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서울시장
신태진 회장은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양승호 비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래, 데이비드 오 교수랑 김보름 교수도 오한결 미술관 후원을 약속했다고?”
“두 사람만 뿐만 아니라 한국 예술계의 거장들 모두 오한결 미술관 지지에 나섰다고 합니다.”
양승호 비서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짓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렇게 잠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유지하던 신태진 회장이 말을 꺼냈다.
“결국 오한결 작가는 자신의 능력으로 미술관을 짓게 되는군.”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들고 양승호 비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 오한결 작가가 미술관을 짓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나? 그때 내가 그에게 선물로 미술관 하나를 지어 주려고 경기도 외곽에 땅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었지.”
“네, 기억납니다. 회장님.”
“내가 참 어리석었어. 오한결 작가가 생각한 미술관은 세계적인 수준의 미술관이었던 것인데,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던 걸 그땐 몰랐을까? 아마도 내가 자만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
“아닙니다. 회장님. 그땐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양승호 비서를 슬쩍 쳐다본 회장이 갑자기 자리에 일어섰다. 그리고는 푸른 하늘이 보이는 창가로 다가가 섰다.
“아니, 애써 나를 위로하지 말게나. 내가 미술관을 지어주겠다고 한 말은 두고두고 나를 부끄럽게 할 거야. 나의 근시안적 견해였으니까.”
회장의 말에 쉽게 대답할 말을 고르지 못한 양승호 비서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을 때 회장이 다시 말을 걸었다.
“오한결 미술관은 오로지 예술계 종사자들과 일반인들에게 후원을 받는다지?”
“네, 기업과 단체의 후원은 사절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상업적 정치적 이슈가 끼어들어 미술관이 갖는 예술적 상징성을 훼손하고 싶지 않은가 보군. 역시 오한결 작가다워.”
잠시 머뭇거리던 양승호 비서가 말했다.
“사실, 저는 그게 좀 아쉽습니다. 오직 후원금으로 충당하기엔 미술관 규모가 너무 큽니다. 적지 않은 후원금이 모일 것이 예상되지만 운영비를 생각해 보면 결국 적자가 날 게 분명해 보입니다.”
양승호 비서의 현실적인 조언에 신경에 쓰인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돌려 양 비서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그의 조언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은 지적이야. 그게 예술가와 사업가의 차이겠지. 오한결이 아무리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다 한들 미술관 경영을 해본 경험은 없지 않은가.”
“그럼 어떻게 할까요? 그 점을 오한결 작가에게 알릴까요?”
잠시 고민하던 신태진 회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러지 말게.”
“그럼…….”
좋은 방법이 떠올랐는지 신태진 회장이 편안해진 표정으로 다시금 뒤돌아 창밖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내가 후원할 걸세.”
“네? 방금 말씀드렸듯이, 기업 후원은 받지 않고 있습니다만.”
“기업 후원이 아니면 되지 않은가.”
신태진 회장의 말장난 같은 말에, 양승호 비서가 꽤 답답함을 느꼈다.
그런 양승호 비서의 얼굴을 보고 신태진 회장이 피식 웃었다.
“이런 답답한 사람 같으니라고. 자네 앞에 서 있는 예술가가 보이지 않나 보군.”
“예, 예술가요?”
혼란스러운 생각 사이로 한 줄 빛처럼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S’
최근 신태진 회장은 어설픈 실력이지만 자신의 작품을 모아, 경기도 외곽 조금만 도시에 세워진 미술관 한구석에 전시를 했다.
그때 작가명을 ‘S’라고 적었었지.
처음에 취미로 할 줄 알았던 그림을 꾸준히 그려 전시까지 하다니, 그 사실에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런 회장님이 대단하다고 느꼈던 게 얼마 전이었는데, 그 사이 그것을 잊다니.
신태진 회장의 눈에 양승호 비서가 이제야 그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아 흐뭇하면서도 살짝 부끄러웠다.
“자네는 날 참 부끄럽게 하는군.”
“죄송합니다. 한 번에 알아챘어야 했는데.”
“괜찮네. 하하.”
어느덧 양승호 비서가 신태진 회장 뒤에 서서 물었다.
“그럼 작가명 ‘S’로 후원을 진행할까요?”
잠시 생각에 잠기던 회장이 뒤돌아서 양승호 비서와 얼굴을 마주했다.
“아니, 내 후원금은 오한결 미술관 운영에 적재적소에 쓰이길 바라네. 그러니까 매년 오한결 미술관 재정 상태를 살핀 뒤, 안정적으로 운영될 만큼의 금액만 후원하게.”
신태진 회장의 사려깊은 생각에 양승호 비서가 몹시 감동하며 말했다.
“꽤 현실적이고 오한결 작가에게 도움이 되는 후원금이군요. 그럼 장기 후원으로 추진하겠습니다. 그럼 기간은 몇 년 정도로 잡을까요?”
“평생!”
“네? 평생이요?”
“그래, 오한결 미술관이 유지되는 한평생 재정적 지원이 이뤄지도록 해주게나. 아마도 내 유언에도 포함시켜야겠지.”
신태진 회장의 깊은 뜻을 이해한 양승호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건 명일그룹이 아닌, 나, 신태진이 개인적으로 하는 거라네. 명심하게나.”
“네! 회장님.”
* * *
몇 달 후.
이상민 장관이 정당 유니폼을 입고 수많은 사람과 나란히 앉아 서울시장 보궐선거 개표방송을 보고 있다.
상대 후보와 막상막하의 투표율을 보이며 경쟁을 하자, 이상민 장관의 입이 바싹 말라 갔다.
‘어우, 눈 뜨고 못 보겠네. 심장 떨려.’
그 옆에서 같이 떨고 있던 문한국 보좌관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어, 분명 지지율에서 앞섰는데, 막상 투표 결과를 보니까, 막상막하네. 이러다가 지는 거 아냐?’
방송 화면에서는 앵커가 끊임없이 투표 현황을 말하고 있었고 중간중간에 정치 전문가 패널들이 나름의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정치 평론가가 말했다.
“이상민 후보는 뭐랄까요, 참 묘한 사람입니다. 장관 출신이면서도 오랜 정치인들과 견주어도 인지도가 뒤지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더 유리할 거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매의 다른 정치 평론가는 그의 말에 반론했다.
“인지도를 너무 믿지 마세요. 서울시장은 인기 투표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시민들을 다 알아요. 어떤 후보가 서울시장 재목인지. 반면 야당 후보는 꾸준히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인물로…….”
방송을 보면서 더 심란해진 이상민 장관이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문 보좌관 그동안 수고했어.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자네 고생한 건 꼭 잊지 않겠네.”
“제가 뭘 했다고요. 밤낮으로 선거 유세 다니신 건 장관님인걸요. 저는 장관님을 모실 수 있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마치 작별 인사를 하듯 말을 주고받으며 깊은 우울함에 빠져들고 있을 때, SBC 앵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긴급 뉴스가 도착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짝 긴장한 채 방송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희 SBC는 이번 선거를 예측하고자 최첨단 인공지능의 분석을 활용했습니다. 지금 개표가 대략 60% 정도 진행됐는데요. 현재 개표 상태로 보면 50:50 그야말로 초박빙으로 보입니다만, 인공지능은 다르게 판단했습니다.]
방송 화면에 현재 개표 현황이 없어지더니 인공지능 예측 결과가 보였다.
[인공지능은 최종 70% 득표율로 이상민 후보가 당선이 ‘유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저기서 ‘우와!’하고 환호성이 들렸다.
잠시 당황한 이상민 장관과 문한국 보좌관도 그들과 함께 축하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이상민 장관이 물었다.
“뭐야? 그럼 내가 당선된 거야?”
“그런 거 같은데요.”
이상민 장관과 문한국 보좌관이 벌떡 일어서서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내가 서울시장이 됐구나.”
“축하합니다. 시장님!!”
두 사람은 그동안 고생한 일들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가자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부둥켜안고 울었다.
두 사람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모두 감동해 그들을 향해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다.
이상민 장관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시를 하고 차분하게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기뻐서 두근대는 심장은 어쩌지 못했다.
이미 승리에 도취된 이상민 장관이 방송을 보자, 앵커가 말을 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인공지능 예측 결과는 참고 자료일 뿐, 정확하지 않습니다. SBC는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새로운 예측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으며, 인공지능의 예측 결과가 틀리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그 말에 골이 멍해진 이상민 장관이 말했다.
“이게 뭔 소리야? 내가 당선된 게 아니야?”
“그냥 해본 거라는데요. 테스트로.”
다시 방송 화면은 50:50의 초박빙 투표 현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짜 투표 결과는 두 시간 후 정확히 예측됐다.
* * *
하루 장사를 마치고 홍철수 사장과 홍미숙이 조용히 앉아 서울시장 투표 방송을 보고 있다.
이미 밤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방송 화면에는 당선자의 이름이 커다랗게 보이고 있었다.
“이상민 후보가 당선됐네요. 그분이 문체부 장관 출신이죠?”
홍미숙이 방송을 보면서 묻자, 홍철수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오한결 작가랑도 친해서 몇 번 기사가 났었지 아마?”
이제 이상민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되자, 방송에서 앵커가 당선자와 인터뷰하는 영상이 나왔다.
앵커가 몹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서울시장이 되긴 걸 축하드립니다. 밤늦게까지 기다리신 시민들에게 한 마디 해주시죠.]
이상민 장관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대답했다.
[부족한 저를 믿고 선택해주신 서울 시민께 몹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서울시가 세계적인 도시로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간단하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상대 후보와 다르게 예술과 관련된 공약을 많이 발표하셨어요. 아마도 문체부 장관 출신이시라 특히 그쪽에 더 관심이 많으신가요?]
[뭐, 아니라고 말할 수 없죠. 문체부 장관 출신이기 전에, 저 또한 예술을 전공한 예술계 종사자이니까요.]
[아, 그렇군요. 솔직한 대답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 더 물어볼게요. 지금 네티즌들 사이에서 삼각지 화랑거리 이슈가 화제인데, 서울시장이 되신다면 어떤 해결책이 있으신가요?]
이상민 장관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서울시에 낙후된 상권 다섯 곳을 선정해, 2년 안으로 재개발 또는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할 것입니다. 이번 사업은 명일그룹과 지역발전 MOU를 체결해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아, 그렇다면 삼각지 화랑거리도 포함인가요?]
[물론입니다. 역사가 깊은 곳인 만큼 오래된 건물은 수리 보수하고 개성을 살려 리모델링을 할 것입니다. 그곳을 세계인이 찾는 예술인의 명소로 만들 예정입니다.]
이상민 장관의 인터뷰가 끝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홍철수가 너무 놀라 얼어버렸다.
“미숙아, 우리 지금 뭘 들은 거지?”
홍미숙 또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꿈인가?”
하지만 잠시 뒤, 분명한 현실인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지만 얼굴에는 환희의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