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루퍼스 패밀리
“아이고오!! 귀하신 공자님께서 어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타이니도 언젠가 와 본 적이 있는 루센티아 외성의 빈민가.
그 깊숙한 곳,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저택에서 대머리 거한이 거의 날 듯이 뛰쳐나왔다. 뒤이어 하나같이 인상이 흉악한 사내들도 줄줄이 달려 나왔다.
몸을 도화지 삼아 화려한 그림을 새겨 넣은 놈들의 모습은 제법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타이니에게는 꽤 익숙한 데다 충분히 예상했던 광경이기도 했다.
‘가문에서도 신망을 잃은 망나니가 분풀이하는 데에 기사들이 동참해 줄 리는 없고, 결국 이건가.’
저 저택은 일전에 밤새 돈벌이를 할 때도 일부러 건드리지 않은 곳이었다. 그에게 털린 깡패들이 알려 준 정보 때문이었다.
- 약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사고판다는 소문이 있는 놈들입니다.
그런 흉악한 조직이 뒷골목에 저택까지 갖추고 있다니, 당연히 영주와 줄이 닿아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 어우, 우리 영주님이요? 좋은 분이시죠.
내성에서 들은 이야기는 그 추측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그래도 직접 본 현실이 있는 터라,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루퍼스 패밀리라고 했던가?’
그 의문의 실마리가 지금 눈앞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아직 상납일은 멀었는데……. 하하, 시종도 달랑 하나만 데려오시고. 어쩐 일이십니까요?”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얼른 그들의 앞으로 뛰어간 에드몬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루퍼스! 이 건방진 평민 놈을 확실히 교육해라!”
“……예? 저 꼬마를요?”
대머리 거한, 루퍼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루센티아쯤 되는 대도시의 뒷골목을 장악하려면 그간 별의별 꼴을 다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귀족가의 자제가 웬 꼬마 하나를 데리고 와서는 손봐 달라고 한 적이 과연 있었을까?
그러니 영문을 몰라 되물을 법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요구를 한 놈은 정상이 아니었다.
짜악!
“어딜 건방지게 말대꾸야! 저놈이나 손보라고!!”
덩치가 거의 두 배는 차이 날 것 같은 대머리의 뺨을 서슴없이 후려갈기는 에드몬.
그에 루퍼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그 분노는 에드몬이 아닌 타이니를 향해 쏟아져 나왔다.
“저 꼬마 당장 꿇려! 내가 ‘직접’ 교육해 주겠다!”
“예!”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행태에 피식 웃음이 나오는데.
“멍청한 놈! 놈은 정령술사다! 직접 나서!!”
이어진 에드몬의 욕설 섞인 고함에 루퍼스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흉흉한 기세는 분노의 원흉이 아닌 검은 머리 소년을 향했다.
“……에릭, 틸몬. 나서라.”
나직이 뱉어 낸 목소리에 단검을 든 사내와 철퇴를 든 사내가 튀어나왔다.
그들의 무기에서 푸른빛이 번뜩이는 것을 보니, 마나유저 2단계, 기사급 실력자들이었다.
“기사급이 깡패짓을 한다고?”
이내 타이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드득.
“재밌네…….”
정령술사 소년은 깍지를 낀 손을 시원하게 풀며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루센티아에 머물 시간을 더 줄일 수 있겠어.”
그들로서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면서 말이다.
* * *
타이니는 왜 긴장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뒷골목 조직에는 그를 위협할 실력자가 없기 때문이다.
경지가 마나유저 2단계만 된다면, 기사라는 준귀족의 신분을 얻어 양지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데 어떤 멍청한 놈이 그걸 마다하고 뒷골목 건달 짓을 하겠는가.
즉, 암흑가의 마나유저는 그 경지에 비해 실력이 한참 모자라거나 진짜 정신이 나간 놈들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도 아니면 죄를 짓고 도피 생활을 하는 수배자이거나.
나아가, 기사급 이상의 수배자들은 그 위험성 때문에 곧바로 추살되거나 처형당하기 마련이다. 그 경지에 오르고도 진짜 정신이 나가 버린 놈들은 정말로 희귀한 경우일 테니 논할 가치도 없었다.
간혹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로는 음지의 암살자 길드가 초인의 목을 따기도 한다는 모양이지만, 그만한 실력이 있는 자가 뭐 하러 그런 일을 하겠는가.
‘양지에서 당당하게 사람 목을 따면서도 돈과 명예까지 얻을 수 있는데.’
표현이 다소 과격하지만, 기사가 하는 일이라는 게 결국 그것이었다.
그러니 조금만 생각해도 뒷골목 조직의 숨은 실력자 같은 얘기는 도시 괴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타이니는 자신의 몸으로 다시 한번 증명했다. 불과 30분 만에 루퍼스 패밀리를 완전히 박살 내는 것으로 말이다.
“……끄르륵.”
한쪽 발목이 붙들려 냅다 던져진 루퍼스 저택의 벽을 몸으로 부수고는 먼저 박살이 난 부두목들 위로 떨어져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음? 아직 죽으면 안 되지.”
우드득.
루퍼스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인 타이니는 어긋난 놈의 목뼈를 강제로 맞춰 목숨을 조금 더 연장해 준 뒤, 가뿐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 그럼 얼추 정리는 된 거 같고…….”
그 짧은 시간 내에 끔찍한 피바다를 만들어 낸 소년의 작은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박살 난 것은 루퍼스 패밀리의 세 두목만은 아니었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고함을 지르며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잔챙이들도 이미 주변에 전부 널브러진 지 오래였으니.
“끄응.”
“끙.”
“으으.”
타이니의 목소리를 제외하면, 들려오는 소리라곤 오직 고통스러운 신음들뿐이었다.
“어이, 반편이. 더 불러올 친구 있어?”
“으, 으아악! 오, 오지 마!!”
타이니가 해맑게 웃으며 다가서자, 멍한 표정으로 전투를 지켜보던 에드몬이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난 몸뚱이들과 붉은 피뿐.
그야말로 지옥도의 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아, 악마 새끼! 사, 사람 목숨을 대체 뭘로 보고!”
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한 자의 입에서 나오기엔 다소 어색한 말이었지만, 절로 그런 말이 튀어 나올 정도로 이 참상을 만들어 낸 과정은 잔혹했다.
사람이 사람을 휘둘러 사람을 박살 내는 잔인한 수법.
게다가 그 집행자가 작은 소년이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기괴하고 끔찍한 악몽이 현실로 펼쳐진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에드몬에게 극심한 공포심을 선사했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내, 내가 누군지 알고!”
털썩.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며 뒷걸음질 치던 에드몬은 누군가의 시체에 발이 걸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으아아……! 가, 가까이 오지 마! 이놈! 내, 내가 누, 누군데…….”
그리고 어느새 그의 앞에 다가간 타이니의 눈에, 놈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바닥을 적신 핏물을 흐리게 만드는 광경이 보였다.
“애걔……. 이게 귀족의 위엄이야? 냄새가 좀 심하네.”
과장되게 코를 틀어막으며 비웃는 타이니의 모습에도, 에드몬은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흐으으.”
눈앞에 사신이 다가와 있었다. 부들부들 떨며 오줌까지 지려 버린 이상, 귀족의 위엄이라는 자기 변명도 더는 통하지 않았다.
“끄, 끄륵.”
갑자기 숨쉬기가 힘들어지면서 의식이 멀어지는 것이, 그로서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얼쑤? 기절까지?”
타이니가 황당한 마음에 헛웃음을 짓는 그때.
- 타이니!!
멀리서 다급한 음성과 함께 눈에 익은 붉은 머리 여기사가 말을 몰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 이게 대체.’
비비안은 황망한 눈으로 타이니와 주변을 살폈다.
공녀의 명으로 타이니를 찾으러 나왔을 때, 에드몬이 그를 끌고 외성으로 향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얼마나 놀랐던가.
그런데 지금 눈앞에 벌어진 광경은 그녀가 떠올릴 수 있던 최악의 상황을 정반대로 뒤집은 것이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 여유가 넘쳐 보였다.
“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공녀님의 명령이셨다. 네가 걱정되신다고…….”
그리 말하면서도 지금의 상황과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헛웃음만 나오는데, 소년은 주변의 이 참상이 자기와는 관계없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전 괜찮습니다.”
“너, 이게 다 대체……?”
“아, 이 피요? 괜찮습니다. 제 피 아니에요.”
갑옷에 튄 피를 보란 듯이 털어 내는 소년의 모습은 소름이 끼치기까지 했다.
작은 강아지(?) 덕에 피어나던 호감이 다시 경계심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것이 표정에서 티가 났는지, 소년이 황급히 말을 보탰다.
“참고로 이건 정당방위였습니다, 기사님. 이놈들은 저기 에드몬 공자가 동원한 쓰레기들이에요.”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기는 하구나. 하지만 너무 잔인…….”
“누가 봐도 그런 겁니다, 기사님. 더구나 전 저 에드몬 공자는 털끝 하나 안 건드렸습니다. 그냥 자기 혼자 기절했을 뿐이에요. 혹시라도 문제가 될 만한 소지는 전혀 없습니다.”
씨익 웃는 모습을 보니, 입가에 경련이 날 것 같았다.
……너 이제 열세 살이라며.
이게 정말 열세 살짜리가 할 수 있는 행동과 생각인가.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판단은 공녀님이…….’
비비안은 고개를 저으며, 느슨해졌던 경계심을 애써 다잡았다.
“……일단 돌아가자. 저 에드몬 새…… 흠, 흠. 공자는 네가 챙기도록.”
“엇, 그건 곤란합니다, 기사님.”
“뭐?”
“일단 챙길 것은 좀 챙기고요.”
“그게 무슨……?”
비비안의 표정이 또 한 번 살짝 일그러지는데, 소년은 곧 그녀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기행을 보여 주었다.
“건물 구조로 보면 이쯤인 것 같은데.”
콰아아아앙!
“빙고!”
저택의 침실 벽 한쪽을 부숴 버리자 드러난 거대한 회색 금고.
그것을 본 타이니가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죽기 직전인, 하지만 아직은 분명 살아‘는’ 있는 루퍼스를 질질 끌고 가 그 손을 상자에 가져다 대었다.
번쩍.
놈의 손이 그 금고에 닿는 순간, 푸른빛이 퍼지며 주변을 환히 밝히고.
우우웅.
작은 진동과 함께 그 안에 담긴 금은보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하나같이 패턴이 똑같아. 단순한 놈들.”
“아니……!”
타이니를 따라온 비비안이 깜짝 놀라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데, 소년은 태연한 표정으로 금고 구석에 쌓여 있는 서류 뭉치들을 뒤적였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거…… 찾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아, 뇌물 장부입니다. 이놈들 하는 짓거리가 다들 거기서 거기라서요. 여기 보시면…… 역시! 에드몬 공자의 기록이 있군요. 하하, 이거면 후환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해맑게 웃는 소년의 모습을 보니 더는 감탄사도 나오지 않았다.
“……넌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니.”
“하하, 그건…… 비밀입니다.”
“…….”
태연하게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는 타이니의 행동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저 빤히 바라보자, 소년은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이놈들이 인신매매도 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저택 어딘가에 사람들을 가둬 둔 공간도 있을 겁니다. 그것만 찾은 뒤 여기 있는 장부를 챙겨서 돌아가시지요.”
“인신매매?”
“예. 뭐, 소문이긴 합니다만……. 아, 잠시만요. 이런 쓰…… 흠, 흠. 장부에 적혀 있네요. 우선 갇혀 있을 사람들부터 찾죠.”
“그, 그래.”
타이니는 이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비비안은 그저 멍한 얼굴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살았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기사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기사님. 흐흑.”
비비안은 지하의 어두운 공간에 짐승처럼 갇혀 있던 백여 명의 사람들에게 감동에 찬 감사 인사를 받게 되었다.
“그, 그게 내가 아니라, 저기 저 아이가 구했다고……!”
황급히 해명해 보지만, 피해자들은 잠시 타이니를 돌아보는가 싶더니 다시 그녀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아니, 진짜.”
모든 상황이 당혹스러울 뿐이었지만, 정작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당사자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냥 받아들이세요, 기사님.”
“허?”
“저 같은 어린애가 자기들을 구했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걸 네 입으로…….”
비비안이 당황하든 말든, 소년은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후속 조치까지 제안했다.
“괜찮습니다. 그냥 금고에 있던 재물이나 저들에게 나눠 주시죠. 일종의 보상금으로요. 아, 물론 공녀님 이름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겠지요.”
“뭐?”
“아, 사태 수습을 위해서라도 절반 정도는 백작가에 바치는 게 좋겠네요. 기사님이 처리하신 걸로 얘기하면 공녀님께도 보상이 꽤 넉넉히 돌아갈 겁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죠?”
비비안은 이제 이 소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아이의 정체는 대체 뭘까.’
단순히 경계심이라고도 볼 수 없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그녀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