을 하나씩 접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신호……!

다행히 아직 늦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 뭔가 하려는 건가?”

황실 변태의 목소리가 잠깐 끼어들었지만, 가볍게 무시해 주었다.

그리고 제나스의 손가락이 모두 접혔을 때.

긴장을 애써 숨긴 채 걷고 있던 클로이의 발 앞에 작은 월랑이 튀어나왔다.

“어?”

“뭐, 뭐야!?”

“어디서 나타난 거야, 저 강아지!?”

은빛 털을 가진 귀여운 강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진 순간, 클로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월!!”

“컹!”

해맑게 짖는 월랑의 모습이 긴장감을 덜어 준 듯했다. 단번에 그녀의 가슴께로 뛰어오른 월랑을 클로이는 기쁜 얼굴로 안아 들었다.

할짝.

“아하하, 간지러…… 음, 음, 월! 지금은 이러면 안 돼. 얌전히, 알았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클로이의 뒤를 따르던 공작과 아들들이 잠시 멈칫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진 않았다.

월랑의 등장 덕분에 클로이의 긴장이 한순간 풀어지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그리고 이내, 클로이가 녹음이 우거진 동산처럼 연출된 단상 앞에 다다랐다.

“오늘의 주인공이신 클로이 공녀님을 상석에 모시겠습니다. 공작 각하께서는 오늘만큼은 아래로 내려와 주셔야 합니다.”

“하하, 물론이지.”

발렌티아의 총관 크린 맥도웰의 안내에 따라 클로이가 단상 위 좌석에 오르는 순간.

“어머!?”

월랑이 스르륵 사라지더니, 이내 커다란 영체가 되어 그녀의 발치에 엎드렸다.

“오오!”

“정령이다!”

“정말!?”

반투명한 늑대 정령은 엎드린 상태에서도 클로이의 앉은키만 했고,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공녀가 신기하다는 듯 허공을 쿡쿡 찌르는 장면은 마치 한 편의 그림 같았다.

화려하게 꾸며진 대전이 그 배경이 되자, 흡사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가 거대한 신수(神獸)를 쓰다듬는 듯한 환상적인 광경이 연출된 것이다.

“우와아아아!”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오기까지 하자, 제나스와 비비안, 그리고 타이니는 동시에 시선을 교환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성공!

그들이 그렇게 깜짝 이벤트의 성공을 자축하고 있을 때.

“……오오, 정말 아름다워. 대단해! 과연 난 축복받은 남자로군.”

황실 변태가 또다시 거슬리는 말을 내뱉었다.

‘이 새끼가……?’

네가 뭔데 축복을 받아?

타이니가 도끼눈을 뜨며 그를 노려보는데.

“저게 우리 꼬마 기사님이 다루는 정령의 본모습인가? 늠름하구먼. 멋진 연출을 해 줘서 고맙네.”

“……남작님이 고마우실 게 뭐가 있습니까?”

“아…… 하하, 그냥 그런 게 있다네.”

“네?”

“아닐세. 하하하, 그냥 기분이 좋아서.”

기분 나쁘게 웃는 꼴이 너무나도 수상했다.

‘혹시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으면…….’

곧장 귀싸대기를 후려 버려야지.

뒷수습이야 공작이 해 주지 않겠어?

타이니가 속으로 그런 위험한 생각을 하며 황실 변태를 더욱 경계하기 시작했을 때.

클로이의 성년식은 예정된 절차에 맞춰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 줘서 정말 고맙다, 클로이. 네 엄마도 이 장면을 함께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아버지,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가 장문의 축사를 읽으며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훌쩍이고, 장성한 오빠들마저 붉어진 눈을 숨기려는 듯 하나둘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아, 아버지…….”

이내 클로이 역시 울먹이기 시작하자, 비비안과 제나스를 비롯한 측근들의 눈도 조금씩 붉어졌다.

다만.

“……왜 저러는 거죠?”

“공작가 사연 몰라요?”

“예?”

“그게…….”

발렌티아 사람들에게는 감동적인 순간이지만 다른 귀족들에게는 그냥 남의 일일 뿐인 축사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이후에도 성년식은 계속 진행되었다.

“텐트로 자작님의 선물은…… 오오, 남해의 눈물! 그 귀한 보석이 이렇게 커다란 것도 있었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공작의 목례를 받은 자밀 텐트로 자작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선물 증정식을 빙자한 귀족들의 충성도 테스트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 후, 자질구레한 예식이 모조리 끝나 갈 때쯤에는 어느새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대전에 들기 시작해 사뭇 몽환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물론 참석한 귀족들 대다수는 긴 행사에 지칠 대로 지쳐 버린 터라 그 분위기를 감상할 심적 여유가 없었지만, 이어진 맥도웰의 말에는 모두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성년식의 백미, 클로이 폰 발렌티아 공녀님의 약혼자를 소개할 차례가 다가왔습니다.”

잡다한 수군거림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모두의 눈빛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할 때.

맥도웰의 시선을 받은 공작이 단상 위로 천천히 걸어 올라왔고, 이내 여기저기서 다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분일까요?”

“저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저도요. 아무래도 그분의 짝이 아직 정해지지 않기도 했으니까요.”

지금 이곳에 모인 귀족 중 절반 이상은, 사실 클로이의 약혼자를 확인하기 위해 성년식에 참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잔뜩 긴장한 듯 다시 표정이 굳어진 딸 앞에서,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많아진 관계로 시간이 예상보다 너무 지체됐으니, 인사말은 생략하고 본론만 이야기하겠다.”

자신을 주시하는 귀족들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은 공작은 손을 들어 갑자기 허공을 가리켰다.

“내 딸, 클로이 폰 발렌티아의 약혼자는 저기 저분이시다.”

저분이라니? 무슨 소리지?

장내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하며 웅성거리던 순간.

스스스슥.

우우웅.

어디선가 흘러나온 마나가 허공에 누군가의 영상을 띄웠다.

클로이와 비슷한 백금발에, 그보다 좀 더 진한 황금빛 눈을 빛내는 잘생긴 청년의 얼굴을.

[이렇게 멀리서 인사를 전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나의 피앙세.]

스물 언저리로 보이는 청년의 음성이 대전에 울려 퍼지는 순간.

“우와아!”

대전 이곳저곳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영상을 확인한 클로이 역시 상당히 놀란 듯 눈이 커지는데.

“황태자 전하!!”

“정말, 정말이었군.”

“어찌 이런……!”

귀족들의 놀란 목소리가 대전 구석구석을 울리며 장내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법 영상이 녹화된 것임을 증명하듯, 영상 속 청년은 그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본인, 브레들리 반 아스란이 발렌티아의 천사를 반려로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에 무한한 기쁨을 느낍니다.]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 청년의 모습은 정말로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이 기쁘고 또 기쁜 날, 직접 만날 수 없는 아쉬움을 담아 선물을 전하니. 나의 피앙세, 부디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을 기해서…….]

그렇게 황태자의 말이 계속 이어질 때.

“세상에, 이게 진짜야? 아가씨, 좋으시겠다.”

신음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비비안의 모습에 타이니는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황태자면 무조건 좋은 겁니까?”

황태자가 칭송받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그 질문에 비비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분도 신분이지만, 그분은 현왕 카일 3세의 재림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인품과 재능으로 유명하신 분이라고! 황도의 귀족 처자들이 저분의 약혼녀가 되기 위해 엄청나게 로비를 한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는 눈빛이었지만, 타이니로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심지어 전생에는 그냥 죽어…….’

“흠. 흠. 에헤이, 부정 탈라.”

“……뭐?”

“아니, 아닙니다.”

애꿎은 헛기침으로 비비안의 가늘어진 눈초리를 피해 보는데.

“으흠, 이제 내가 나설 차례군.”

황실 변태가 갑자기 일어서며 주변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어딜 가십니까, 나르사 남작님? 지금 나서실 때가 아닌데요.”

뒤쪽에서 은밀하게 찔러 오는 기사의 살기를 무시하고 변태 녀석의 손을 잡자, 변태는 오히려 피식 웃어 보이며 타이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마 기사님, 공녀를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나한테까지 그러지 않아도 돼.”

그 손길을 피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모든 시선이 모여들며 대전이 조용해지는 바람에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 아무리 황실 감찰관이라도 이 상황에서 큰 사고를 칠 리야 없겠지.’

타이니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던 그때.

한순간에 집중된 시선을 즐기듯 미소를 지은 남작이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꼬마 친구, 나르사(Narsa)라는 성을 거꾸로 읽으면 뭐가 되는지 알아?”

“……예?”

“아스란이야! 조금 있다 보자고, 타이니 군.”

그 말을 듣고 멍해진 타이니의 손을 여유롭게 뿌리친 남작이 대전의 가운데로 망설임 없이 걸어 나갔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순간.

삼십 대로 보이던 나르사 남작의 얼굴이 사라지고, 허공의 영상 속에서 보이던 청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허……!?”

누군가의 감탄사와 함께 일순간 얼어붙는 분위기.

그 속에서 청년이 싱긋 웃으며 단상의 공작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공석에서는 오랜만이군요, 발렌티아 공작님.”

“……환영합니다, 황태자 전하.”

공작의 응대가 이어지자마자.

“우와아아!”

“황태자 전하다!”

“직접 오셨어!”

“어떻게……?”

대전이 단번에 후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한 사람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졌다.

‘나르사가 아스란…… 그랬군. 그럼 나는…….’

방금 전까지 ‘남작’을 패려 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다보니, 불과 일주일 전에 그의 싸대기를 힘껏 후려갈겼던 감촉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X 됐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부들부들 떨던 타이니는, 결국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한 채 슬그머니 그늘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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