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루센티아 (2)
전생에 대륙의 암흑가에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었다.
- 골목길에 거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그 즉시 숨어서 숨소리도 내지 마라.
괴력의 기사 타이니가 뒷골목 조직들을 박살 내면서 자금을 조달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뒤에 생긴 불문율이었다.
보통 기사들은 호봉을 넉넉히 받는 편이었고, 뒷돈을 챙긴다 해도그냥 상납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굳이 제 손을 더럽혀 가며 뒷세계를 건드리는 일은 극히 드문 것이다.
하지만 대륙 최고의 기사 중 하나로 꼽히는 괴력의 기사는 적극적으로 뒷골목을 털고 다녔다.
아니, 적극적인 수준을 넘어 거의 들르는 도시마다 암흑가부터 털고 시작하는 때가 다반사였으니, 그 악명이 암흑가를 넘어 민간에까지 자자할 정도였다.
악인 분쇄기라는 이명은 그렇게 생겼다.
그리고 그 이명이 널리 퍼진 뒤에는 악인들이 그를 피해 다니는 바람에 오히려 자금 조달에 조금 애를 먹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할 필요도 없지.’
굳이 전생과 비교할 것도 없이 작디작은 몸.
양아치 놈들이 도망가기는커녕 반색하며 달려들 만한 연약한 외양.
이 모든 것이 아주 훌륭한 미끼가 되어 주었다.
으슥한 골목에 들어서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벌레들이 꼬였으니까.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휘릭.
탁.
“밤새 털었는데 이게 전부인가…….”
묵직한 주머니를 공연히 허공에 던졌다 받아 본 타이니의 얼굴에는 진한 아쉬움이 어려 있었다.
지난밤, 그에게 걸려 가진 걸 전부 털린 것도 모자라 온몸을 골고루 두들겨 맞고 불구가 된 수십 명의 깡패들이 보았다면 이를 갈 노릇.
하지만 타이니로서는 진심으로 아쉬울 뿐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숨어 있는 조직까지 싹 다 찾아서 뒤집어엎었을 텐데.’
정말로 돈이 될 만한 굵직굵직한 조직들은 아직 건드릴 수가 없었다.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기사급 이상의 실력자가 뒷골목 조직에 몸담고 있지는 않겠지만, 이런 대도시의 조직들은 알게 모르게 시장이나 영주와 연이 닿아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까.
아직 귀족과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한참 부족한 만큼,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뭐…… 나중에 다시 오지.”
그 말을 들었는지, 한쪽 발목이 으스러진 채로 벽에 처박혀 있던 깡패 놈 하나가 움찔 떨었다.
하지만 그런 놈을 자비롭게 못 본 척해 준 타이니는 작게 휘파람을 불며 빛이 쏟아지는 골목 밖으로 나섰다.
이미 중천에 떠오른 태양.
하룻밤을 꼬박 뒷골목에서 지새운 셈이었지만, 하루 밤샘 정도야 가뿐했다.
다만, 그 고생을 한 목적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갑옷? 네가?”
“돈이라면 있습니다. 적당한 걸로 내어 주시죠. 쓸 만한 무기도 있으면 좋겠어요. 둔기 종류로요. 워해머가 있으면 제일 좋긴 한데…….”
그 말을 들은 대장장이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아서라, 내가 아무리 돈이 급해도 꼬마한테 무기를 팔지는…….”
- 크르르르.
“……으아아악! 허, 허으. 뭐, 뭐야?!”
“그냥 꼬마가 아니라, 용병입니다. 그리고 정령술사죠.”
장비를 구하려 해도 외견이 문제였다. 결국 월랑의 도움을 받은 후에야 식겁한 대장장이를 달래 장비를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열세 살짜리 몸에 맞는 금속 갑옷은 루센티아에서 가장 큰 대장간이라는 이곳에도 없었지만, 다행히 대체할 만한 물건은 찾을 수 있었다.
“……남부산, 철우(鐵牛)의 가죽으로 만든 가죽 갑옷입니다. 웬만한 화살은 그냥 튕겨 낼 겁니다. 옛날에 루센트 백작가의 도련님들이 사냥 나갈 때 입는다고 주문하셨는데, 무산되는 바람에 그냥 가지고 있었지요. 상의와 하의, 부츠까지 다 합쳐서 은화 열 개만 주십시오.”
옻칠을 한 듯 새까맣게 광이 나는 가죽 갑옷은 제법 쓸 만해 보였다.
“뭐, 쓸 만하군요. 대장간에서 만든 가죽 제품치고는.”
“그, 그럼요. 무기에도 가죽 쓸 데가 많으니 저희는 따로 전문가를 고용했……. 그, 그런데 이 친구 좀 멀리 떼어 놓아 주시면 아, 안될까요?”
코앞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월랑의 거대한 영체.
대장장이는 그 앞에서 잔뜩 겁에 질린 듯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니, 바가지를 씌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타이니는 대장장이의 긴장을 풀어 줄 겸 친절한 미소로 답해 주었다.
“안 물어요.”
“그, 그렇군요. 지금 보니 참 차, 착하게 생겼네요. 하, 하하.”
- 컹!
“흐아악! 흐으으, 흐. 사, 살려…….”
괜히 배짱을 부리다 기겁을 하며 주저앉는 대장장이.
타이니는 한숨을 쉬면서도 그를 일으켜 주며 물었다.
“무기는요?”
“예? 아, 예, 예. 여, 여기로…….”
거의 울기 직전인 중년의 대장장이를 간신히 달래며 따라가 보았지만, 아쉽게도 워해머를 구할 수는 없었다.
새삼 자신의 주력 무기가 비주류에 속한다는 것을 실감한 타이니는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지만, 대신 1m 남짓의 잘 제련된 메이스를 저렴한 가격에 챙길 수 있었다.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쇼핑.
“저, 저, 날강도 같은…… 에잇, 재수 옴 붙었네!”
그랬기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욕지거리 정도는 못 들은 척 웃어넘길 수 있었다.
하루 내내 질주한 후 밤새 이어진 돈벌이. 거기에 쇼핑까지 해치우고 나니 몸이 좀 뻐근하긴 했다.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온 피로.
‘역시 이 몸은 아직 약해. 젠장, 어쩔 수 없지.’
공작가로 향하기 전에 체력부터 충분히 회복한다.
그리 결심한 타이니의 발길이 여관이 즐비한 거리로 향했다.
그런데 아직 어린 외양은 하룻밤 머물 방을 구할 때도 조금 문제가 되었다.
끼이이익.
“와하하하!”
“……그래서 내가 놈을 간신히 뿌리치고 돌아서는데, 그때 이미 저 새끼는 백 미터는 넘게 달아나서 저 못생긴 엉덩이만 보이더라고!”
“웃기지 마, 인마! 내가 네놈 엉덩이만 보면서 뛰었다고!”
“푸하하하!”
대낮부터 시끌벅적한, 펍을 겸하는 여관의 1층.
타이니는 그 사이를 조용히 비집고 들어가 종업원을 찾았다.
“어머, 귀엽게 생긴 꼬마네? 엄마 심부름?”
“방 하나 줘. 하루 쉬어 갈 거야.”
“호호호, 얘가 농담도…….”
“농담 아닌데? 여기 돈.”
툭, 하고 카운터에 올려놓은 은화 한 닢에 종업원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이내 누가 볼세라 순식간에 돈을 챙긴 종업원이 눈웃음을 쳤다.
“아하하, 손님. 저를 따라오시죠. 최고급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정말 좋은 방이면 한 닢 더 주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손님.”
그 한마디에 종업원의 걸음이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눈치챘지만, 타이니는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밤샘 작업 후 쓸 만한 장비를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기를 꼬박 반나절. 하루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푹 쉬고 싶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방해꾼이 있었다.
“아아, 잠깐. 우리 애가 말실수를 좀 한 것 같은데.”
타이니의 어깨에 커다란 손을 올려놓는 털보 거한.
타이니가 황당한 눈으로 올려다보는데, 거한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애한테 심부름을 시켰는데 엉뚱한 데에 돈을 쓰네. 존, 여기서 혼내기 전에 삼촌 따라 나와라.”
꽈악.
어깨를 힘껏 움켜쥐는 거한의 손.
그러나 새로 산 갑옷의 질이 좋은 건지 이놈의 악력이 영 부실한 건지, 어깨에선 아무런 압력도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그 한심한 수작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마도 방금 돈주머니를 꺼낸 것을 본 모양인데…….
“하, 진짜 더러워서 빨리 크든지 해야지.”
전생에는 커다란 덩치 자체가 통행증이나 다름없었던 만큼 이런 쓰레기들이 꼬이는 현실에 새삼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한은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을 더욱 일그러트리며 타이니의 눈앞에 제 면상을 들이댔다.
“존, 삼촌하고 나가서 이야기할까?”
어깨에 가해지는 압력이 이제야 조금 느껴질 것도 같았다.
이내 거한이 타이니의 어깨를 잡지 않은 손으로 그를 돌려세우려 하는데, 이 촌극에 동참해 줄 이유가 전혀 없는 타이니는 그저 피식 웃으며 거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래, 그래. 이제야 말을 듣는구나. 삼촌이 좀 늦었…….”
우드드득.
“끄아아악!”
털썩.
한쪽 손이 완전히 으스러져 버린 거한이 여관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왁자지껄하던 여관 안이 일순간 조용해지며 모두의 시선이 몰리는데, 타이니는 사람 좋게 웃으며 놈의 손을 쥐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 집안일이에요. 신경들 끄세요.”
“크흑. 제, 제발 이것 좀…….”
명백히 대조되는 두 사람의 반응.
그러나 대다수가 술꾼이나 용병인 손님들은 오히려 흥미로운 듯 눈을 빛낼 뿐이었다.
그에 타이니는 씩 웃으면서 거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봐, 자칭 삼촌 씨. 밖에 나가서 나랑 얘기 좀 할까? 네 패거리들도 근처에 있지? 어디야?”
그 목소리에 실린 살기에, 벌겋게 상기되었던 안색이 파랗게 질린 거한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으으으.”
사실 웬만한 강자들은 이런 일을 겪어도 그냥 적당히 손을 봐 주거나 못 본 척 넘어가겠지만, 타이니는 그래 본 적이 없었다.
다시는 이런 짓을 못 하도록 철저하게 박살을 내는 것이 기본이요, 저지른 행태가 과하다 싶으면 목숨을 빼앗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혹자는 뒷골목 출신의 좁은 도량이 드러나는 행태라고 쓴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타이니는 자신이 환경 미화에 열심인 것이라 생각했다.
‘모든 쓰레기를 치우지는 못해도, 걸리적거리는 쓰레기는 일단 치워야지.’
그렇게 거한과 그 일당을 박살 내고 은화 서른 닢을 더 벌어들인 타이니는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우드득.
눈을 뜨자마자 적당히 몸을 푼 타이니는 컨디션이 확실히 회복된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장비를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아침 식사랑 필기구 좀 가져다줘. 나머지는 팁.”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손님.”
처음과는 확연히 달라진 종업원의 태도.
그리고 펍에 자리를 잡고 앉은 타이니를 쳐다보는 주변의 눈길 또한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밤새 달린 술꾼들이나 소문을 듣고 발 빠르게 찾아온 이들은 저마다 흥미로운 기색으로 작은 꼬마를 응시했다.
“저 꼬마, 어제 제이슨 일당을 박살을 냈다던데.”
“여기 뒷골목에 검은 머리 꼬마 귀신이 나타났다고 소문이 쫙 퍼졌어.”
“혹시…….”
귓가에 고스란히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무시하며, 타이니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또다시 소정의 목표를 이뤘으니 다시금 계획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손님.”
때마침 종업원이 펜과 종이를 가져다주었고, 타이니는 곧바로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장의 최우선 과제는 첫 번째 재앙을 막는 것.’
첫 번째 성물 후마니타스(Humanitas)가 사라진 카룬의 재앙.
그것이 불과 올해 말이면 벌어질 일이었지만.
- 명심하게. 가능한 한 빨리 나를 찾아오게.
검제가 남긴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건, 최소한 글러터니를 혼자서 때려잡을 만한 실력을 갖추는 게 가장 중요해. 가능하면 마왕도…….’
결국 궁극적인 목표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공작가에 들르는 것은,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다.
공작이 무슨 수를 써서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 딸아이의 태명은 라일라. 나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 이름에서 따왔다네.
- 그런데 사실, 나는 그 꽃을 별로 안 좋아했다네. 이게 핵심이야. 절대 잊지 말게.
그런 말을 남긴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지금의 그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해 줄 수 있는 거라. 내 재능이 아깝다고 했다면…….’
아마 자신을 전보다 훨씬 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뜻일 터였다.
사실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가능성 하나가 있었다.
입 밖으로 내면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어 차마 말하기도 조심스러운 ‘그것’.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아니, 그 비슷한 것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공작가에 가야 했다.
‘만약 내가 기대한 그것이 아니라면 바로 카룬으로 가면 돼. 그래도 늦지 않아.’
설령 검제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공작가로 가는 것이 마냥 나쁜 선택은 아니다.
앞으로 벌어질 재앙들에 대해 검제에게 이야기하면 그도 무언가 조치를 취할 테니, 적어도 무작정 카룬으로 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니.
‘기록해 놓자.’
슥슥.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앞으로 벌어질 재앙들의 큰 맥락.
그것을 양피지에 써 내려가고 있는데, 그 모습마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모양이었다.
“글도 아는가 본데?”
“갑옷 봐. 어디 귀족가 도련님이겠지.”
“야,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귀족이 어딨어!”
“어? 난 들어 본 적 있는데? 뭐더라……?”
뜻밖의 이야기에 타이니도 순간 귀를 기울이던 그때.
덜컹.
“이보게들, 지금 저 꼬마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뭐?”
“왜? 무슨 일 있어?”
여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누군가가 귀가 번쩍 뜨일 만한 얘길 꺼냈다.
“발렌티아 공녀님이 오늘 외성 순찰을 나오신대.”
“엥? 갑자기?”
“그 발렌티아의 천사?”
‘뭐라?’
양피지만 쳐다보고 있던 타이니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