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엘프? 흑마법사?
스스로를 이리나라고 소개한 엘프가 고위 흑마법사라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 조직…… 영주의 배후.’
영주가 말했던 ‘그분’이라는 인물이 5서클 흑마법사쯤 된다면 납득이 되고도 남았다.
물론 예상보다 더 강한 것은 둘째 치고, 희박한 확률이라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놀랍긴 했지만.
당장 벌어진 일에는 원인을 따지기보다는 해결책을 생각하는 편이 현명했다.
일단 확실한 것은…….
‘월랑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직 모를 거야.’
월랑의 정령석으로 실험을 하던 조직의 일원으로 보이긴 하지만, 정령의 세부 능력이야 정식으로 계약한 정령술사가 아니라면 모르는 것이 보통.
나아가, 알고 있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연기를 하면서 이 일행에 합류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제일 간단한 방법은 저 엘프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밝히는 것인데, 문제가 조금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마기를 저렇게까지 숨길 수 있는 거지?’
필레스 영주의 가슴 속 서클을 보았을 때는 놈의 경지가 낮으니 무언가 수를 쓰면 숨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렇게 고위의 흑마법사가, 저렇게 강한 마기를 숨긴 채 겉으로는 마나를 뿜어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영혼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는 월랑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눈치도 채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저런 게 가능하다면, 이미 흑마법사들이 버젓이 인간 사회에 스며들어 있을 확률도 높았다.
‘대체 어떻게……. 아니, 이런 게 가능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젠장, 하필…….’
향후 이십 년간 벌어질 재앙 중에 하나.
마왕군 강림 직전에 있었다는 ‘악마추종자’들의 난리.
- 내가 미리 놈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아내서 퍼트리지 않았다면 피해가 수십 배는 커졌을 것이야, 에헴.
자신의 공적을 뽐내던 옛 동료, 아르곤의 말을 대충 흘려 넘겼던 것이 뼈저리게 후회되었다.
‘젠장, 아르곤한테 놈들을 어찌 처리했는지 좀 들어 놓을걸.’
그 시기에 대미궁에 있었다는 것이 지금만큼 안타깝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아니, 아니. 그래도 최악은 아니야.’
다행이라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공작가의 정예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고위 흑마법사의 기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현혹 같은 수에는 걸리지 않을 테니까.
반대로 불행이라면, 이 일행에서 가장 강한 비비안도 4단계 블레이더급에 불과하다는 것.
나머지 열두 명의 기사들은 죄다 3단계 익스퍼트 수준이고, 자신이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도 일행의 전력은 5서클의 마법사에 비할 수 없다.
숙련도가 비슷하다는 전제하에, 한 단계 위의 경지는 그 바로 아래 수준의 강자 다섯이 있어야 필적할 만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지금의 자신 같은 경우가 특별한 것이지.
‘보통은 얼추 그 기준에 맞아떨어지니까…….’
마법사의 서클과 마나유저의 단계 또한 일반적으로는 동일하다고 친다.
즉, 단순 계산으로만 봐도 블레이더 두 명, 혹은 익스퍼트 열 명이 더 있어야 놈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빌어먹을.’
이곳이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다면, 일행이 발렌티아 공작가의 정예가 아니었다면 저 엘프가 굳이 저런 연기를 했을까. 정면으로 싸워도 이길 확률이 높은데 말이다.
‘아니, 모르지. 방심시키고 기습을 하려는 생각일지도.’
사실 그 경우가 더 최악이었다.
게다가…….
“클로이 폰 발렌티아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이리나 님.”
이 일행의 가장 중요 인물이 웃으며 맞이하고 있을 만큼, 인간 사회에서 엘프란 기본적으로 경애의 대상인 것이다.
“반갑게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 저 선하게 웃는 엘프가 갑작스레 본색을 드러낸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일행이 궤멸당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된 이상 기습밖에 없다.’
성공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편에 존재하는 비장의 수단은 외부에 절대 알려지지 않았으니.
‘기회만 잘 잡으면 돼.’
타이니는 주먹을 불끈 쥐며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모두가 호의적인 눈으로 엘프를 바라보는 모습에, 속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흐…….’
확실한 증거도 없이 눈앞의 엘프가 흑마법사라고 말해 봤자, 누구도 쉽게 믿어 줄 리 없다.
게다가 그 말로 저 엘프가 경계심을 품고 몰래 전투 준비라도 한다면, 괜히 기습에 대비할 시간만 벌어 주는 꼴이 아닌가.
타이니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이리나가 월랑에게 관심을 보였다.
“품에 안고 계신 것은 혹시……? 호오, 정말 귀여운 정령이네요.”
“끼잉.”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여기, 이 아이의 정령이랍니다.”
뭐라 말릴 틈도 없이 클로이가 냉큼 대답했다.
“어머! 정령술사라니, 반가워요. 인간 정령술사는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우와아, 저도요! 엘프님 처음 봐요!”
타이니는 속으로 욕설을 한차례 씹어뱉곤, 비비안의 등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답게 얼굴을 살짝 붉히는 디테일까지 연출하면서.
사실 에스티나와 일 년 정도 같이 다니며 별의별 꼴 다 보기도 했지만, 현생에서는 엘프를 처음 본 게 맞으니 그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암, 처음 보는 거야, 무조건.’
“타이니?”
“너 지금 뭐 하는……?”
스스로 생각해도 완벽한 연기였건만, 주변의 호응이 영 미흡했다.
“오, 호호, 그렇네요. 서로 낯선 건가요, 우리?”
다행인지 불행인지, 엘프는 그들의 반응보다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말과는 달리 눈동자가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흐, 역시 알고 왔군.’
아무래도, 연기는 헛수고인 것 같았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아래에서 엘프의 등장은 일행 모두에게 금세 알려졌다.
기사들은 물론, 멀리 떨어진 짐마차 부근에 있던 시종들까지 옹기종기 모여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모든 시선을 받는 이리나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아, 발렌티노 공작령을 거쳐서 북쪽의 웨어비스트 왕국까지 가신다고요?”
“예. 아스란과 웨어비스트 왕국이 싸우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저는 엘프니까요.”
“아, 하하, 그래도 그런 말은 다른 제국인에게는 하지 마세요. 혹시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세상을 떠돌며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저희 수행의 목표니까요.”
흑마법사 이리나의 말은 제법 그럴듯했다.
엘프족의 최정예, 엘븐나이트들의 수행 방식 중 하나가 세계를 여행하며 여러 종족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는 얘기는 꽤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다만 엘프 입장에서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였고, 대수림 근처에도 인간은 많아 굳이 제국까지 오는 경우가 잘 없었다.
“아, 그리고 수행 중인 엘프시라면……. 혹시 저희가 정령을 볼 수 있을까요? 이 아이와 비교를 해 보고 싶어서요.”
월랑을 품에 안고 있는 클로이의 말에 이리나는 난색을 표하며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아직은 부족한 몸이라 제 영혼의 반려를 외부에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실례를 한 거죠. 못 들으신 걸로 해 주십시오.”
클로이가 예의 바르게, 그러나 어딘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러섰다.
얼핏 보기에는 거절당해 본 적 없는 공녀가 자존심을 지키려 짓는 억지웃음 같았지만…….
‘연기 잘하네.’
타이니는 미세하게 굳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동조율을 극대화한 월랑의 몸으로 ‘흑마법사’라는 글자를 클로이의 손바닥에 열심히 반복해서 쓴 결과였다.
그래도 쉽게 믿기는 어려웠겠지만, 방금 나눈 대화로 판단이 섰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이기 싫기는 개뿔, 없는 거겠지.’
정령은 그 태생 상 귀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희귀하기에, 아무리 정령술을 타고난 종족인 엘프라도 모두가 정령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최정예 엘프로 꼽히는 엘븐나이트쯤 되어야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정령이나, 혹은 새롭게 탄생한 정령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령은 엘프의 긍지이자 자랑이었고, 해서 묻지 않아도 나서서 내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 대다수가 가진 수목의 정령은, 엘프가 드문 제국에서도 그 대략적인 외양이 익히 알려져 있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엘븐하임이 있는 대수림 근처의 지방에서는 엔트(Ent)라는 나무 거인 종족이 따로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을 정도.
즉, 정말 이리나가 세계수의 수행자, 즉 엘프의 정예라면 정령을 숨기는 게 더 이상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그 이상함을 강조하기 위해, 타이니는 조금 더 수를 써 보기로 했다.
“……다른 정령도 보구 싶었는뎅.”
최대한 시무룩하게 말하며 새초롬하게 고개 떨구기.
거기다 양손 검지 끝을 마주 댄 채 꼬물거리고, 입술도 삐죽 내밀어 주면…….
‘완벽해.’
타이니가 다시금 스스로의 연기에 감탄하는데.
“으…….”
힐끗 곁눈질하니, 상황의 심각함을 모르는 비비안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인상을 쓰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이번에도 엘프는 그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재미있는 걸 보여 드릴게요, 꼬마 정령술사님, 그리고 공녀님.”
생긋 웃은 이리나가 손을 내밀자, 그녀의 손에서 밝은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오!”
“원소 마법?”
“역시…….”
주문도 마법진도 쓰지 않는 마법.
그것은 그녀가 스스로 엘프 종족 특유의 혈통 마법인 원소 마법을 쓸 줄 아는 소서러(Sorcerer)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다.
세계수의 수행자가 가진 또 다른 특징.
하지만 타이니는 한눈에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진짜 소서러가 쓰는 원소 마법을 수도 없이 본 사람이었으니까.
‘소서러가 아니야.’
5서클의 고위 마법사로서, 기초 수준의 마법을 그냥 무영창으로 발휘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다른 기사들은 몰라도 그녀라면…….
시선을 슬쩍 돌려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갸웃하는 비비안이 보였다.
‘역시.’
마법사로 따지면 5서클 바로 아래 경지라 할 수 있는 블레이더급이니, 저 마법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라면 클로이인데.
“오! 과연 아름다운 불꽃이군요. 예뻐요!”
감탄하며 소리를 지르는 그녀를 보니, 월랑을 통해 열심히 신호를 보낸 성과가 그 불장난 한 방에 날아간 것 같아 한숨이 나왔다.
“좀 더 보여 드릴까요?”
“저야 좋죠!”
“호호, 인간들은 불꽃놀이도 즐긴다고 들었어요. 동행을 허락해 주신 답례로 비슷한 걸 보여 드릴게요.”
화르르르륵.
파아아앙.
팡.
엘프의 손에서 솟구친 작은 불꽃들이 10m를 솟구쳐 오르더니, 이내 허공에서 연이어 터졌다.
“우와아!”
클로이의 감탄사와 함께 일행 대부분의 시선이 그 화려한 마법 쇼에 붙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응!?’
[소서러 아님. 수상.]
“끼잉!”
월랑의 배를 간질이는 척 클로이가 손가락으로 적어 내는 문장을 느낀 순간,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뻔했다.
‘표정 관리, 표정 관리…….’
클로이는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제국에선 엘프를 보기 힘드니 경험도 없을 텐데?
하지만 지금 그것을 물어볼 때는 아니었다.
[고위 흑마법사. 당장 기습하지 않으면 우리가 위험.]
[특수한 엘프일 수 있음. 네 말만 믿을 수는 없음. 내 입장 이해 부탁.]
“키힝힝힝!”
[책임은 제 목숨으로.]
[그렇게까지?]
“크릉!”
탁.
간지럽힘이 계속되자 월랑이 결국 클로이의 손가락을 툭 쳐 내더니, 휙휙 고개를 돌리며 둘을 번갈아 째려보았다.
물론 지금 덩치가 덩치인 만큼 그 모습도 그냥 귀여울 뿐이지만.
왜 눈앞에 적을 공격하지 않고 자신에게 장난만 치냐는 녀석의 의문은 그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조금만 참아.’
흑마법사에 대한 월랑의 적대감은 정령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본체가 죽었을 당시의 기억 때문일까.
타이니는 옅은 미소로 월랑의 불만을 달래 주곤, 다시금 동조율을 끌어 올려 클로이의 손에 메시지를 전했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비비안 기사님께만 제게 호응해 달라 명령해 주십시오.]
그러자 클로이가 냉큼 자신의 호위 기사를 불렀다.
“비비안, 월 좀 맡아! 그리고 이리나 님, 불꽃 좀 크게요! 가능할까요?”
“아……? 예, 예. 물론입니다.”
퍼어엉.
펑.
“우와아아! 비비안, 뭐 해! 얼른 월 받아! 여기!”
“예? 아, 예! 좋죠!”
흑마법사 엘프가 팔자에도 없는 불꽃 쇼를 지속하는 동안, 비비안은 반색하며 월랑을 받아 들었다.
“우쭈쭈, 언니한테 와라, 우리 강아지.”
탁.
나 수컷. 쉬운 강아지 아님. 일단 강아지가 아님!
비비안은 제 손을 뿌리치며 거부하려는 월랑의 작은 반항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웃으며 볼살을 비볐다.
그러나 월랑의 작은 발이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인 직후에는 얼굴이 무섭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