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준비
“이곳이 앞으로 너…… 타이니 님이 묵게 되실 방입니다.”
시종의 떫은 표정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봐도 거지를 연상시키는 남루한 옷의 꼬마. 거기다 불길하게 느껴지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아무리 영주의 명령이 있었다 한들, 전혀 귀족 같지는 않은 몰골의 타이니를 마냥 웃으며 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방 안에 갈아입으실 옷과 씻으실 물을 준비해 놨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종을 울리시면 됩니다.”
한 번의 실수 후 바로 자세를 제대로 갖춘 시종의 태도는 오히려 칭찬해 줄 만하다 생각했다.
다만.
“밥은?”
“……네?”
“식사는 어떻게 하냐고.”
“아…… 그것은 제가 방 안으로…….”
“그럴 필요는 없어. 기사나 병사들에게 음식 제공하는 곳이 있을 거 아냐? 나는 일단 양만 많으면 돼. 아주 많아야겠지만.”
“아…….”
곧바로 이어진 요구에 시종은 또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 한번 투명하네. 역시 거지새끼답다 이거지?’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데, 그 표정을 오해했는지 시종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
명목상으로나마 영주의 손님이 되었으니 시종들에게 하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굳이 꼬투리를 잡아 괴롭힐 생각은 없다.
그런 마음이 전해졌을까. 시종이 곧바로 표정을 펴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기사님들의 식당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영주관을 오른쪽으로 돌아 나가시면…….”
시종의 말을 기억해 두며 방 안으로 들어서자, 이내 한숨이 나왔다.
“일주일…….”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
엠마를 비롯해 그나마 고마운 마음이 있던 이들은 이미 필레스를 떠났다. 더 이상 이곳 사람들에 대한 미련도 없으니, 작정하고 튄다면 영주나 기사들의 추격을 완벽하게 따돌릴 자신도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예상되는 부작용이 너무 컸다.
‘일단 영주는 날 영지민 살해범으로 수배할 테고, 그런 사실이 만약 공작가에도 들어가면…….’
공작을 만나는 데 엄청난 지장이 생길 것이다. 클로이의 반지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마왕과 군단장들의 골통을 때려 부수겠다는 장대한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진다.
- ……내가 자네의 그 재능을 제대로 살려 주겠네.
‘공작이 뭘 준비했는지는 모르지만, 허튼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야. 분명 나에게 도움이 될 무언가가 있다는 거겠지.’
그러니 공작을 만나는 데에 문제가 생길 일은 피해야 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쯧…….”
도망이라니.
“……생각만 해도 짜증 나는군.”
전투에 돌입하기 앞서서 거짓으로 기만하는 것은 전략으로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힘이 부족하다고 해서 일단 도망부터 생각하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당장 힘이 부족해도, 어떻게든 이길 방법을 찾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타이니에게는 두 번째 방법이 남아 있었다.
조금…… 아니, 많이 위험하지만 그만큼 확실하기도 한 방법이.
‘일주일 후에 방문하실 ‘귀한 분’. 그자의 방문이 과연 공식적일까?’
아닐 것이다.
남작이 설설 길 정도의 제국 고위 귀족, 혹은 그에 준하는 신분의 사람이 방문한다면, ‘고작’ 일주일 전의 영주관이 이렇게 한산할 리 없다.
그 말인즉 대놓고 환대하지 못하는 방문, 비공식적인 방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영주의 상태를 감안하면, 그 ‘귀한 분’이 밖에 떳떳이 고개를 쳐들고 다닐 신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오기 전에 필레스에 난리가 터져 세간의 이목이 모이는 상황이 된다면, 그 뒷배가 방문하는 일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어느새 타이니의 뇌리에는 그 난리를 일으킬 가장 확실한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단 능력을 키워야겠지.”
결연한 미소를 지은 그는 너른 방 안을 둘러보며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아닌, 무투파 마나유저들은 성장하는 데 있어 보통 크게 세 번의 벽을 만난다고 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2단계에서 3단계로 넘어가는 벽.
자신의 신체를 넘어 무기나 장비에도 마나를 부여해서 획기적으로 강도를 높이는 2단계에서, 아예 ‘속성’까지 부여할 수 있게 되는 3단계로 넘어갈 때 벽을 맞닥뜨리는 것이다.
3단계에 이른 기사 중 수준이 높은 이들은 불꽃의 기사라느니 얼음의 기사라느니 하는 이명도 붙기 시작할 정도니, 그 경지에 이른 기사들은 따로 익스퍼트(Expert)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정도 수준이라면, 유명 기사단의 평기사나 웬만한 귀족가의 수위 기사급은 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익힌 비전의 한계나 재능의 문제로 평생 그 벽을 넘지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니, 이 구석진 영지의 기사단장이라는 크란 역시 2단계의 극에 달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타락해 버린 걸지도 모르지.’
뭐, 남의 사정이야 알 바 아니고, 지금은 자신의 성장에 집중할 때다.
벽이라 칭하는 구간이 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구간의 성장은 쉽다는 뜻이기도 했다.
특히나 전생의 경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타이니에게는 더욱.
그러니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라도.
‘일주일 안에 2단계에 오른다.’
그 각오를 담아 격렬히 움직이는 몸에서는 연신 우드득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남들이 알았다면 말도 안 된다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우웅.
지금도 몸 안에 맥동하는 마나의 힘, 염체(念體)의 비전은 이미 1단계의 완숙에 이르러 그다음 경지에 도달할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기초를 바로잡으면서 발견한 생각지도 못한 이점 덕분이었다.
‘잘 먹기만 해도 염체가 성장한다.’
마나와 육체가 완벽하게 하나가 된 마나바디(Mana body)는 육체가 영양분을 공급받을 때마다 같이 성장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신체가 다 자랄 때까지만 가능할지, 아니면 그 후로도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창 자랄 나이인 지금 그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놀라운 발견이었다.
전설에 나오는 영약(靈藥)이나, 유명한 무가나 귀족 집안에만 있다는 비약(秘藥)을 먹지 않고도 폭발적인 마나의 성장을 보장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물론 평소와는 차원이 다르게 많은 양을 먹기야 해야겠지만.’
그 대가를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투자였다.
그리고 2단계에 오르기만 한다면…….
‘영주건 크란이건 쉽게 제압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생각이었다. 같은 경지 안에서도 수준의 차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갓 2단계에 오른 마나유저가 같은 단계의 극에 이른 이를 꺾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개량된 염체의 비전을 익힌 지금의 그는 보통의 마나유저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비전을 얘기하면서 굳이 수준을 논하자면, 개량 전에도 초일류 수준이었던 염체의 비전이 이제는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심지어 그 창시자조차도 한계를 알 수 없을 정도였으니.
‘두고 보자.’
살벌한 미소를 머금은 타이니의 움직임을 따라,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필레스의 내성 안쪽, 기사들의 연무장이 붙어 있는 식당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병사나 기사들의 일과가 대부분 끝나 가는 시각.
평소라면 한산한 그곳에 모여든 인파는, 하나같이 질린 눈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음식을 자신의 키만큼 쌓아 놓은 채 먹고 있는 한 소년을.
소년의 앞에 쌓인 음식들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믿기 힘든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와구와구.
와그작, 와그작.
깨끗하게 세탁된 고급 의복 여기저기에 음식이 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전투적으로 거행되는 식사는, 멀리서 지켜보는 시종들의 입에서 탄식을 이끌어 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걸신이 들렸나.”
“저 몸으로, 저만한 양을 먹는다는 게 말이 돼?”
“드워프 혼혈 아냐? 걔네도 오크만큼 많이 먹는다고 들었는데.”
“에이, 그래도 저건 아니지.”
“사람이 맞긴 한 건가…….”
무례하다면 무례한 웅성거림에 누구나 동조할 만한 기괴한 광경.
하지만 그 당사자는 그저 정신없이 음식을 흡입할 뿐이었다.
‘이 몸으로는 귀족가의 식사가 처음이라 그런가. 이상할 정도로 맛있군.’
게다가 한창 클 나이라서 그런지, 뭐든 집어넣는 대로 쑥쑥 들어갔다.
성장을 위한 과정이 즐겁기까지 한 순간, 싫을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우웅.
스스스.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과정.
열심히 씹어 삼킨 음식들이 실시간으로 분해되며 에너지와 마나로 화하는 것 또한 생생히 느껴지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즐거움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너구나, 싸가지 밥 말아 먹었다는 거지 꼬마가.”
“음?”
즐거운 순간을 방해받은 타이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그를 향해 다가오는 거한이 있었다.
입고 있는 하프 플레이트 메일을 보니 일반 병사는 아닌 것 같았고, 은근히 마나의 향도 느껴졌다.
‘기사라…….’
느껴지는 기세는 2단계의 초입 언저리. 기사의 자격을 갓 획득했을 만한 수준.
전생의 기억에도 없는 엄연한 초면이었지만, 다짜고짜 시비를 거는 상대에게 말이 좋게 나올 리 없었다.
“……뭐지?”
“뭐냐고? 하, 꼬마야. 어른을 봤으면 일단 예의를 갖춰 인사부터 해야 하지 않겠냐? 아무리 배운 게 없고 음식에 정신 팔린 거지새끼라도?”
느닷없는 도발이었지만, 타이니는 피식 웃으며 태연하게 맞섰다.
“어린애한테 시비 거는 얼간이가 예의 운운하는 거냐?”
그런 막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걸까.
“……뭐라?”
기사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진 듯,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타이니는, 그 순간을 노려 오히려 한술 더 떴다.
“날 웃기고 싶은 건지, 시비를 걸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하나만 하지 그래, 덩어리?”
“이…… 거지새끼가 정말 간이 부었구나!!”
기사의 고함이 식당 안을 쩌렁쩌렁 울리자, 파랗게 질린 시종들이 순식간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괜히 곁에 있다 불똥을 맞을까 우려한 것이다.
그런 그들 너머로, 멀리서 흘깃 이쪽을 바라보는 크란의 모습이 보였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수작. 타이니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앞장서.”
“하, 어린 놈의 새끼가 버르장머리 없……!”
“내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작은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푸른 머리 거한의 갈색 눈을 담담히 바라보자, 정작 시비를 건 쪽이 순간 주춤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추태를 깨달았는지, 그의 안색이 돌처럼 굳어졌다.
“……건방 떤 만큼 실력도 있어야 할 거다, 애송아.”
뒤늦게나마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돌아서는 기사.
타이니가 하수라고 확신하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정작 타이니의 시선은 멀찍이서 이 소란을 못 본 척하고 있는 장년의 기사를 향해 있었다.
‘똑똑히 봐 두라고.’
사실, 살기에 찬 웃음이 목표로 하는 이는 그 장년의 기사도 아니었다.
아마도 이 사태에 가장 먼저 관여했을 게 뻔한, 영주관 깊숙한 곳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붉은 머리 중년인.
영주를 향한 살기를 감추며 타이니는 조용히 기사의 뒤를 따랐다.
푸른 머리 기사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식당 바로 옆, 기사들의 연무장이었다.
내성 안쪽, 여기저기 바닥이 파여 있는 드넓은 마당.
돌바닥과 거치대 곳곳에 걸려 있는 날이 뭉툭한 철검이나 목검들.
그리고 연무장 가운데에서 마주 보고 선 기사와 꼬마.
그 광경을 대놓고, 혹은 몰래 지켜보는 수많은 시선 속에서 푸른 머리 기사가 타이니를 향해 오른손을 까닥였다.
“실력을 보여 주겠다 했지? 덤벼 봐라. 이 그랜트 님이 제대로 주제 파악을 하게 해 주마.”
그 여유 넘치는 태도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며, 타이니가 피식 웃었다.
“……검 안 들어?”
“푸하하, 뒷골목 깡패 새끼들 좀 처리했다고 기사를 우습게 보는 거냐? 네놈은 맨손으로도 충분하다.”
“후회할 텐데?”
“후회는 네놈이 하게 되겠지. 갑옷이야 네 콩알만 한 몸에 맞는 게 없어서 못 입는다 치고, 최소한 검이라도 들고 덤비는 게 어떠냐? 아! 검술을 배워 본 적이 없겠구나? 그럼 그냥 올래? 살살 해 줄게.”
쓸데없이 혓바닥만 긴 기사가 여전히 오만한 자세로 웃으며 손을 까닥이는 것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뭐, 본인이 그렇게까지 한다는데야.
“그럼…….”
탓.
“기꺼이.”
뻐어억!
그 말의 울림이 끝나기도 전에, 번개같이 쇄도한 타이니의 다리가 덩치 큰 기사의 발목을 사정없이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