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연기
우드득.
타이니의 속도와 힘. 모든 것이 그랜트의 상상을 훨씬 넘어섰다.
그랬기에 통증에 대한 반응도 반 박자 늦게 왔다.
“억!?”
발목이 꺾여 나가는 순간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타이니의 머리 위쪽의 공간을 스칠 뿐이었다.
파아앙.
그 주먹에 실린 괴력을 증명하듯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울렸지만, 당연히 상대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타이니는 이미 그의 다른 쪽 발목마저 부러트리고 있었다.
뻐어억.
우드드득.
“끄으윽!!”
화끈한 통증과 그보다 더한 수치심에 그랜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본능적으로 마나를 동원해 부러진 두 발목을 억지로 지탱하며 무너지던 자세를 바로 세운 그랜트.
푸른빛이 넘실거리는 건틀릿이 살살 하겠다던 조금 전의 장담과는 다르게 타이니를 죽일 듯이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연무장의 돌바닥이 움푹 패는 강격.
하지만 순식간에 그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간 타이니의 작은 몸은 이미 그의 등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하!?”
그것을 뒤늦게 인지한 그랜트의 몸이 반쯤 돌아서려는 순간.
휘릭.
이미 타이니의 짧은 팔다리가 그의 굵은 목을 휘어 감고 있었다.
“흡!”
“걱정 마, 죽이진 않을게.”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와는 달리 강력한 힘으로 숨통을 조이는 다리와 목뼈를 옆으로 확 꺾어 버리는 손.
우드득.
‘아, 안 돼!’
목에서 전해지는 아릿한 통증과 함께, 그랜트의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쿵.
눈을 까뒤집은 채 그대로 쓰러지는 기사.
묵직한 갑옷을 두른 육중한 몸이 쓰러지는 소리가 연무장 전체를 울렸다.
탁. 탁.
“기사도 뭐, 별거 아니네.”
그 목 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타이니가 가볍게 손을 털었다.
그 모든 광경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어서, 지켜보던 이들의 반응은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허…….”
“이게 대체…….”
“그랜트 경이……,”
“어린애한테 졌다고?”
당황스런 감탄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들을 들으며, 타이니는 멀리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크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서히 등을 돌리며 관심 없는 척 연기하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타의에 의해 시작된 대련이었지만, 어차피 한 번은 거쳐 가야 할 과정이었다.
‘내가 기사만 못 할 거라 생각했겠지. 경지도 낮은 데다 덩치도 작으니.’
자신이 울프 패거리를 무너트린 것에 다른 방수가 있을 것이라 의심했을 터였다.
자신이라도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패거리를 통해 존재가 알려진 월랑을 소환한 게 아니라 단순한 맨손 박투만으로 기사를 쓰러트림으로써, 그는 그것이 온전히 실력에 의한 것임을 다수의 앞에서 증명했다.
물론 지켜보는 시종들이야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영주가 섣불리 나를 처리하려 하지는 않을 거야.’
타이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열세 살의 아이가 기사를 꺾었다.
소문으로 들었다면 절대 믿지 못할 이야기가 눈앞에서 현실로 펼쳐졌다.
인재를 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천재.
그런 인상을 심어 준다면.
‘나를 더 가까이하려 할 테고.’
그것으로 두 번째 계획은 성공 가능성이 한층 커진다. 그것을 노리고 모험을 걸어 본 게 제대로 먹혀 든 것이다.
그렇다. 모험.
그랜트와의 대련은 보이는 것처럼 간단히 이긴 것은 아니었다.
놈과의 대련이 이토록 일방적으로 끝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로 그랜트가 완벽하게 방심해 준 덕이 있었고, 두 번째로는 애초에 타이니가 초반에 결판을 내기 위해 모든 힘을 한 번에 쏟아 낸 결과였다.
‘그렇기에 방심한 기사의 뼈를 으스러트리고 목을 꺾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타이니의 몸은 순식간에 완벽한 탈진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지금 아무렇지 않은 척 서 있는 것도, 정신력으로 버티며 괜히 허세를 부리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후우우…….”
완벽하게 신체와 일체화된 마나바디가 소비된 마나를 급속도로 빨아들이며 다시 힘을 복구하고 있었다.
이 또한 전생에는 불가능했던 일.
전생의 염체는 육체를 복사한 형태인 만큼 마나를 사용한 육체의 회복에는 탁월함을 보였지만, 마나 자체의 회복력에서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완벽히 일체화된 염체는 육체와 호흡을 같이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자연의 힘인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나는, 바로 다시 소비되며 탈진한 육체에 힘을 불어넣었다.
짧은 시간 안에 다시 아무렇지 않게 걸을 수 있을 정도의 기력이 돌아오는 과정은 그렇기에 의미가 있었다.
모든 힘을 폭발적으로 한 번에 쏟아 낸 것도, 그리고 그것을 빠르게 회복하는 것도 보통의 마나유저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재주.
‘확실히 전생보다 강해질 수 있겠어.’
새삼스레 자신이 창안하고 개량해 낸 비전에 대한 확신을 얻은 타이니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대련의 여파는 다음 날 동이 터 올 무렵에 바로 나타났다.
“영주님께서 아침 식사를 같이하시자고 하셨습니다.”
시종이 전해 온, 권유를 빙자한 통보.
타이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하루 사이에 영주관이 제법 익숙해진 듯 여유롭게 걸어오는 그를 보며, 시종이 짧게 헛기침을 했다.
“……다시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음?”
타이니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시종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어제 혹시 제가 실례한 것이 있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정중함을 넘어선 과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시종이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피식.
“실례한 것 없으니까 안내나 해. 난 응접실이 어딘지도 몰라.”
“예, 예. 감사합니다, 기사님.”
‘기사……라.’
아마도 그렇게 부른 시종 역시 속으로는 지나치다고 생각할 만한 호칭.
그러나 아직은 과분한 그 호칭이, 타이니에겐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전생에, 스무 살이 넘어서야 얻게 되었던 자유 기사의 작위.
빈민가 고아 출신의 거지가 드디어 고개를 쳐들고 살 수 있는 신분을 얻었다는 생각에 얼마나 좋아했었던가.
그때는 누나가 말했던 당당한 삶이라는 꿈이 드디어 이뤄진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시작인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시종이야 그렇게 큰 의미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지만, 그 말은 타이니로 하여금 다시금 각오를 다지게 했다.
‘이제 시작이다.’
짧게 숨을 뱉어 낸 타이니는 지나치게 저자세인 시종을 따라 영주가 기다리는 방으로 향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아, 왔는가. 거기, 그쪽에 앉게.”
긴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싱긋 웃으며 타이니를 맞이한 영주가, 어제와는 전혀 다른 말투로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그 자리에 놓인 의자에는 타이니의 작은 덩치를 감안했는지, 두툼한 방석이 깔려 있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과한 배려에 표정이 어색해진 타이니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 앞으로 잘 구워진 스테이크를 비롯한 수많은 음식이 줄지어 차려지기 시작했다.
“어린 송아지고기로 만든 스테이크일세. 아마 먹어 보지 못한 맛일 걸세. 다른 요리도 많이 준비되어 있으니 마음껏 들게.”
“……아침으로는 좀 과한 것 같습니다만.”
“어제 자기 키만 한 높이의 음식을 먹어 치운 괴력의 소년 기사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려던 타이니의 몸이 움찔했다.
‘괴력의…… 기사라.’
영주가 너스레를 떨며 내뱉은 단어가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쓴웃음을 지은 타이니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운이 좋았을 뿐, 아직은 많이 모자랍니다. 그 기사님이 방심하신 것이 컸죠.”
“아무리 그래도 기사인데 기본 실력이 있지. 그 이야기가 영지 밖으로 퍼져 나간다 한들 누가 믿겠는가? 아니, 당장 외성에 사는 평민들도 안 믿을걸?”
영주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말하는 것을 보며, 타이니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아닙니다. 아직은 많이 배워야 할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래, 그렇기야 하겠지. 제대로 배운다면 더욱 엄청나게 발전할 테니까.”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영주님.”
“하하, 나야 기사들의 재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겠나. 그저 자네가 답답할까 봐 그러지. 이 작은 물에는 자네 같은 천재를 가르칠 만한 스승도 없는데.”
……‘자네’라.
다시금 달라진 호칭에 웃음이 나왔지만, 그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역사에 기록된 기사들은 대다수가 스승을 두지 않고 스스로 성장한 것으로 압니다. 결국 그들을 성장시킨 것은 그 훌륭한 주군이었지요.”
“……역시. 역사도 배운 적 있고, 식사 예법도 배운 티가 나는군. 조금 투박하지만.”
달그락.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영주의 말에 타이니의 나이프가 엉뚱한 접시를 썰었다.
‘쯧.’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어리다는 사실을 자꾸 망각하곤 한다. 이토록 작은 몸을 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당황은 짧았다.
“어깨너머로 배운 기억이 남아 있으니까요. 실제로는 처음이라 좀 어색합니다만.”
사실은 지금 알고 있는 예법들이 전생에서 성인이 되고 난 후에야 배운 것들이라 지금 몸에 어색하기 때문이었지만, 다행히 그 변명은 어느 정도 통한 것 같았다.
“역시 자네가 명문가 출신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단 말이야. 그런데 어쩌다 이곳에 흘러들어 왔을까.”
“……저야 모르는 일입니다만.”
“제국이나 그 주변 왕국에도 검은 머리 검은 눈의 귀족은 거의 없단 말이지. 몰락한 가문까지 포함해도 말이야. 뭐,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 있긴 있다는데 그곳이 바로…….”
영주가 마치 무슨 비밀을 안다는 양 말끝을 흐렸지만, 타이니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애초에 지어낸 신분을 듣고 멋대로 추론한 배경이 궁금할 리가 있겠는가.
“……부모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출신을 알아 무엇 하겠습니까.”
“……그래? 호오, 그래도 뿌리에 대한 관심이 조금은 있을 줄 알았는데?”
“말씀해 주신다면 듣기야 하겠습니다.”
“하하, 뭐 그거야 후일을 기약하도록 하지. 곧 그분이 오시면 나보다 더욱 잘 설명해 주실 테니까. 그분도 어제 자네에 대한 연락을 받으시고는 크게 기뻐하셨단 말이지.”
“예?”
이게 무슨 개소리지?
“뭐, 예상외였어. 아, 좋은 뜻이네. 자네가 큰일을 하나 망치기는 했지만, 자네의 재능과 추정되는 신분의 가치가 그것을 덮고도 남을 정도라고 하시니까.”
……하나는 알아듣겠다.
영주가 그 값비싼 마법 통신을 통해, 누군가에게 자신의 정보를 전했다는 사실 정도만.
그 외에는 죄다 헛소리 같았다.
추정되는 신분이라니?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하하, 궁금한 표정이군. 하지만 내가 먼저 말하면 그분의 기쁨을 방해하는 꼴이 될 테니 참겠네. 다만 하나만 알아 두게. 그분께서 자네와의 만남을 크게 기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헛소리가 점점 더 산으로 가고 있었다.
결국 타이니는 영주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고자 조심스레 물었다.
“……그 일주일, 아니 이제 엿새 후 오신다는 그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그분에 대해 무언가 알아야 할 것이 있을까요?”
“아니, 아니지. 지금은 곤란해. 다만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약속하지. 그러니 그날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게나. 자네가 상상도 못 할 대단한 분이 자네를 만나 중히 쓰고자 하시니까.”
‘대단히 나쁜 일 같은데.’
더더욱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겉으로 내비칠 수는 없었기에 타이니는 딴소리를 뱉어 냈다.
“그리 높게 평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폐를 끼쳤는데……. 영주님의 은혜,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아니야, 아니지. 자네가 말한 공작령의 움직임도 사실로 밝혀졌어. 그러니 자네가 나한테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지. 자자, 이 좋은 날 술이나 한잔하세. 아, 아직 술은 못하나?”
“……원하신다면 마시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몸에도 안 좋은 걸 일찌감치 배울 필요는 없지. 술은 가능한 한 늦게 배우게. 아, 웬만하면 약에는 손도 대지 말고.”
아침부터 독한 위스키를 들이켜며 스테이크라니.
게다가 저 왼손에 든 파이프에서 피어오르는 기묘한 연기는, 한눈에도 보통 담배 같지는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새끼가 3년 후의 그 마약 중독자가 되는 건 맞는 모양이다.
‘악마의 힘으로 만들어진 서클은, 악마가 다시 거둬 갈 수도 있지.’
이런 식생활을 유지하다가 서클이 사라진다면, 체형이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었을 터다.
인베더가 무너진 후 쓸모없어진 놈이 놈의 뒷배한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면 얼추 말은 되는 것 같았다.
‘그분이 누군지, 그 조직이 뭔지 궁금하지만…… 적어도 지금 알아볼 필요는 없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타이니는 속마음과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주와 가까워지겠다는 계획은 지나치리만치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