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영주의 죽음
다음 날.
필레스의 영주관이 뒤집혔다.
그 시작은 평소처럼 영주를 깨우러 들어간 시종의 비명이었다.
“꺄아아아악!”
그리고 그 비명의 이유는 영주관에 거하는 모든 이들에게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여, 영주님이!”
- 돌아가셨다!
영주관에 한바탕 소란이 일고, 채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모든 기사가 소집되었다.
발목이 으스러져 아직 거동하지 못하는 그랜트와 어쩐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 단장, 크란을 제외한 10명의 기사.
그들이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죽은 지 수십 일은 지난 것처럼 반쯤 썩어 버린 영주의 시체와, 그 심장 부근에 박힌 익숙한 문양의 검 한 자루였다.
시체의 상태도, 검의 정체도 기사들을 혼란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
“이, 이게 대체……?!”
“시체가 저렇게 된다는 건…… 분명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데.”
“……흑마법사가 죽을 때 벌어지는 일이야.”
“말도 안 돼!”
아무리 작은 영지라도 제국의 귀족이 흑마법사라니?
그게 사실이라면 영주가 죽은 것보다 더 큰 문제였다.
더구나 그 심장에 꽂힌 검은 모두가 그 주인을 알고 있었다.
“저 검, 저건 크란 경의…….”
“설마 단장이?”
“에이, 말도 안 되지.”
단장까지 포함해도 고작 열두 명에 불과한 작은 기사단.
그들 중 단장이 평소 영주와 얼마나 가까운 관계였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지만, 걸리는 점이 있었다.
“사실…… 요 며칠 좀 불편해 보이기는 했지.”
대머리 기사 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동료들을 바라보자, 그 옆에서 그렌이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단장이 불쾌해하기는 했어. 그 꼬마 때문에. 며칠이나 됐다고 차기 단장이니 뭐니 하는 소리가 나왔으니까.”
“하지만, 고작 그거 가지고 단장이 영주님을 암살해? 말이 되냐?”
“그래, 미치지 않고서야…….”
“말이 안 돼.”
모두가 고개를 저었지만 정작 단장은 계속 나타나지 않았고,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반쯤 썩어 버린 시체와 암담한 현실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사건의 내막을 직접 파헤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일단, 이건 우리 선을 벗어났어. 사제를 불러야 해.”
“그래, 그래야겠지.”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그렌을 보며, 기사들은 시종을 시켜 영지의 신전 사제를 호출했다.
영주가 그 나이를 먹도록 결혼을 하지 않아 부인도 자식도 없는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것은 기사들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남은 기사들의 리더 노릇을 하게 된 그렌이 복잡해진 머리를 감싸며 한숨을 쉬었다.
‘어려서 파혼한 뒤로 여자를 안 믿는다더니, 그냥 흑마법사라서 그랬던 것일까.’
이 세상에 반하는 악마의 힘을 몸에 받아들인 흑마법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후손을 갖지 못한다.
여자를 밝히는 영주가 왜 여태 홀몸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이 흑마법사가 되다니? 고귀한 혈통과 명예를 포기하고, 발각되는 즉시 사형이 확정되는 신세를 감수하면서까지? 대체 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이미 죽어 버린 영주에게서 답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
영주의 죽음도, 단장의 부재도 지금은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도착한 노사제는 그 혼란에 방점을 찍었다.
“……마, 마기가 맞습니다! 이, 이런 일이. 교, 교구에 바로 보고해야겠습니다.”
필레스의 노사제, 그리엄이 충격적인 말을 남기고 사라지자 기사들의 표정이 일제히 일그러졌다.
“역시…….”
“으으으.”
“젠장!”
“어찌 이런 일이……!”
후계자도 없는 영지의 주인이 갑작스레 죽었다.
심지어 죽은 영주는 흑마법사, 범인으로 추정되는 건 사라진 기사단장인 상황.
아무리 생각이 없는 이라도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 파장이 어마어마하리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렌, 이제 어쩌지?”
“하아, 젠장. 황실에서 조사단을 보내겠지. 그리고 그들이 결정하겠지.”
“우리는?”
“언제가 되었건 찾아올 새 영주를 얌전히 기다리든가, 이 영지를 떠나 새 로드를 찾든가 해야지.”
그 말에 다른 기사들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여기 있는 기사들은 빈말로도 실력이 좋다는 말을 듣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다른 남작가의 차남이었던 그렌만 해도 가문의 하급 마나연공법을 익힌 후 그나마 마나에 재능을 보여 간신히 기사의 자격을 터득한 수준이었고, 다른 이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 중 가장 어린 기사도 이미 서른을 넘었으니, 그들이 다른 영지에 간다 한들 지금보다 나은 대접을 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지금보다 나아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자유 기사나 해야 하나.”
“이 나이 먹고 용병 짓을 한다고?”
“아니, 일단 기다려 보자고. 새 영주가 기사들을 안 데리고 올 수도 있잖아? 신흥 귀족일 확률이 높은데.”
새 영주에게 고용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긍정적인 가능성이었다.
“그래, 그렇지.”
람의 기대 섞인 말에 기사들의 눈빛이 일변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앞으로의 입지를 위해서라도.
“적어도 이 사건의 인과 관계는 확실히 파악해 놔야 해.”
그렌의 말에 다른 기사들 역시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가 흑마법사였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로드가 죽은 상황에서 마냥 손을 놓고 있던 무능력한 기사들을 중용할 귀족은 없을 테니까.
조사를 시작하니, 다행히도 사라진 단장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목격담이 많았다.
“무구 창고에서 누군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 가 봤더니, 꽤 크게 다친 타이니 님이 단장님께 사과를 하고 계셨습니다.”
시종들의 목격담은 대동소이했고, 자연스레 기사들은 최근 영지에서 가장 화제였던 소년을 소환하게 되었다.
영주의 죽음에 크게 놀란 듯 낙담한 표정이던 미래의 예비 기사단장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푹푹 쉬어 가며 증언했다.
“영주님께서 무구를 하사하셨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단장님께서 다짜고짜 저를 폭행하셨습니다. 물론 무구는 못 받았구요.”
멍든 눈을 보여 주는 소년의 태도는 소문보다 훨씬 겸손해 보였다.
그렌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다시 물었다.
“기사 창고는 이미 조사했다. 확실히 난잡한 흔적은 있었지만, 단장은 분명 그 자리를 떠났어. 그 후로는 만난 적 없느냐?”
“예, 없습니다.”
“정말 없는 거지? 그 외에 특이한 점도 없었고?”
“저를 중용하시려는 영주님에 대해 조금…… 거칠게 불만을 표하시기는 했습니다만, 그 후로 뵌 적은 없습니다.”
단장이 그런 짓까지 저질렀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시종들의 말과도 일치하는 증언이었다.
영주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년이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그렌은 결국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알았다, 가 봐라.”
“저기…….”
“음?”
“그럼 저는 어찌 되는 겁니까? 영주님께서 제 장래를 확실히 보장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에 어린 욕심을 보며, 그렌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뒷골목 출신이라더니.’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당장의 안위만 걱정하는 것을 보니 안타까웠다.
‘빛나는 재능에 비해 생각이 너무 짧아.’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그 나이에 그 실력이면, 어딜 가든 중임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 괜히 죽은 흑마법사와 엮이지 마라.”
“예?”
당황하는 소년을 보며 그렌은 피식 웃었다.
다른 기사들처럼 그 역시도 이 소년의 재능에 질투를 느꼈지만, 적어도 그에겐 이 어린 천재가 제대로 성장한 결과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비록 퇴물이 다 된 신세라 해도, 역사에 남을지 모를 천재의 싹을 틔울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타락한 필레스 영지에서 그나마 ‘덜’ 받아먹고 ‘덜’ 타락한 기사, 그렌의 최후의 양심이 그답지 않은 오지랖을 떨게 했다.
“썩은 물에서 놀아 봤자 네 재능만 썩히는 거라고.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고, 큰물에 가서 놀아 봐라. 이건 인생의 선배로서 하는 충고야.”
“아, 알겠습니다.”
조금 당황한 듯 얼버무리는 소년의 대답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굳이 말을 더하진 않았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한들, 못다 피고 밟힌 꽃들이 어디 한둘일까. 충동적인 오지랖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소년보다 자신을 걱정해야 할 때였다.
“X 됐네, 이거……. 추적 전문 마법사라도 있어야 단장을 찾겠는데…….”
그리고 소년은,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렌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이 영지에 생각이 제대로 박힌 기사가 있었던가?’
타이니는 조금 전 들은 충고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전생의 기억으로는 죄다 썩은 놈들뿐이었는데?
다시 돌아왔을 때, 모조리 아작 낸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물론 그중에 저 얼굴은 없었던 것 같지만 말이다.
영주가 죽은 일을 나서서 수사하는 것을 보니, 기사들 중에서는 나름대로 인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내 기억에는 없지?’
이미 전생의 기억과 달라진 점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이내 그 의문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긴 했다.
어쩌면 썩은 물에서 억지로 버티는 물고기는 저 기사 본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의 기억에 없는 것도, 곧 이 영지를 떠날 사람이라면 이해가 갔다.
‘뭐,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기사단장의 시체는 이미 새벽에 성 밖의 숲속에 갖다 버렸다.
일견 허술해 보이는 처리지만, 절대 찾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당장 이 영지에는 마법사도 없을뿐더러, 뒤늦게 데려온다 해도 사라진 기사단장의 행방보다는 죽은 영주의 정체를 조사하려 할 테니까.
그리고 그때쯤이면 기사단장의 사체는 숲속 짐승들의 배 속에 들어가 있을 터였다.
힉스 영감이 연고 없는 시체를 수도 없이 처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이제는.
‘떠나야지.’
흑마법사가 등장했으니 황실이 나설 터. 황실과 세상의 주목을 끌어 영주의 뒷배, 그 조직이라는 것들의 간섭을 차단하겠다는 목적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문제라면, 그 때문에 공작가의 정예를 기다리는 것 역시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황실이 직접 나서는 이상 ‘고작’ 인신매매나 매춘 문제 따위로 공작가에서 간섭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러니 이제는 직접 공작령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아직 믿을 만한 구석도 남아 있었다.
‘이 반지가 있으니까.’
클로이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타이니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영주 암살 사건의 여파가 가실 줄 모르는 영주관 내에서, 타이니는 조용히 짐을 싸서 방을 나섰다.
물론 몰래 떠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지는 편이 더욱 수상할 테니, 타이니는 괜한 의심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기 위해 떠나기 전 그렌을 찾아갔다.
“떠난다고?”
“예.”
“흠, 상황이 이러니……. 막을 수도 없겠군. 알겠다, 어디로 갈 거냐?”
아무 대답이나 해서 얼버무릴 수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준 기사인 만큼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 역시 그의 신조 중 하나였으니까.
“공작령으로 갈까 합니다. 큰물에서 놀아 보려구요.”
그 말에 그렌은 기특하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내 충고를 따르겠단 거냐? 여러모로 소문과는 다르군. 알겠다.”
글쎄, 그건 아닌데.
굳이 정정해 줄 필요는 없는지라 그저 어색하게 웃는데, 그렌이 작은 주머니 하나를 그에게 던졌다.
탁.
“……?”
“가져가거라. 여비는 될 것이다. 뭐, 어린애라곤 해도 네가 강도 따위에 당할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니 용병패 정도는 발급받아서 가거라. 외모만 보고 괜히 무시하는 놈이 있어도 실력을 증명하면 금방 해결될 거다.”
“……감사합니다.”
“크크, 하나도 감사하지 않아 보이는 표정인데? 되었다. 나중에 성공하면 내 이름이나 기억해 주거라.”
“……기사님 존함이?”
“뭐야! 여태 내 이름도 몰랐다는 거냐? 허허, 정말……, 후. 그래, 뭐 어떠냐. 나는 그렌, 그렌 리버티다. 가문을 나온 뒤로 가운데 성은 쓰지 못하니, 그렌이라고만 알아 두거라.”
“기억해 두겠습니다.”
“이거 영광입니다, 미래의 7대 기사님.”
그렌이 과장된 어조로 허리까지 숙여 보이자, 타이니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현재 이 대륙에서 초인으로 알려진 기사는 7명뿐이니 저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로서는 공교로울 뿐이었다.
“제 이름은 타이니. 그렌 님이야말로 꼭 기억해 두시길 바랍니다.”
그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그렌을 미소 짓게 했다.
“당연하지. 너 같은 괴물 꼬마를 어찌 잊겠느냐?”
“……당신이 지금 여럿 살렸습니다.”
“……뭐?”
“아니, 아닙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타이니는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돌아섰다.
성질 같아서는 영주 밑에서 콩고물을 받아먹었을 게 분명한 가신들이나 나머지 기사들도 모조리 박살 내고 싶었다. 특히나 주도적으로 울프 패거리의 뒤를 봐주던 람을 두고 가는 것은 여전히 찝찝했다.
다만, 전부 구제 불능이라 생각했던 필레스의 기사 중 그래도 사람다운 사람이 한 명은 있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흐뭇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