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괴리
티몬 폰 필레스.
멀끔한 인상과는 다르게 욕심만 가득한 무능한 귀족.
그것이 전생의 타이니가 그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필레스의 주인에게 가진 인상이었다.
실제로 후에 실력과 명성을 얻은 뒤 ‘징벌’을 위해 돌아왔을 때, 이놈은 살이 뒤룩뒤룩 찐 채로 술과 여자를 탐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동공이 풀려 초점 없는 눈동자와 시커먼 안색, 그 전형적인 마약 중독자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야말로 타락하고 망가진 귀족의 전형을 보여 주었던 놈이었는데…….
‘지금은…… 왜?’
놈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전생과의 괴리감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지는데.
- 크르르.
영혼으로 전해져 오는 월랑의 경계심이 타이니에게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영혼의 냄새를 맡는 월랑의 힘. 그 능력이 일부 전이되며, 지금 그의 수준으로는 알 수 없어야 할 영주의 비밀이 눈앞에 선명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심장에 새겨진 두 개의 ‘고리(Circle)’.
놀랍게도 그 근본이 되는 힘은 마나가 아니었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불쾌한 느낌의 진득한 검은 기운. 악마의 힘, 마기(魔氣).
그 사실이 혼란을 더욱 키웠다.
‘이 새끼가 흑마법사라고? 그럴 리가?’
그랬다면 전생의 자신이 몰랐을 리 없다.
설마 그때는 사람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끝도 없이 이어지던 상념은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깨어졌다.
“왜 대답이 없지?”
한층 가늘어진 영주의 눈을 보며 타이니는 일단 멍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를 못 했나 본데, 울프가 가지고 있던 이런 모양의 돌에서 얻은 정령이 아니냐는 말이다.”
“아…….”
거의 확신하고 있는 눈빛. 더 핑계를 대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다만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그 돌! 울프 놈 품속에서 비슷한 돌을 만지기는 했는데, 설마 거기서 정령이 태어난 겁니까?”
타이니는 일부러 고개를 갸웃하며 빈민가 출신다운 무식함을 연출해 주었다.
그러자 영주가 이를 악물더니, 뒤에 서 있던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크란!”
“예, 로드.”
스릉.
사전에 약속된 바가 있는지 영주의 고갯짓 한 번에 기사의 검이 뽑혀 나왔다.
‘이건 또 뭐…….’
살기야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전의 대화부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가만히 목을 내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 크르르.
월랑이 영체가 아닌 작은 실체로 화해 나타나고, 타이니도 전신에 마나를 끌어 올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정말……, 정말 숲의 주인이군. 빌어먹을! 그 쓰레기 자식, 대체 간수를 어떻게…….”
영주가 분통을 터트리는 것을 보니,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일이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그 전에……”
이내 한숨을 내쉰 영주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크란, 이 녀석 수준은?”
“1단계……인데, 마나 통제 능력이 지나치게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그게 어느 정도라는 거야?”
“한 발만 더 내디디면 2단계에 올라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벌써 기사 수준이라고?”
“아직은 아니지만……. 큼. 예, 어린 만큼 금세 기사 수준은 될 거 같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로군.”
“예. 태어날 때부터 강제로 마나를 수련해 온 명문가의 자손이 아니라면…… 천재겠지요.”
“그래?”
“하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마나가 한 가닥도 새어 나오지 않는 데다가 패턴도 완벽하게 안정되어 있습니다. 절대 마나를 깨우쳐서 막 다루는 수준이 아닙니다. 제대로 배운 겁니다.”
타이니를 바라보는 크란의 시선에는 뚜렷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눈앞에 있는 타이니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뜻을 아는 영주의 눈도 다시 서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명문가라니, 우습지도 않은 얘기고……. 저 나이에 자기만의 비전을 만든 달인일 리야 더욱 없고…….”
서슬 퍼런 시선이 다시 타이니를 향했다.
“그렇군. 꼬마야, 대답을 해야겠지?”
영주의 말투에 섞인 살기를 따라, 크란의 손이 다시 검을 잡았다.
하지만.
“그게…… 흠.”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일 뿐, 그 얼굴에 심각함은 없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질문이었으니까.
마나연공법, 마력회로.
마법사가 아닌 마나유저가 마나를 쌓고 이용할 수 있는 두 가지의 방법.
전자는 마나를 신체의 일부분, 주로 심장 같은 중심 기관에 모아서 신체를 강화하고 마나의 범용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후자는 온몸에 특정한 패턴으로 마나가 흐르게 만들어 신체를 강화하는 것까지는 똑같지만, 그 패턴이 범용성보다는 목적성과 특이성을 높이는 데에 치중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모두, 유명한 무가(武家)나 귀족가, 혹은 기사나 용병 집단에서 보물처럼 조심스레 전승되는 비전(祕傳)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무력이 곧 능력으로 여겨지는 집단에서는, 그 집단의 정체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즉, 영주는 타이니에게 다른 귀족이나 그에 준하는 세력에 속해 있냐고 물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럴 만하지.’
그가 열세 살의 나이에 그 자신에게 맞는 비전을 개발한 천재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합리적일 추측일 테니까.
그랬기에 타이니는 그 추측에 장단을 맞춰 줄 수 있는 변명을 준비했다.
“필레스에 흘러들어 오기 전, 죽은 부모로부터 배운 겁니다.”
“뭐?”
“젖먹이 시절부터 무의식적으로 해 온 호흡법이 있는데, 최근에 갑자기 힘이 강해지면서 그게 특별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게 무슨……?”
영주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타이니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전생에 그의 성정을 표현하는 두 개의 상반된 소문이 있었다.
괴력의 기사는 자신이 한 약속을 목숨 걸고 지킨다.
괴력의 기사는 거짓을 일삼는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렸지만, 사실은 둘 모두가 진실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문은 이렇게 수정되는 것이 옳았다.
괴력의 기사는 사람과의 약속은 목숨을 걸고 지키지만, 사람이 아닌 자에게 한 말에는 어떤 가치도 두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이 오직 자신의 주관이기 때문에 그의 신념을 비난하는 사람도 꽤 많았지만, 적어도 그가 살아온 인생이 ‘기사(Knight)’라는 고결한 이명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은 대다수가 납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부끄러움이 없고, 그렇기에 거짓을 말함에도 당당했다.
그러니 그의 표정을 보고 그 말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뭐, 일부는 사실이기도 하고.’
원래 그가 유민 출신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
더구나 필레스 영지에선 인베더의 수입원을 늘리고 싶어 한 영주와 울프 패거리로 인해 십여 년 전부터 막무가내로 유민을 받아들였으니, 유민들의 신분을 추적할 만한 정보도 전혀 없을 터였다.
물론 그럼에도 의심은 하겠지만.
“……나보고 그것을 믿으라는 말이냐?”
“제가 이렇게 영주님의 눈앞에 있다는 것이 그 증거 아니겠습니까?”
“뭐? 아…….”
회귀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상, 지금의 타이니는 그 누가 봐도 불세출의 천재였다.
불과 열세 살의 나이에 완숙한 1단계 마나유저가 되었다는 것은 전생의 수준과도 격을 달리하는 것.
달리 말해 빈민가 출신이라는 꼬리표 따위 문제도 되지 않을 재능이다. 누군가가 나서서 신분 세탁을 해 준대도 이상하지 않을 인재라는 것이다.
그런 인재가 영주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도 도망가지 않고 영지에 남았다.
그리고 순순히 만나러 왔다.
‘뭐, 사라졌다 해도 추적했겠지만.’
실제로는 그가 인연을 맺은 이들을 보호하고 영주를 박살 내는 데에 목적이 있었지만, 그 사실을 상상조차 못 할 영주로서는 타이니의 그 한마디가 확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크란이 자리를 비운 며칠 사이 일어난 문제를 수습할 방법을 생각해 보아도, 눈앞에 있는 이 녀석밖에는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그러니.
“흐……, 좋다. 일단은 믿어 보지.”
“로드! 그렇게 쉽게…….”
“크란, 내가 결정한 일이다.”
“……예, 죄송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귀족가에서 굳이 우리 영지에 첩자를 파견할 이유는 없지.”
그 단언에 크란이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는 듯 움찔했지만, 영주의 싸늘한 시선은 더 이상 그가 입을 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다시 타이니에게 닿았을 때,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래, 내 숨은 칼이 되고 싶다고?”
“음……. 보이는 칼이 될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영주와 기사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완벽하게 파악한 듯 다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모습.
야심 있어 보이는 그 모습은 영주의 입가에 작은 미소를 만들었다.
“좋다, 한동안 영주관에서 지내도록. 빈객으로 대우하지.”
“예? 제가요?”
“너는 모르겠지만, 네가 울프를 처리한 덕에 큰일이 틀어졌다. 나도 변명거리는 있어야겠지.”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어조.
타이니는 그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단서 두 개를 놓치지 않았다.
큰일이 틀어졌다?
변명거리?
큰일이 틀어졌다는 건, 아마도 자신이 울프 패거리를 정리한 무언가 차질이 생겼다는 말 같은데…….
‘영주가 변명해야 할 상대가 있다? 설마 울프가 말한 ‘조직’이라는 게 정말 있었다고?’
그럼 왜 전생에는 보이지 않았을까?
새삼 3년의 간격이 만들어 낸 차이가 다시 가슴에 와닿았다.
게다가 아직도 월랑의 감각을 통해 뚜렷이 보이는 검은 서클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렇게 엮이는 건 곤란하지.’
아직은 자신이 너무 약했다.
당장 눈앞의 영주와 기사단장 크란 중 한 명을 상대한대도, 목숨을 걸어서 간신히 처리할 수 있을까 싶은 수준.
성장할 시간이 필요한 이 시기에 조직인지 뭔지도 모를 영주의 뒷배와 얽히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흑마법사 집단이라면 다 때려죽여야 할 놈들이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가 죽을 확률이 높아.’
지금의 이 촌극도 발렌티아 공작가나 그 직속 가신의 정예들이 영주를 징벌하러 찾아올 때까지만 이어 가면 된다.
그들을 만나 제보자를 자처하고, 가능하면 그 공으로 곧바로 공작을 만나는 길을 여는 것이 당장의 최우선 목표였다.
공녀의 반지가 있긴 하지만 공작을 만날 방법이야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하지만 이내 다른 생각도 들었다.
‘아니, 아니지. 공작가의 정예가 영주의 뒷배도 같이 처리해 주면, 그거야말로 일거양득 아닌가?’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따라 바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명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주관에 얼마나 머물러야 할까요?”
“훗, 그게 왜 궁금한 게냐? 네놈이 평생 겪어 본 적 없는 호강일 텐데?”
“익숙하지 않은 곳은 불편합니다. 게다가 영주님께서도 아직은 제가 미덥지 못하실 텐데요?”
믿어 보겠다던 영주의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발언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영주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자리 잡게 했다.
“그래, 그렇지. 그러니 더 곁에 두겠다는 것이다. 일주일만 지켜보마.”
일주일 동안 곁에 두겠다고?
그게 정말 자신의 속내를 확인해 보려는 의도라면 안심할 수 있겠지만…….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영주관에서 제가 태도를 조심히 해야 할 분들이 따로 계실는지요?”
혹시 네 뒷배도 지금 영주관에 있는 거냐.
……라는 뜻을 에둘러 물어본 것이었는데, 영주의 답변은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허, 고놈. 보면 볼수록 신기하구나. 분명히 어디선가 예법을 배운 것 같은데.”
“……철저히 예습해 왔을 뿐입니다.”
뜨끔한 마음에 바로 변명이 나오는데.
“뭐, 아무래도 좋다. 확실한 것은 그분께서 판단하실 테니.”
……그분?
왜인지 불길한 예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여기 크란 경이 기사들의 이름을 알려 줄 테니, 그들만 주의하면 된다. 아, 그리고 일주일 후 귀한 손님이 오실 예정이다. 그분께는 특별히 나 이상으로 예의를 갖춰야 할 것이다.”
……X발, 아무래도 영주의 뒷배가 일주일 뒤에 이곳에 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공작령과 이곳의 거리를 생각할 때, 자신의 제보는 지금으로부터 며칠 뒤에나 공작령에 도착할 것이다.
‘최상의 상황을 가정해도…….’
공작령에서 증거 장부를 검토하고 진위가 판명 나는 데 적어도 사흘. 그후 징벌 부대가 결성되는 데도 사흘.
거기에 그들이 필레스로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족히 열흘은 잡아야 할 테니.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보름은 더 있어야 해.’
그런데 그 전에 영주의 뒷배가 그를 만나러 온다.
……계획의 변경이 불가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