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37화 (37/500)

37화. 재대결

“흡!”

꽈아아아아아앙!

쩌저저적.

굉음과 함께 공격을 막아 낸 드렉슬러의 발아래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퍼져 나갔다.

까드득.

악물린 드렉슬러의 잇새로 이 갈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럴 수가!’

한참 하수가 분명한 꼬마의 공격을 받아 낸 순간, 그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특기인 ‘흘려 내기’를 쓰지 않았다면 분명 손목이 나갔을 것이다.

이게 불과 일주일 전에 자신의 워해머에 나가떨어졌던 아이의 공격이라니?

단순히 경지의 상승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성장이었다.

심지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여력을 간신히 흩어 내는 순간 다시 들어오는 두 번째 타격.

첫 충돌의 반동을 이용해 그대로 회전한 검은 머리 소년은, 이번에는 비어 있는 오른쪽 옆구리를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불길하게 넘실거리는 푸른 빛 마나가 시야를 가득 메우고.

‘스치기만 해도 중상이다……!’

위기감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이미 지난 일에 대한 죄책감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어딜……!’

터어어어어엉!

드렉슬러는 마나를 집중한 오른쪽 건틀릿으로 망치 머리의 측면을 강타하며 워해머를 쳐 올렸다.

당연히 튕겨 나가리라 생각했는데.

“윽!?”

생각보다 훨씬 묵직한 망치는 튕겨 나가기는커녕 방향만 꺾일 뿐이었다.

그것도 위쪽으로.

그 결과, 체격의 차이 때문에 망치가 오히려 자신의 머리를 노리게 될 꼴이 되었는데.

그것을 본 드렉슬러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황급히 머리를 숙이며 반쯤 주저앉았다.

파아아앙!

소름 끼치는 파공성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데, 그대로 지나칠 줄 알았던 워해머는 관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직각으로 떨어지며 주저앉은 그의 머리를 노렸다.

‘무슨……!?’

창백한 안색으로 다급히 들어 올린 카이트 실드.

꽈아아앙!

워해머가 다시금 그 둔중한 위력을 뽐내는 순간.

기묘한 패턴을 그리며 갈색으로 번뜩이는 방패의 마나가 공격을 받아 냈고, 드렉슬러의 몸은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쭉 밀려났다.

무너진 자세로도 충격을 최대한 흘려 내며 그 여력까지 이용한 회피.

대지 속성을 이용한 마력방패술의 극의를 보여 준 것이다.

“우와아아아아!”

그제야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튀어나온 탄성.

한순간에 이뤄진 격돌을 지켜본 관중들의 반응이 반 박자 늦게 튀어나온 것이다.

“씁…… 역시 쉽지 않네요, 경.”

그 상황에서 타이니가 혀를 날름 내밀며 얄미운 미소를 짓자, 거의 십여 미터를 밀려나 입가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던 드렉슬러가 무거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 같군.”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하나도 안 죄송한 얼굴로 약 올리지 마라, 꼬마야. 이제 봐주지 않을 테니까.”

“그야 바라던 바입니다.”

자신감 넘치게 씩 웃는 소년을 보며 쓴웃음을 짓던 드렉슬러는 이내 손을 들어 타이니가 들고 있는 워해머를 가리켰다.

“마지막 공격 말인데, 처음에 비해 훨씬 가벼웠다. 아직 ‘조절’이 익숙하지 않은 거겠지?”

방심한 바람에 낭패를 볼 뻔했지만, 본래 자신의 역할은 잊지 않은 것이다.

그 말에 타이니의 표정이 묘해졌다.

중력 전환이 익숙지 않아 마지막에는 무게를 줄인 상태에서 일격이 들어갔는데, 드렉슬러가 마치 그것을 고려해서 단어를 고른 느낌이었던 것이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게 익숙해지게끔 도와주고자 내가 온 것이니까.”

드렉슬러는 그 말을 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인자하신 주군께서는 자신의 마음속 불편함을 해소해 주시려고, 굳이 알려 줄 필요 없는 사실까지 알려 주셨다.

제자로 받지도 않을 소년에게 발렌티아 직계의 비전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그러니 자신은 그런 주군의 믿음에 보답해야 했다.

더불어 본의 아니게 몹쓸 짓을 한 아이에게 사과하기 위해서라도.

“……굳이 봐줄 필요가 없음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긴장하거라.”

드렉슬러는 그 말을 하며 연무장 한구석에 있던 또 다른 워해머를 집어 들었다.

가끔 그를 동경하는 수련생들이 몇 번 휘둘러 보다 내려놓는 것이 전부였던 연무장의 전투 망치 두 개가, 오늘은 본래의 쓰임새를 찾게 된 것이다.

“제대로 상대해 주마.”

블루윙에서도 최강의 전위라 불리는 드렉슬러가 제대로 전의를 내보이는 순간.

타이니는 오히려 기껍다는 듯 사납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내.

꽈아아아아앙!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두 전사가 굉음을 일으키며 맞붙었다.

콰아아아아앙!

쩌저저적.

쾅!

파아아아앙!

전투 망치가 서로 부딪치거나 바닥을 후려칠 때면 여지없이 지면이 흔들리며 균열이 생겨났다.

망치가 허공을 강타할 때도 그 충격파가 수십 미터 밖까지 퍼질 정도였으니, 익스퍼트급의 힘을 견디도록 설계된 연무장도 그들의 대련을 견디기엔 부실해 보일 지경이었다.

자연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기사들의 입은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 저게 말이 돼?”

“어떻게 익스퍼트가 슈페리어랑 대등하게…….”

“드렉슬러 경이 봐주고 있는 거겠지.”

“……아닌 거 같은데?”

“마나웨폰이나 소울웨폰은 안 꺼냈지만 속성력은 쓰고 있어.”

“확실한 건, 저 꼬마가 나보다는 강하……. 흠, 흠.”

어느 기사가 무심결에 뱉은 말에 스스로 놀라 혀를 씹자, 다른 기사들은 부러 헛기침을 하며 애써 외면했다.

아무리 눈에 보이는 것이 있더라도 그 말마저 긍정해 버리면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았으니까.

그런 주변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련은 점차 치열해지고 있었다.

기본적인 양상은 타이니가 연무장 이곳저곳을 바람처럼 오가며 가운데에 버티고 선 드렉슬러를 두들기고, 가끔 방패로 공격을 튕겨 낸 드렉슬러가 틈을 노리고 번개같이 달려들어 반격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그 양상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쾅!

콰앙!

꽈아앙!

타이니의 공격이 빨라짐에 따라, 드렉슬러 역시 연무장 중앙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됐다, 이제 익숙해졌어.’

‘벌써 익숙해졌나. 정말 괴물 같은 재능이로군.’

타이니가 제 몸무게를 8분의 1로 줄이는 것부터 8배로 늘리는 것까지, 무려 64배의 간극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휘두를 때까지도 가볍게, 불리는 것은 오직 충돌의 순간에만.’

……혹은 강력한 일격을 위해 힘을 모을 때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타이니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행을 통해 다음 경지로 가는 최선의 경로를 파악한 다음 그 절묘한 순간의 감각이 몸에 새겨질 때까지 반복해서 수련해야 하는 것이 보통의 기사라면, 염체의 비전을 익힌 타이니는…….

‘성공한 순간의 감각을 염체에 새겨 놓기만 하면 되니까.’

이것은 전생에도 가능했던 일이니, 염체를 개량하여 완전히 몸에 일치시킨 현생에서는 더욱 쉬운 일이었다.

그러니 성장하는 순간의 감각이 새겨진 후부터는.

“조심하십쇼!”

그 이상의 응용도 쉬워지는 것이다.

쿠웅.

일순간 최대치로 늘린 무게를 실어 내디딘 한 걸음은 신체에 한계 이상으로 응축된 탄력과 파괴력을 부여했고, 그 힘을 고스란히 전달받아 튀어 나간 타이니는 어깨 뒤로 젖혀진 워해머를 벼락처럼 휘둘러 적을 내리쳤다.

- 타이니식 전투살법 1식, 벼락 떨구기.

“윽!?”

차마 받아 낼 엄두가 나지 않는 위협적인 일격에 드렉슬러가 재빨리 몸을 물린 순간.

그대로 바닥을 강타한 타이니의 워해머가 연무장 일각에 격변을 일으켰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릉.

파파바박.

지금껏 울렸던 폭음 중 가장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연무장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고, 깨어져 나간 바닥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뭐, 뭐야!”

“깜짝이야!”

“이게, 이게, 익스퍼트의 공격이라고?”

멀리 서 있던 기사들은 화들짝 놀라며 날아오는 파편을 쳐 내는 데에 그쳤지만.

“흡!”

큰 기술을 쓰고 난 상대의 빈틈을 근거리에서 노리려던 드렉슬러는 멋대로 흔들리는 발밑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에 또다시 주르륵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대지 속성력을 가일층 끌어올려 억지로 지면을 가라앉히지 않았다면 부상을 입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간신히 숨을 돌리려던 드렉슬러는 이내 연무장 바닥을 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꼬마의 망치질 한 방에 반경 5m 크기의 크레이터가 생겨난 것이다.

“……이거 뭐, 더 이상의 대련은 필요 없겠구나.”

그 말에 타이니가 가쁜 숨을 고르며 천천히 그를 향해 예를 표했다.

“도움…… 감사드립니다.”

전신에서 흘러내린 땀이 그대로 증기가 되어 솟구치는 모습.

모든 힘을 다 써 버린 듯한 소년을 보며, 드렉슬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애초에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건 그렇고, 바닥 수리비가 얼마나 나오려나.”

시시한 농담을 뱉으며 혀를 끌끌 차던 드렉슬러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타이니에게 물었다.

“그런데 방금 그 기술은 뭐지? 그야말로 온 힘을 쥐어짜 낸 것 같은데…… 그건 좀 위험하지 않나?”

“벼락 떨구기……라 이름 붙였습니다. 뭐, 익숙한 기술이라 괜찮습니다.”

“아니, 그래도 한 방에 전력을 소진하면…….”

“적만 박살 내면 되죠.”

소년의 자신감 넘치는 한마디에 드렉슬러는 피식 웃으며 우려를 지웠다.

“……뭐,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지금 내가 많이 봐준 건 알고 있겠지?”

슈페리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소울웨폰은커녕 블레이더급의 마나웨폰도 쓰지 않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저도 다 보여 드린 것은 아닙니다.”

“뭐라고?”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는 모습으로 그리 말하니 자연히 반문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타이니는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제가 정령술사라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대련 내내 타이니가 정령을 쓰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일부러 안 썼다기보다는…….

- 진짜 위험한 상황 아니면 월 부르지 마, 알겠지!? 나 요즘 심란해서 귀여운 애가 필요하단 말이야.

- ……끼힝.

클로이가 그의 정령을 강탈(?)해 가며 경고까지 남겼기에 쓰지 못한 것에 가까웠지만.

“아…….”

그런 상황까진 알 리 없는 드렉슬러는 대번에 탄성을 내뱉었다.

타이니가 익스퍼트에 오르기 전에도 엄청난 기동력을 선보일 수 있었던 이유, 늑대의 정령이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정령술사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만큼 대련에 집중했다는 걸 새삼 깨달은 그는 재차 헛웃음을 흘렸다.

‘뭐,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지기야 했겠냐마는…….’

애초에 마나유저의 3단계 익스퍼트가 5단계인 슈페리어와 맞붙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심지어 열세 살…….’

그는 눈앞에 선 검은 머리 소년이 대체 어디까지 성장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녀석이 제국의, 아니 인류의 희망이 될 수도 있다.

여기 오기 전, 주군이 나직하게 뱉은 말의 의미가 이제야 조금 이해될 것 같았다.

‘근데 제국이나 인류의 ‘별’ 정도면 모를까 ‘희망’……?’

물론, 주군의 단어 선택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제 그에게는 전에 없던 욕심이 생겼다.

“그래, 정말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그런데 너, 혹시 우리 블루윙에 들어올 생각은 없냐?”

“……예? 그, 그게…… 각하와 이미 이야기가 된 거로 아는데요……?”

“그거야 알지만…… 너무 아까워서 말이다. 너도 양심적으로 ‘그걸’ 배웠으면 발렌티아에 보답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앗, 그, 그게……. 아, 하하…….”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타이니는 뭐라 대답도 못 하고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 반응을 보며 이때다 싶었는지, 드렉슬러는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 봐라. 우리 블루윙은 제국의 기사단 중에서도 손에 꼽힐 뿐만 아니라, 봉록이나 복지 면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예를 들면…….”

“아. 하. 하. 하.”

갑자기 시작된 드렉슬러의 영업.

그에 타이니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어색한 미소가 점차 사라져 갈 때 즈음.

멀리서 그를 구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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