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34화 (34/500)

34화. 비전

“일레인이 죽었다. 그것도 하필 발렌티아 공작가의 정예들에게.”

새어 들어오는 빛 한 줄기조차 없는 암실.

흐릿한 그림자가 토해 낸 말에 검은 원탁에 둘러선 그림자들이 술렁였다.

“……어쩌다가?”

“그리 성급한 이가 아니었을 텐데?”

“‘그 실험’을 위해 뿌리를 내려 둔 영지 중 한 곳에서 사고가 생겼다. 그 일의 범인을 추적하다 당한 모양이야.”

“일레인은 엘븐하임의 심장에 꽂을 칼날이었다! 그렇게 쉽게 죽어서는 안 되는 자원이라고!”

작은 술렁임이 이내 큰 소란으로 번지려던 순간.

“여기 그걸 모르는 이가 있나? 함부로 목소리 높이지 마라.”

검은 원탁의 상석에서 나온 목소리 하나에 다시금 암실은 고요를 되찾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로잡히지 않고 죽었다는 겁니다. 가명도 썼고요.”

“5서클이었으니 시체가 남지도 않았겠군. 그나마 다행으로 봐야 하는가.”

“예, 엘프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일레인의 뒤를 캘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인간들은 대부분 엘프의 외모를 세세하게 구별하지 못합니다.”

“수습은 확실히 가능하겠군요.”

“……그래도 당분간은 조심해야지. ‘푸른여우’를 제외하고 제국 중앙으로 연결된 선을 전부 끊어라.”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던 목소리가 상석의 목소리에 일순 조용해졌다.

그러다.

“……그, 그걸 다…… 말입니까?”

한참 후 더듬거리는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에 대한 상석의 대답은 단호하기만 했다.

“그래.”

“제가 20년을 노력해 만든…….”

억울한 감정이 여실히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상석의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너도 사라져야겠지.”

“……예?”

스각. 툭.

“처리했습니다.”

작은 소음과 함께 하나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른 목소리가 대신했다.

검은 원탁의 그림자들이 일제히 움찔하는 게 보이는 듯했지만, 상석의 목소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이 일의 원흉이 모르스 가문의 후예로 추정되는 꼬마다.”

“헛!?”

그 말에 원탁의 여기저기에서 놀란 듯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놈이 발렌티아 공작가로 들어갔다. 놈에 대한 정보 수집에 총력을 기울이되, 한동안은 손대지 마라. 절대 제국에게 꼬리를 잡혀서는 안 된다.”

“……예.”

“알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검은 원탁의 구석구석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대답들과 함께 상석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

“당장은 ‘카룬’의 일에만 집중한다.”

남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암실 안에 차분하게 울려 퍼졌다.

* * *

“각하!”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지나가는 시종과 기사들이 그를 본 순간 정중하게 예를 취했지만, 공작은 평소와는 달리 대충 손만 들어 보이며 지나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의 오른손은 검은 머리 소년의 볼을 강하게 틀어쥐고 있었다.

“아으으…… 시수, 마, 말 실수라고여……. 아, 아으. 지, 진짜.”

볼이 죽 당겨진 채 질질 끌려가는 소년에게 주변의 모든 시선이 몰려들었지만,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역시 네 녀석은 인성 교육부터 시켜야겠어.”

“내, 눼가 나이가 며친데…….”

“……그래서 더 문제라는 거다.”

서른 살 훌쩍 넘게 차이 나는 이들의 실랑이는 그들이 공작의 개인 연무장에 도착한 후에나 멈췄다.

“아으으, 진짜. 어린애 괴롭히는 게 취미십니까?”

“그러는 넌, 어른한테 막말하는 게 취미냐?”

볼살을 부여잡고 인상을 쓰는 타이니의 불평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공작은 한숨을 푹 내쉬며 태도를 바꾸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줄 것은 줘야지.”

그에 타이니 역시 눈을 빛내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 내가 재능을 살려 주겠다고 했다고?”

“최대한 빨리 오라는 말도 하셨습니다.”

“……그 말을 덧붙이길 잘했군.”

“예?”

“조금만 늦었으면 꽤 곤란할 뻔했다는 뜻이다. 너 지금 3단계, 익스퍼트의 문턱을 들어서기 직전이지?”

“……예.”

“정말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야. 아무리 회귀를 했다고 해도 말이지.”

“흠, 그게 문제가 됩니까?”

“아니. 좀 전에도 말했듯이 곤란할 ‘뻔’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어. 마나로 만든 몸을 네 몸에 완전히 일체화시킨 수법. 마나연공법인지 마력회로인지도 모를 그 요상한 수법이 네가 수련한 비전이냐?”

테스트를 하는 동안 공작이 관찰한 것은 단순히 타이니의 마음가짐만은 아니었던 듯했다. 그의 전신을 훑어보는 공작의 눈빛엔 흥미롭다는 감정이 가득 실려 있었다.

‘씁, 다 꿰뚫어 봤구만…….’

지금 그와 공작의 수준 차 정도면 체내 마나 흐름을 읽히는 것도 당연했다.

타이니는 괜스레 가라앉는 기분을 털어 내며 오히려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만들어 낸 비전이지요.”

그 대답에 공작이 멈칫했다.

“……만들었……다고?”

“예, 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요.”

그 시큰둥한 표정을 보며 공작은 황당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 정말 대단한 재능이구나.”

사심 한 점 섞이지 않은 순수한 감탄.

그런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던 타이니는 왠지 모를 민망함에 시선을 돌렸다.

“그걸 직접 만든 건 둘째 치고…… 일단 고위 마법사 수준의 말도 안 되는 마나 감응력이 있어야 가능한 수법 같은데 말이야. 마법을 배워 볼 생각은 안 해 봤고?”

“방금 말씀드린 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긴 뭐, 배워 봤자 머리가 나쁘니 마법은 못 썼겠지.”

“아니, 날 얼마나 봤다고!”

타이니가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공작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하는 짓을 보면 뻔하지. 암호화하지도 않고 공용어로 떡하니 써 놓은 미래의 정보를, 그냥 품 안에 넣고 다니는 꼴을 보면 말이야.”

공작의 말은 반발하던 그를 바로 움찔하게 만들었다.

“그 내용도 별거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지만. 대체 뭘 기억하고 다니는 건지……. 뭐, 네가 돌대가리인 건 어쩔 수 없는 문제니까 차치하고.”

연달아 날아오는 비수에 타이니가 연신 움찔거릴 때.

“다행히 무재는 있으니, 우리 가문의 비전을 익히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지.”

공작의 입에서 바라 마지않던 말이 흘러나왔다.

3백여 년 전, ‘평민’ 발렌티아는 평범한 기사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독특한 검술과 능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다 결국 오러마스터가 되어 전설적인 업적을 남기고, 제국의 공작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가 이룬 업적은 둘째 치고, 당시 보였던 능력도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더랬다.

모든 것을 튕겨 내는 압도적인 방어력과 모든 것을 일격에 베어 내는 압도적인 위력을 모두 갖춘 대검술은 그에게 ‘무적’이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그야말로 역사에 기록된 오러마스터 중에서도 독보적인 무력을 자랑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비전은, 발렌티아 공작가가 두세 세대에 한 번씩 오러유저를 배출하는 것으로 그 효율성을 입증한, 세계 최고의 비전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타이니는 공작이 준다는 게 혹시 그 비전이 아닐까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저, 정말입니까!? 설마 아, 아니겠죠? 혹시 블루윙 기사단의 비전이라면 굳이…….”

“발렌티아의 가주 전용 비전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네가 쳐다나 보겠느냐?”

“우와악!”

거의 발작하듯 튀어 오르며 감격하는 타이니의 반응에 공작은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과연 검제의 배포는 실로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말을 믿는다고 해도, 가문의 핵심 비전을 가르쳐 주겠다니? 타이니가 이리 방방 뛰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둔기를 쓴다 했으니, 굳이 검술을 배우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물론, 물론입니다!”

묵직한 손맛이 일품인 워해머를 두고 다른 무기를 쓸 생각은 없었다.

특히나 낭창낭창 가볍게 흔들리는 검 따위에는 더욱 마음이 가질 않았기에, 타이니는 당연히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본래 공격력에서만큼은 그가 검제를 압도했었다.

하지만 검제의 기술 중에서도 타이니가 유독 탐을 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 말도 안 되는 방어력!’

특히나 일정 범위 전체의 공격을 마치 카운터 마법처럼 막아 내는 기술.

그 기술은 타이니가 후일 초인이 되어 마나 감응력이 더욱 확장되었을 때도 그 원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신기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심지어 마수왕 글러터니의 발악과도 같았던 마지막 일격을 무마시킨 것도 그 기술이었으니.

‘뭐, 그러고 당사자도 죽기는 했지만.’

그 기술만 배워도 이번 공작가 행은 백번 남는 장사였다.

얼굴에 화색이 도는 타이니를 보며 공작은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가문의 비전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마나연공법, 검술, 3단계 속성 획득법, 그리고 7단계 오러 특성 획득법.”

“오!?”

탄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공작의 말은 마나유저의 세 장벽이라 불리는 난관 중 가장 높은 벽, 3단계와 7단계를 넘어서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발렌티아 공작가가 성세를 유지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자연히 드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는데, 공작의 설명이 이어졌다.

“여타 가문에선 마나연공법이나 검술 같은 것을 최고로 치지만, 우리 가문은 아니다. 속성 획득법과 오러 특성 획득법. 이 두 가지야말로 우리 발렌티아의 진짜 비전이지.”

잠깐만.

‘……설마?’

“그리고 나는 지금 너에게 그중 하나, 속성 획득법을 가르치려고 한다. 그것이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았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어진 말에는 타이니의 심경이 한순간 복잡해졌다.

“……속성 획득법이라 하면, 설마 일부러 특정한 속성을 얻는 방법이라는 겁니까?”

“그래, 그렇지.”

“……하아. 아우, 젠장.”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의 타이니가 초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뽐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3단계에서 ‘폭발’이라는 특수 속성을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7단계에 얻은 오러 특성 역시 그 시절의 무력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딱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닌 것이다.

“……다른 건 없습니까?”

마른세수를 하며 되묻는 타이니의 얼굴은 한순간에 만성 피로를 얻은 듯했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공작이 피식 웃었다.

“왜? 네가 전생에 얻은 속성이 그렇게 중요하더냐?”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이미 검증이 끝난 길을 두고 엉뚱한 곳으로 돌아가라뇨.”

“그럼 전생의 나는, 그걸 몰라서 네게 날 찾아오라고 했을까?”

“미래에 대해 알려서 자구책을 준비하라는 의도였나 보죠. 하아, 젠장…….”

대 발렌티아의 비전을 전수해 주겠다는데도 건방지게 싫은 기색을 내비치며 머리를 벅벅 긁는 소년을 보면서도, 공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네가 드렉슬러와의 대련에서 쓰러졌을 때, 네 몸을 받아 들면서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전생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확실히 알게 되었지.”

“네?”

“어린아이의 몸집인데도 웬만한 기사보다 무겁더군. 아마도 네 비전으로 만들어 낸 육체겠지?”

“그렇……습니다만?”

그건 돌아와서 개량한 비전 덕분인 거지, 전생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이으려는데, 공작이 한발 빨랐다.

“전생에 나와 함께해 봤다니 알겠지. 내가 신분에 비해 지나치게 무거운 무구를 쓰지 않던가?”

그 말에 타이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골똘히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무기는 그렇다 치고 갑옷을 무진장 무거운 걸 썼는데…… 흑강철로 만들었다고 했던가?”

“그래, 그랬겠지. 왜일 것 같으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 설마, 그게 가르침과 관계가 있습니까?”

“그래. 몸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즉 몸 안에 품은 에너지의 양이 많을수록 움직임이 느리고 둔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느냐?”

“……?”

마나의 경우만 봐도 품은 에너지가 크다고 꼭 둔해지는 것은 아니…….

반론을 하려는데 공작은 그 여지를 주지 않았다.

“세상의 섭리 중 하나. 그것을 아는 소수의 마법사들은 ‘중력’이라 이름 붙였네.”

“아!”

“그리고 우리 가문 직계의 속성 획득법은 그 중력을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하지. 굳이 분류하자면 특수 속성보다 상위의 개념, 근원 속성 중 하나라고 봐야 하는 그것을.”

근원 속성이라고?

“그 속성을 터득하면 몸이 무거울수록, 체내에 품은 에너지가 많을수록 더욱 빠르고 강해지게 되지.”

그렇다면, 설마……!?

“어때, 이제는 좀 흥미가 생기나?”

그 말에 타이니는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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