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정리 (3)
필레스 영지는 발렌티아의 공작령의 변방이었다.
하지만 드넓은 제국의 영토에서 보자면 중부에 자리한 소도시였고, 공작령의 중심인 대도시 발렌티노나 황실 직할령으로 향하는 상인들이 쉬어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작은 영지치고는 술과 여자를 파는 환락가가 지나치게 발달했으며, 심지어는 영지민들이 농사를 지어 바치는 것보다 환락가의 세수가 더 많을 정도였다. 거기에서 나오는 뒷돈들을 제외하고서라도 말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환락가와는 전혀 무관한 농민들이나 무지렁이들도 ‘인베더’가 돈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아가, 영주가 타이니의 영업 중지 선언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도.
“……귀족을 기만하는 것은 큰 죄야, 타이니.”
엠마가 이리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타이니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맞아. 귀족을 기만하는 것은 큰 죄지.”
“……?”
“그럼 필레스의 영주가 주군인 발렌티아 공작을 기만하는 것은 무슨 죄가 될까?”
“뭐?”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한 표정의 엠마를 보며 타이니는 그냥 웃었다.
엠마가 유별나게 무식한 것이 아니었다. 전생의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땐 귀족이면 다 똑같은 줄 알았지. 그래서 이 장부를 보면서도 별생각 못 했던 거고.’
그래서 전생에는 울프의 재산을 절반이나 영주에게 바치고도 자신과 엠마를 비롯해 친분이 있던 몇몇을 인베더에서 빼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것 역시 인베더가 몰락해 가고 있던 당시의 특수한 상황 덕분에 가능한 일.
물론 후일 필레스로 돌아와 제대로 된 대가를 받아 내기는 했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풀지 못한 한을 간직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렇게 확실한 방법이 있었는데.’
괴력의 기사 시절, 그는 빈말이라도 지혜롭다는 평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 위치에서 보고 들은 경험들은 밑바닥에서 구르던 때의 경험과는 밀도부터 달랐다.
특별히 비상한 머리가 없더라도, 보는 시야가 자연히 바뀔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러니 비록 둔한 머리로 세운 계획이라도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대체 어쩌려고?”
“당장 이해할 필요는 없어, 엠마.”
“그래도…….”
“지금은 네 미래나 생각해. 같이 움직일 사람들이 있다면 더 서두르고. 인베더를 벗어난다고 해서 계속 이 영지에서 살 건 아니잖아?”
“……그렇지.”
새 삶을 시작하려고 해도 이미 이곳에서는 몸 파는 여자로 낙인이 찍혀 있다. 엠마를 비롯한 여자들은 아마도 대다수가 다른 영지로 떠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록 필레스가 소도시긴 해도 제국 중부에 있는 만큼 영지 바깥에 도적이나 몬스터가 드물다는 점이었다.
물론 상인이나 용병, 기사가 아닌 평민들은 영지 밖을 나서는 데도 허가가 필요했지만.
“적당히 찔러 주면 경비원들도 영지를 나가는 것쯤은 눈감아 줄 거야. 나가면 무조건 같이 뭉쳐서 움직여. 신용 있는 용병을 고용해서 다이엔으로 가는 것을 추천하지.”
“……뭐?”
“용병 길드를 통해 소개받으면 용병이 강도가 되는 일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수고비를 좀 더 얹어 주면 정착까지 도와줄 수도 있을 거고.”
“너, 넌 어떻게……?”
“……동냥하면서 주워들은 거지.”
오지랖이 과했을까.
놀라는 표정의 엠마를 보니 아차 싶어, 타이니는 되는대로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런데 엠마의 의문은 그 뜻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 아니. 타이니!”
“왜?”
“그럼 너는? 너는 어쩔 건데!?”
“음? 아, 나는 따로 갈 곳이 있어.”
“……우리만 가라고?”
저 애처로운 표정에 담긴 마음은 무엇일까.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나에 대한 염려와 걱정.
“하…….”
지금 누가 누구를…….
“너도 같이 가야지! 네가 다 클 때까지 내가 돌봐 줄게. 에리나 대신, 멋지게 살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왜?
다급하게 말을 잇는 엠마의 목소리가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 색도, 눈동자 색도, 하다못해 이목구비도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데.
왜 엠마의 얼굴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누나의 얼굴이 보이는 걸까.
울컥할 것 같은 마음에 타이니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난 할 일이 남았다니까.”
“타이니…….”
“잔말 말고 어서 떠나, 엠마. 돈을 나눠 줘도 남겠다는 이들이 있을 텐데, 괜히 그런 사람까지 챙기려 들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여지를 두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목소리.
그에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엠마도 결국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시선이 걱정스레 이곳을 바라보는 동료들에게로 옮겨 갔다.
정확히는, 그들의 발밑에 있는 울프의 시신으로.
“그래, 네가 이 정도로 강하다면 분명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겠지. 네 말대로 할게. 다이엔으로 갈 테니까, 혹시 힘들면 날 찾아와. 알겠지?”
……정말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지.
내 걱정은 말고 새 인생 계획이나 잘 세우라고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자꾸만 누나의 모습이 겹쳐져 그냥 천장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작은 한숨과 함께 하고픈 말을 토해 낼 수 있었다.
“……다 챙기면 말해. 같이 내려가게. 나는 아직 정리해야 할 것이 남았으니.”
* * *
“저, 저……?!”
“저게 다 뭐야!?”
“설마……!”
웅성웅성.
금화를 싸 들고 내려온 여자들의 모습에,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든 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급한 대로 보자기로 싸매기는 했지만, 그 틈새로 비어져 나오는 금빛과 은빛은 미처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물의 향기는 언제나 사람들을 취하게 하는 건지, 그 보따리들을 보는 모든 이의 얼굴이 슬쩍 상기되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직원들은 가운데로 모여라.”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낸 괴물 꼬마가 위압적인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반투명한 늑대가 그 거대한 몸체를 다시 드러냈다..
- 크르르릉.
조직원들은 주춤거리며 저택의 앞마당에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학습된 공포가 그들을 침묵시켰지만, 여자들이 내려놓은 보따리를 보는 일부 건달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니들은 일단 좀 맞자.”
냉정한 목소리는 단숨에 그 기대감을 박살 냈다.
게다가 앞뒤에서 동시에 튀어나온 꼬마와 늑대는 그들에게 대응할 틈도 주지 않았다.
퍽. 쾅.
우드득.
“아아악!”
“끄아아!”
“미, 미친!”
한순간 펼쳐진 구타의 향연이 학습된 공포마저 밀어 내고 최후의 발악을 이끌어 냈다.
한쪽에선 반격하는 자들이.
“다 같이 덤비자! 할 수 있어!”
또 한쪽에선 도망가는 자들이 나타났다.
“튀어!”
그야말로 상반된 반응이었지만, 둘 다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점만은 같았다. 50명이 넘는 건달들이 모조리 팔다리가 꺾인 채 바닥에서 신음하기까진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직후.
“자, 이놈들 중에 원한이 있는 놈이 있다면 마음껏 분풀이하도록 해. 죽여도 좋아. 뒤는 내가 책임진다.”
소년의 목소리는 살벌하기만 했고, 샛노란 안광을 빛내는 늑대는 아직 체격이 왜소한 소년에게 다소 부족할 수도 있는 카리스마를 보태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정말?”
“저 개자식을 죽여도 된다고?”
“그, 그래도 되나?”
웅성웅성.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파격적인 선언에, 피착취자들의 얼굴에는 망설임보다는 설렘의 기색이 떠올랐다.
쓰러진 건달들을 향해 가는 슬금슬금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랜스, 저 씨X놈이 우리 언니를 팔아먹고 나도 여기로 보냈어!”
누군가의 고함을 시작으로 쓰러진 건달들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이 시작되었다.
퍽. 퍽.
“으아악!”
“사, 살려 줘……!”
“뭐야, 이것들은!”
“보, 보스. 충성을 맹세할 테니……, 끄악!”
쾅.
발길질로 시작된 피착취자들의 폭력은 이내 주먹만 한 돌까지 동원된 광기로 번졌다.
그렇게 30여 분 후.
“흐, 흐윽.”
“돼, 됐어. 이걸로.”
“개자식들. 퉤!”
“후욱. 후욱.”
쌓인 한을 정말 원 없이 풀었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돌아서는 여자와 아이들.
그들이 물러난 자리에, 숨이 붙어 있어서 신음이나마 흘리고 있는 자는 채 10명도 되지 않았다.
“……끄으으.”
“으윽.”
순식간에 40명이 넘는 건달들의 목숨이 끊어진 것이었지만, 그 참사를 일으킨 이들의 눈빛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울프 패거리가 쌓아 온 죄악이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었다.
차가운 눈으로 살아남은 건달들을 바라보던 타이니가 슬쩍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놈들은 그나마 덜 나쁜 놈들이라고 봐도 될까?”
“게론, 아스, 테논……. 음, 그런 것 같아. 그나마 양심이 쥐꼬리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놈들이었어.”
엠마의 확언에 그제야 타이니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제 울프의 조직은 없다. 남은 조직원이라 봐야 이놈들뿐이야. 원치 않아 인베더에 묶여 있던 이들은 앞으로 나와 돈을 받고 떠나라.”
그렇게 말하는 타이니의 시선이 다시 한번 엠마와 그 동료들을 향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넉넉한 액수를 챙겨 두기도 했지만, 그보다 훨씬 큰 금액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 놓은 것이다.
엠마는, 아니, 죽은 에리나 누나의 친구들은 확실히 좋은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그녀들은 타이니를 걱정하기 바빴다.
“넌 정말 안 챙겨도 돼?”
“난 필요 없어. 당장 필요한 돈 몇 푼은 챙겼고.”
정말 몇 푼뿐이었다.
그랬기에 엠마와 다른 동료들은 걱정 어린 기색을 좀처럼 떨치지 못했다.
“타이니.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가 본데,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어.”
“필요하면 또 구하면 되니까.”
“그게 말처럼 쉽지…….”
“이 돈이 어떻게 생긴 거라고 생각해?”
“뭐? ……아!!”
조금 늦게 말뜻을 이해한 듯, 엠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타이니는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보탰다.
“악인을 지옥으로 보내도 그 돈은 현실에 남아.”
그런 의미에서 보면, 타이니에겐 널린 게 돈이다.
그 살벌한 한마디에 그제야 다른 이들도 타이니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이 작은 소년이 가고자 하는 길이, 그들이 생각한 미래의 평온한 일상과는 아득히 멀다는 것도 그제야 추측할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나고 나서야 울프의 재산은 그 피착취자들에게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은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뭐야, 왜 이것밖에 안 줘? 저기 많이 있잖아!?”
불쌍한 자들이 다 착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돈을 받는 사람 중에는 과한 욕심을 부리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베푸는 이도 마냥 착한 이는 아니었다.
- 크르르르릉.
“받은 것도 도로 토해 낼래? 아니다, 아예 구걸하기 좋게 다리라도 분질러 줘?”
불만을 표하기 무섭게 엄습하는 강렬한 살기. 밑바닥 인생에서 나름대로 깡을 길렀다 한들 평범한 사람이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타이니는 그렇게 욕심을 부리거나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는 이들은 눈여겨봐 두었다.
그리고 그들이 딴짓을 하지 못하게 확실하게 엄포를 놓았다.
“엠마와 동료들은 내 지인들이다. 이들이 잘못된다면…….”
- 크르르르릉.
“그들이 남긴 영혼의 흔적을 내 정령이 쫓을 것이다. 그리고 연관된 모두의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
돈을 나누어 가지던 훈훈한 현장에 불현듯 살벌한 선포가 울려 퍼졌다.
사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는 그들이 겪고 있는 상황 자체가 좀처럼 믿기 힘든 이적이다.
하물며 그 이적을 만들어 낸 이가 작디작은 소년이었으니, 다들 이미 현실감을 반쯤 상실한 상태였다. 이런 믿기 힘든 엄포도 뇌리에 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악인 착취 전문가, 타이니의 오랜 경험을 살린 공갈 협박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 크릉.
‘어? 진짜 된다고?’
- 크르르.
보란 듯이 엠마와 그 동료들에게 투명한 코를 가져다 대는 월랑의 모습에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살벌하게 보일 뿐이었지만.
“저,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암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변수가 생겨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나절에 일어난 인베더의 파란은 해가 진 뒤에야 모두 정리되었고, 그날로 인베더에 속한 창관의 대다수가 영업을 중지했다.
길거리에 바글바글하던 거지들도 대부분 모습을 감춘 것은 덤이었다.
다만, 환락가가 그 기능을 잃어버리면서 필레스 영지를 방문한 상인과 용병들의 입에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베더의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온갖 소문이 쏟아지던 와중.
영주가 타이니를 호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