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뒷정리
신성술, 혹은 신성 마법이라 불리는 여신의 힘은 보통 축복을 통해 부여된다.
고행을 통해 사제(Priest)의 자격을 얻은 이가 세례를 받고 신성력을 터득하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부정한 것을 쫓고 상처 입은 것을 치유하는 항마(降魔)의 힘을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고행과 축복 없이도 신성력을 타고난 이들이 존재했으니, 바로 난세에 신이 직접 내린다는 성녀와 용사가 그 전형이었다.
거기에 더해, 성녀나 용사가 아닌데도 희박한 확률로 신성을 타고나는 이들도 있었다. 신전에서는 그들을 출가하지 않은 재가(在家) 성직자, 클레릭(Cleric)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클로이 폰 발렌티아는 타이니가 아는 가장 강력한 클레릭이었다.
검제가 혹시나 귀한 딸이 출가 권유를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했을 정도로.
그렇게 아직 외부에 알려진 적 없던 그녀의 힘은 실로 놀라웠다.
‘아직은 약할 줄 알았는데…….’
물론 전생의 경지엔 한참 못 미쳤지만, 타이니의 기대치는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스아아아아아.
신성한 빛살이 5서클 흑마법사의 마법을 단숨에 지워 냈다.
아무리 소신공양의 힘으로 위력이 증폭된 마법이라 하더라도 한계는 있는 법.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치명상을 입은 데다가 한계까지 몰린 흑마법사의 마법은, 아직 그 능력이 활짝 개화하지 못한 어린 클레릭의 신성력조차 이기지 못했다.
“공녀님이……?”
“……어떻게?”
그 광경이 너무도 급작스럽고, 동시에 성스러워서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어린 정령술사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비비안, 끝내!”
마치 명령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지금은 예의나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 말에 즉시 반응한 붉은 머리 여기사가 이리나를 향해 번개처럼 쇄도했다.
“마, 말도 안 돼!!!”
한쪽 팔을 희생해 가며 펼쳐 낸 흑마법사 최후의 술수가 허무하게 무력화되고 말았다.
충격이 컸는지, 눈이 붉게 충혈된 이리나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이미 쓸 수 있는 모든 수법을 써 버린 그녀는 제게 돌진하는 여기사를 뒤늦게나마 인식했지만, 소신공양의 위력은 그 시전자의 영혼에까지 타격을 입혔다.
더 이상 비행 마법조차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타격을.
슈우욱.
서서히 추락하는 이리나를 향해 푸른빛 마나블레이드가 쏘아지려는 순간.
“비비안, 죽이면 안 돼!”
뒤늦게 터져 나온 맑은 목소리에 목을 노리던 푸른 검기가 살짝 꺾이더니, 그대로 배를 관통했다.
푸우우우욱.
죽이지 않기 위해 급격히 방향을 틀었지만, 배를 꿰뚫린 것도 충분히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꺼, 꺼윽.”
쿵.
힘없이 추락한 엘프가 눈을 까뒤집은 채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그 옆으로는 시뻘건 핏물이 흥건하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굳이 가까이서 살펴보지 않아도 살기에는 이미 글러 버린 듯한 참혹한 광경이었다.
타이니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는데, 옆에서 탄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런! 심문을 해야 하는데!”
언제 다가왔을까.
목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심신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빛에 고개를 들어 보니, 발을 동동 구르는 클로이의 모습이 보였다.
꽤 심각하던 내상이 한순간 회복되는 듯한 느낌, 타이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저 엘프, 내 신성력으로 치료는…… 아, 안 되겠지?”
“……확인 사살을 하고 싶으신 거라면 권해 드리겠습니다만.”
흑마법사한테 신성력을 쏟아붓겠다니, 상당히 가학적인 구석이 있군.
“자연 치유력으로는…….”
“저 정도 상처면 오크도 죽을 겁니다. 엘프는 어림도 없지요.”
그 말에 클로이가 샐쭉한 눈으로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엘프의 단점을 모르는 바는 아닐 터였다.
아인종 중 최강의 생명력을 자랑하는 오크와는 반대로, 느린 신진대사와 그에 따른 극악의 회복력을 가진 종족이 바로 엘프였다.
“하,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넌 알고 있었어?”
“……예? 뭘요?”
“유일하게 안 놀랐잖아. 내가 성법(聖法)을 쓰는 걸 보고도.”
“아…….”
타이니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주변의 모든 이가 성법을 쓰는 공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데, 자신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으니 이상해 보일 만도 했다.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타이니는 그 짧은 순간에 바쁘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러나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직시하는 클로이의 푸른 눈동자를 본 순간, 그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뭐라고 말해도 믿어 줄 것 같은, 신뢰로 가득한 눈빛.
‘날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눈빛을 보면 연기를 해야겠단 생각이 싹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자신을 믿어 주는 이까지 속여서야 어찌 당당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타이니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우리 가문 내에서도 비밀이었는데?”
그녀의 말투는 따지는 것 같다기보단 순수한 의문의 표현으로 느껴졌다.
정말이지, 이런 사람에게는 도저히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얼버무린 대답을 클로이는 너무나도 무덤덤히 받아들였는데, 그 때문일까.
“그리고…… 저 흑마법사는 저를 쫓아온 걸 겁니다. 말씀드렸던 필레스의 영주의 배후로 추측되는 자가 바로 저자니까요.”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안 해도 될 말까지 더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클로이는 이번에도 고개 끄덕임 한번으로 넘어갔다.
“……그게 다입니까?”
“그럼?”
“저 때문에 공녀님 일행이 위험해졌다는 생각은…….”
“죽은 사람도 없고, 우리가 이겼잖아.”
“어…… 그래도…….”
“만약 희생이 있었다고 해도, 악마추종자를 죽이는 것은 귀족의 의무야. 설령 내가 이 자리에서 죽었다 해도 그건 내 힘이 부족한 탓이지, 너를 원망할 이유는 안 돼.”
스스로의 희생을 가정하는 클로이의 눈빛은 그야말로 올곧았다.
물론 아직 어려서, 뭘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순수하고 강인한 마음을 이십 년 뒤까지도 유지하며 행동으로 증명했다는 것이 이 여인, 클로이 폰 발렌티아의 대단한 점이었다.
알면서도 새삼 다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전생에서도 언제나 빛이 나던 그의 은인은, 어린 나이에도 이미 그 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새삼 고맙고 뿌듯해서 절로 미소가 나왔다.
다만.
“설마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어? 이제야 애답네! 어이구, 그랬쩌용?”
“으헉!”
어린아이를 대하듯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는 손길은 조금 소름이 끼쳤다.
* * *
전장은 난장판이 되었지만, 수습과 재정비는 비교적 수월했다.
부상자가 많을지언정 사망자는 하나뿐이었고, 그조차 이 사단을 만들어 낸 적이었으니까.
다만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클로이의 신성력 탓에 분위기가 다소 시끌시끌하긴 했다.
공작가의 기사들은 공녀의 손길을 황공해하면서 치료를 받았지만.
“그럼 공작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거군요.”
“비비안 경도…….”
고위 흑마법사의 등장보다 모시던 사람의 비밀이 더 충격적이었던 걸까.
클로이는 계속 자신을 힐끔거리는 기사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흑마법사는 죽었고, 내 비밀은 만천하에 밝혀졌고. 어째 손해만 본 것 같네. 이러다 정말 신전에서 서품 받으라고 닦달하는 거 아냐?”
그 너스레에 비비안이 슬쩍 칼을 꺼내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그게 싫으시면, 제가 목격자를 싹 다 죽여 버릴까요?”
“……비비안, 넌 농담하지 마. 진담 같아서 무서워.”
“아니, 왜 저만 갖고……! 치, 알겠습니다.”
“아이, 그렇다고 삐지지는 말고.”
그렇게 공녀와 호위 기사가 장난스레 옥신각신하며 전투의 긴장을 풀고 있을 때.
“열 살 남짓해 보이는 꼬마가, 이미 우리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어.”
“느껴지는 기운은 고작해야 2단계던데…… 어떻게 그런 전투를 할 수가 있지?”
“그러고 보니, 엘프가 흑마법사라는 것도 제일 먼저 눈치챈 거 같은데?”
“그래?”
기사와 시종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검은 머리 소년은, 그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시점에 제국 내부에서 이 정도 경지의 흑마법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은 명백히 이상해.’
필레스 영주 때도 놀라긴 했지만, 그 뒤에 튀어나온 것이 무려 5서클의 흑마법사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더구나 그 둘이 정말 같은 조직이라면, 그 조직은 대체 언제부터 제국 내부에서 활동해 온 것일까.
‘악마추종자들의 난은 분명 내가 대미궁에서 녹턴(Nocturne)을 얻을 때쯤 일어났어. 그럼 아마 지금으로부터 18년 쯤 뒤의 일일 텐데.’
5서클의 흑마법사가 힘을 숨기고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조직의 손이 어디까지 뻗어 있을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조직이, 18년 뒤에나 기지개를 켠다고?
마냥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그동안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지만, 당장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애초에 전생에도 몰랐던 일, 추론을 하기에는 아직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에혀…….”
타이니가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에 한숨을 쉬고 있자니, 내내 티격태격하던 공녀와 여기사가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뭡니까?”
“월, 다시 소환해 줘야지.”
“아…….”
- 크릉, 컹!
영혼의 저편에서 연결된 친구가 거부 반응을 보였지만, 타이니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두 쌍의 눈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스르릉.
“켕!?”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월랑.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소환에 당황한 월랑이 타이니를 째려보는 순간, 새하얀 손이 녀석을 쏜살같이 안아 들었다.
“끼힝!”
“월, 아까는 정말 수고 많았어. 언니가 칭찬해 줄게.”
나, 나 수컷인데…….
월랑의 털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는 클로이의 모습을 보며, 타이니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월랑의 본체는 원래 집채만 한 문울프입니다. 전투 때 보셨겠지만……”
“괜찮아, 이 모습은 귀여우니까.”
그러니까, 그 본모습을 아는데도 그게 어떻게 귀엽냐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만 뻥긋거리는데.
끼잉.
여전히 자신을 째려보는 월랑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좀…….
‘귀엽긴 하네.’
순간 든 생각에 타이니가 헛웃음을 짓는데, 그때까지도 월랑을 꼭 끌어안고 있던 백금발의 소녀가 그에게 불쑥 물었다.
“그런데, 그건 또 어떻게 눈치챈 거야?”
“……예?”
“그 엘프의 정체 말이야. 솔직히 클레릭인 나도 네가 공격하기 전까지는 마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어. 그런데 넌 어떻게 바로 안 거야?”
월랑을 데리고 놀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툭 튀어나온 질문.
그에 자기도 모르게 움찔한 타이니는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핵심을 찌르는 화법도 이때부터였나.
“……월랑의 능력입니다. 영혼의 냄새를 맡을 수 있지요.”
“오? 이 귀여운 것, 그런 능력이 있었어!?”
‘……끙.’
당연히 월랑을 말하는 것일 텐데, 왜인지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클로이의 푸른 눈 때문에 자신에게 한 말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피해 의식이 생긴 걸까.
굳이 따지자면 회귀의 부작용일 것이다.
영혼은 서른을 넘은 남자가 어린 소녀에게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솔직히 상상만 해도 닭살이 돋았다.
타이니가 괜스레 팔을 쓸어내리는데, 해탈한 듯 아예 눈을 감아 버린 월랑과 방실방실 웃고 있는 클로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비비안이 불쑥 물었다.
“귀엽다는 소리, 싫어?”
“……좋지는 않지요.”
“역시, 애는 애네.”
까득.
“……이예?”
절로 이가 갈리는 바람에 말이 이상하게 나왔다.
“훗, 보통 네 또래 남자애들이 귀엽다는 말을 싫어하거든. 의외로 평범한 면이 있네, 요 녀석.”
갑자기 쑤욱 볼을 잡아당기는 비비안의 손길은 아직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 빨랐다.
“전 그 경우가 아뉠……, 끄응.”
이래저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할 수 없는 말뿐이라.
“아뉘, 내강……! 끙! 소, 손!”
그 손에서 벗어나려 버둥대니 그 모습을 보며 또 키득거리는 비비안.
아무래도 계속 저항해 봤자 그녀의 장난기만 더욱 자극하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에혀.’
그는 월랑의 심정을 체험해 보는 마음으로, 비비안에게 볼을 맡긴 채 축 늘어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남은 여정 역시 정신적으로 꽤 피곤할 듯싶었다.
‘다행히 이제 이틀 정도만 더 가면.’
검제,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 공작을 만난다.
그가 어찌 나오는지에 따라 모든 계획이 뒤바뀔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그가 정말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