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클로이 (2)
아…….
창날이 목 앞까지 다가오고서야 간과하고 있었던 치명적인 실책을 인지할 수 있었다.
‘전생과 달리 일찍 만났으니 알아볼 거라고? 이런 멍청한…….’
너무 일찍 만났다.
그간 타이니의 외모가 이렇게나 변했다는 것을 클로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그 결과가 그녀의 저 적대적인 시선이었다.
“그 작고 귀여운 아이를 대체 어떻게 한 거죠?!”
“대답해라, 꼬마.”
자신을 안내한 기사가 싸늘한 얼굴로 창날을 더욱 가까이 들이대는데, 그 살벌한 위협이 순간적으로 멍해진 정신을 깨웠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어차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어쩌겠는가. 상대가 이해하건 말건, 이것이 진실이거늘.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제가 그 아이입니다, 공녀님.”
“말도 안 되는 소리……!”
클로이가 즉시 반발했지만, 다행히 조금이나마 설득력을 더할 만한 점이 있었다.
“필레스 영지에 검은 머리 아이는 저밖에 없습니다. 아니, 아마 공작령 전체를 통틀어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어?”
예쁜 얼굴에 당혹감이 번지더니, 이내 커다란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단순한 외성 순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규모의 행렬,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인파.
하지만 그 모든 사람 중 단 한 명도, 검은 머리는 없었다.
경계하던 얼굴이 이내 당혹감에 물들었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분명히 아주 작고 귀여운, 불쌍한 아이였는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그녀.
그중 입버릇처럼 반복되는 표현이 문득 타이니의 귀에 박혀 들었다.
어쩐지 익숙한 말.
‘작고 귀여운…….’
그 낯간지러운 묘사의 대상이 자신이다 보니 온몸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지만, 그제야 새삼 그녀에 대한 정보가 또 하나 떠올랐다.
‘……작고 귀여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지. 귀여운 걸 볼 때면 표정부터 달라졌었어.’
왜 이제야 생각이 났을까.
그런데 설마…….
‘나한테 반지를 준 이유도?’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추측이었지만, 지금 믿어 볼 만한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이 분위기를 바꾸려면…….
‘월랑!’
그의 시선이 바로 아래, 자신이 올라타 있는 늑대의 정령에게 향했다.
“컹?”
그러나 수족처럼 움직이던 월랑은 처음으로 고개를 획획 저었다.
완강한 거부의 표현. 지금 뇌리에 전달된 뜻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안 그러면 한동안 달빛 샤워는 못 하게 될걸? 내가 감방에 처박힐 테니까.’
타이니는 이 늑대의 정령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걸고넘어졌다. 잔인하게도, 영혼만 남은 정령이 생전에서부터 지금까지 간직한 유일한 욕구를 볼모로 삼은 것이다.
“낑.”
그 협박이 진심임을 깨달은 월랑이 두 귀를 축 늘어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커다랗던 몸집이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엇!”
“이놈 어디서 수작을……!”
“잠깐! 역소환……이 아니네.”
한순간에 주변의 시선을 끌어모은 월랑은 이내 손바닥만 한 은빛 늑대, 아니 강아지의 모습이 되어 타이니의 어깨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주변의 대다수는 그저 신기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지만.
“어머!?”
만난 이래 가장 큰 목소리를 낸 클로이의 눈동자는 거의 두 배로 커져 있었다.
“공녀님을 만난 이후,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이 아이를 만난 것도 그렇고요.”
타이니가 월랑을 들어 앞으로 내밀자, 클로이의 시선이 그대로 따라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미끼가 완벽하게 먹혀들었다는 것을.
“끼이잉.”
클로이의 손바닥에 올려진 작은 은빛 강아지는 허락도 없이 제 배를 긁는 손길이 못마땅하다는 듯 울음을 토해 냈지만, 그녀의 눈엔 그 모습조차 귀여워 보이는 듯했다.
“어, 어쩜.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불퉁한 표정을 짓는 월랑의 배를 긁적이고 볼을 쓰다듬는 그녀의 눈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몽롱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호위 기사 비비안이 실례를 무릅쓰고 끼어들었다.
“고, 공녀님. 아무리 그래도 낯선 이의 정령입…….”
“정령은 순수한 아이만 계약할 수 있다고 들었어. 내 말이 틀려?”
낯선 소년을 바라보는 공녀의 눈빛에는 어느새 호의만이 가득했다.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비비안은 표정을 구기며 다시 타이니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모시는 공녀, 클로이 폰 발렌티아의 취향과 성격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정령의 속성에 대해 말한 것은 분명.
‘귀여운 강아지를 더 오래 보기 위해 막 떠올린 핑계겠지.’
하지만 그것이 이미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다는 게 문제였다.
실제로 눈앞에 보이는 정령술사는 어린 소년이었고, 그래서인지 비비안을 제외한 기사들도 자연스레 경계심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비비안만큼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기름을 잘 먹인 가죽 갑옷에 자기 키만 한 메이스.
아무리 몸집이 작고 무구의 상태가 깨끗하기는 해도, 철저한 실전용 무장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어딘지 모를 귀족가의 도련님 같기도 했지만.
‘검은 머리, 검은 눈……. 내가 알기론 그런 귀족은 없어.’
여러모로 엄청 수상쩍었기에, 비비안은 끝까지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아이, 이름이 뭐지요?”
이미 정령에게 홀딱 빠져 버린 공녀는 호위 기사의 말을 들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비비안이 한숨짓는 것을 곁눈질하면서, 타이니는 미소 띤 얼굴로 클로이의 물음에 답했다.
“월랑이라 지었습니다. 동방어로 달빛 늑대라는 뜻입니다.”
“예쁜 이름이네요.”
거지 소년이 동방어를 알고 있는데,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하는 듯한 공녀.
그 모습을 본 타이니는 다시금 합리적인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반지를 준 이유가, 진짜 내가 작고 귀여워서……. 으으으, 아니, 이건 생각하지 말자.’
거인이 되고 나서 그녀를 다시 만났던 전생에는 알 수 없었던, 아니 알고 싶지도 않은 진실이었다.
다만, 그때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받은 금반지를, 먼 길을 돌다 못해 삶까지 한 번 반복한 후에야 다시 돌려주는 순간이었으니까.
‘드디어…….’
그런 생각에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 준비해 온 말이었기에 말은 쉽게 나왔다.
“공녀님을 만난 덕에 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타이니의 말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 과정에서 겪은 슬픔 같은 건 굳이 전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에 담긴 진심을 느꼈는지, 공녀의 눈빛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월랑에게 홀려 있던 눈빛이 잠시나마 진지하게 돌아온 듯한 모습.
“그렇다 해도 너무 급격한 변화군요. 그때는 분명 10살도 안 되어 보였는걸요. 이름도 작다는 뜻의…….”
“타이니입니다. 올해 열세 살이 되죠.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지요. 마나의 축복을 받고 나서야 겨우 이만큼 자랐습니다.”
“아, 맞아요! 타이니, 분명 그 이름이었어요.”
타이니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여전히 조금의 당혹스러움이 남아 있었지만, 직전과 달리 분명한 호의 역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만 그 주변 인물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열세 살짜리 소년의 말투가 이렇게 어른스럽다고요? 공녀님, 너무 수상합니다.”
다시 한번 끼어드는 여기사의 얼굴에는 분명한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여기사의 의심은 합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타이니로선 그 말에 수긍해 줄 수 없었다.
“제가 워낙 험하게 자란 탓에 그리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말투가 또래들과 어떻게 다른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험하게 자란 것과는 달라! 만약 그랬다면 쓰는 어휘 자체가 달랐겠지. 넌 그냥 어른의 말투지. 혹시, 이종족의 피라도 섞여 있나?”
챙.
검을 뽑아 드는 붉은 머리 여기사의 말은 지나치게 예리했다.
“비비안!”
“공녀님,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공녀님께서 위험하신상황이라 판단된다면, 그때부터 모든 의사 결정권은 제게 있습니다. 그것은 공작님께서 제게 내리신 명령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보기에도 좀 수상합니다, 공녀님.”
비비안이 강경하게 나서자, 망연한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던 한 사람이 슬쩍 끼어들었다.
“에드몬 공자!”
“전후 사정은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공녀님께 접근하는 정령술사라니요? 보안 차원에서라도 일단 격리하고 심문해 보심이 옳을 듯합니다.”
올해 스무 살을 맞이한 루센트 백작가의 후계자는 공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타이니를 향해 대뜸 호통을 쳤다.
“그렇지 않나!? 게다가 평민이 어디 귀족을 빤히 쳐다보고 있느냐? 당장 무릎을 꿇어라!”
이건 또 뭐야?
타이니는 갑자기 끼어든 금발에 푸른 눈, 속된 말로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청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굳이 놈을 상대해 줄 필요는 없을 듯했다.
“……굳이 다른 분들께 저를 믿어 달라 청하지 않겠습니다. 공녀님, 반지를 제게 주시며 하신 말씀은 아직 유효한 겁니까?”
타이니가 공녀만을 바라보며 그리 말하자, 완전히 무시당한 에드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익!”
하지만 그는 바로 발작하지 못했으니.
“아? 아……!”
꼬마 정령술사의 말에 놀란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공녀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의 가문이 통치하는 영지 내라 한들 이 자리의 주도자는 백작령의 본질적인 통치권을 가진 공작가의 딸, 클로이였으니까.
그리고 타이니는 그런 그녀를 보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겠다 말씀하셨지요. 지금 그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도움을 말하는 거죠?”
“제가 공작님을,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 님을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대한 반응은 클로이보다 주변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네 이놈!”
“어딜 감히!”
“미친놈이로구나!”
비비안의 검에서 4단계 마나유저, 블레이더(Blader)임을 증명하는 푸른 검기(Mana blade)가 솟구치고, 다시금 날이 바짝 선 기사들의 창칼이 타이니를 향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베어 낼 것처럼 살벌한 기세였다.
하지만…….
“제가 위명이 자자한 검제(劍帝, Sword Emperor) 각하께 무슨 위해라도 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
타이니의 태연한 반문이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렇다.
그들의 주군은 현재 대륙에 7명밖에 없는 최강의 기사 중 하나. 파괴의 권능,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초인이었으니까.
한낱 정령술사 따위가 범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검의 황제(Sword Emperor)라니……. 하하, 아버님께서도 들으시면 민망해하실 별명이네요. 대륙 7대 기사에 이름을 올리신 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클로이의 말처럼, 타이니가 꺼낸 검제라는 이명은 아직은 다소 거창한 이름이었다.
‘아, 그랬지! 이 시점에는 아직……. 젠장, 또 실수를.’
물론 회귀한 그의 사정이야 아무도 모를 테니,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타이니가 발렌티아 공작을 엄청나게 존경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크흠, 각하께서 검제라. 음, 확실히 어울리는 이명이긴 합니다.”
“그분이라면 분명 그럴 만하지요.”
“이런 시골에도 그분의 위명이 전해질 정도라니 뿌듯하군요.”
그를 둘러싼 기사들의 태도가 한결 느슨해졌다.
‘……뭐, 존경할 만한 구석이 많은 영감이긴 했지만.’
긍정적인 인상을 준 것 같으니, 실수를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작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던 당사자인 클로이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선을 그었다.
“하지만 굳이 공자, 아니…… 타이니, 네가 아버님을 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갑작스레 바뀐 말투, 하지만 타이니는 오히려 빙그레 웃었다.
상대의 신분을 추정할 수 없을 때는 말을 높이고, 확인이 된 이후에는 신분에 맞게 편히 말한다.
최고위 귀족이 오히려 지나치게 예의를 차린다고 봐도 무방한 모습. 거슬릴 리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회귀한 사실을 곧이곧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으니, 그럴듯한 구실이 필요했다.
“최근 필레스 영지에서 벌어진 흉악한 일과 그 배경에 대해 설명해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직접 일을 겪은 당사자 중 한 사람으로서요.”
그 말에 클로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비비안이 그녀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자 안색을 확 바꾸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
그 원망하는 눈빛에 비비안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행히 그녀가 변명하기도 전에 클로이의 관심사는 빠르게 옮겨갔다.
“흑마법사라니…… 하……, 혹시 그 일 나한테 먼저 말해 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공녀님.”
그 질문과 대답은 타이니가 클로이의 일행에 무사히 합류하게 되었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물론.
“일단은 두고 보겠지만…… 수상한 짓 하지 마라, 꼬마. 조금만 이상해도 바로 베어 버릴 테니.”
“비비안!”
아직은 경계심을 버리지 않은 그녀의 호위 기사와.
“……가, 감히 평민 새끼가 나를 무시해?”
조금 떨어진 구석에서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도련님, 에드몬이라는 변수가 남아 있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