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97화 (197/202)

제197화 최후의 카드

쾅!

시장실 문을 거칠게 닫고 나온 이상민 장관이 씩씩거리며 복도를 가로지르자, 재빨리 문한국 보좌관이 그의 뒤를 따랐다.

“저기 장관님…….”

문한국 보좌관의 의미한 말소리가 들리자, 이상민 장관이 휙 뒤를 돌아봤다.

벌겋게 상기된 그의 표정을 보고 문한국 보좌관이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시장님과 얘기가 잘 안 됐나 봐요……?”

“아주 고집이 장난이 아니야!”

생각할수록 괘씸한지 이상민 장관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무조건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겠다는 거야?”

말을 하면서 이상민 장관은 조금 전에 서울시장과 대면했던 일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상민 장관은 충분한 자료를 들이밀며 서울시가 삼각지 화랑거리 리모델링에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무엇보다 자신만만하게 명일그룹의 막대한 투자금을 유치했다는 말을 건넸으나, 이상할 정도로 서울시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장관님. 제가 말씀드렸듯이, 리모델링 사업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혹시 정말 그쪽에 땅을 사신 건 아니시죠?

무슨 그런 말씀을…….

조사하면 다 나옵니다.

‘으악, 자존심 상해!’

이상민 장관이 화를 참으며 부들부들 몸을 떨자, 더욱 조심스럽게 문한국 보좌관이 물었다.

“명일그룹 투자금 얘기는 해보셨어요? 사실상 그게 결정적인 건데.”

“했지. 그러고 보니 살짝 흔들리긴 하더라. 근데, 결국 요지부동이야.”

문한국 보좌관이 실망하는 표정을 짓자, 덩달아 이상민 장관도 엄청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린 망했어. 명일그룹이고 나발이고, 사업을 진행 못하면 그걸로 끝이지.”

말을 하던 이상민 장관이 혈압이 올랐는지 잠시 휘청거리자, 문한국 보좌관이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조심하세요, 장관님!”

“이제 그림도 뺐기고, 원로 작가들에게 비난받을 거라고. 내 정치 인생도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난 꼴이라니까.”

장관의 넋두리를 조용히 듣던 이상민 보좌관이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힘내세요.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랍니다.”

그러자 이상민 장관이 급하게 자신의 어깨에 올라간 그의 손을 툭 치고 그를 째려봤다.

“뭐야, 놀리는 거 같은데.”

“…….”

문한국 보좌관은 침묵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아니라고 말 못 하겠네.’

* * *

양승호 비서가 급히 회장실로 들어와 차분한 목소리로 보고를 했다.

“이상민 장관이 서울시장 설득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실망스러운 결과를 들은 신태진 회장은 대답 대신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이 방법까지는 안 쓰려고 했는데.’

신태진 회장의 침묵이 무슨 뜻인지 짐작한 양승호 비서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회장님, 일단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켜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뭐가 달라질 수 있겠나.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야지.”

오랫동안 신태진 회장과 일을 해본 양승호 비서는 회장의 입에서 ‘해결’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회장님이 최후의 카드를 쓰시려고 하시는 구나.’

그런 양승호 비서의 고민을 눈치챈 회장이 넌지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우리에겐 확실한 게 있지 않나. 그럼 그걸 준비하게.”

회장의 엄중한 말에 양승호 비서가 허리를 깊게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회장실을 나서던 양승호 비서는 앞으로 서울시가 겪게 될 혼란에 대해 생각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명일문화재단 건물 앞에 도착한 유코아 CEO 맥스와 오스카 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야, 소문이 사실이었군.”

초현대적인 건물 외관이 햇볕을 반사하자, 손으로 눈을 가린 맥스가 말했다.

“이곳 문화재단은 명일그룹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만든 곳으로, 전 세계 예술계에 사실상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해. 보통 기업의 예술활동 지원이라면 보여주기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잖아.”

“맞습니다. 하지만 명일그룹은 예술과 기업 경영을 점점 하나로 합쳐가고 있는 듯합니다. 독특한 경영체계지만 사실상 성공을 거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맥스가 저 멀리 유럽풍의 건물을 넌지시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좋았어. 그럼 우리와 통하는 게 많겠군. 참, 오한결 작가도 참석한다고 했지?”

“네, 특별히 문화재단과 인연이 깊은 오한결 작가도 미팅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했더니 바로 가능하다고 회신을 받았습니다.”

“좋아. 모든 게 완벽하군. 어서 들어가세나.”

맥스와 오스카 팀장이 문화재단 안으로 들어가자, 신수진 이사장이 미리 그들을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세요, 맥스.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 주시니 무척 기쁘군요.”

맥스가 말을 하면서도 누군가를 찾는 듯 눈을 굴리자, 신수진 이사장이 말했다.

“오한결 작가는 회의실에 있어요.”

맥스가 민망한지 히죽 웃어 보였다.

“아하! 그렇군요. 제가 좀 성격이 급합니다.”

잠시 뒤, 회의실에 모두 모이자, 맥스가 기분 좋게 말을 꺼냈다.

“한국은 참 굉장한 나라 같아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이렇게 멋진 문화재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 바로 제 앞에 오한결 작가님이 계시다니 믿기지 않아요.”

오스카 팀장이 말을 이었다.

“그럼요. 얼마전 뉴욕에서 그 특출난 실력을 입증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세계 정상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두 사람의 칭찬에도 신수진 이사장은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오한결은 그리 싫지 않은지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부끄럽군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요.”

오한결의 웃음에 긴장감이 풀린 맥스가 더 과감하게 말했다.

“에이, 작가님의 천재성은 전 세계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사실, 우리가 한국에 진출 계획을 세우며 가장 염두해 둔 건 오한결 작가님과 협업이었습니다.”

“저를요?”

“네, 상상해 보세요. 2년 후 삼각지 부근에 초대형 미술품 센터가 생기고 거기에 오한결 작가님 얼굴이 커다랗게 걸리는 것을요. 저희는 꼭 오한결 작가님을 유코아 모델로 쓰고 싶습니다.”

이 말에 오한결보다 신수진 이사장이 먼저 반응했다.

“모델이요?”

“그럼요. 오한결 작가님이야말로, 유코아의 철학과 정확히 일치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한결에게 맥스의 주장이 꽤 흥미로웠다. 그래? 그럼 일단 들어볼까?

“정확히 어떤 면에서 그런 거죠?”

맥스는 오한결이 꽤 협조적으로 나오자, 기분 좋게 나신의 주장을 펼쳤다.

“아시다시피, 유럽을 제외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 속한 국가들의 미술시장은 안타까울 정도로 규모가 작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 시장의 엄청난 잠재력을 알아보지 못했어요.”

맥스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미술시장이 커지면 그 나라 예술 수준도 올라간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맥스가 말을 마치자, 자연스럽게 오스카 팀장이 관련 논문에서 발췌한 자료를 슬쩍 나눠줬다.

자료를 살피던 오한결이 말했다.

“스웨덴 대학교에서 나온 논문이군요.”

“저희 뉴코아는 유수의 대학과 수많은 연구를 진행합니다. 최상의 논문이 나올 수 있도록 연구비 지원도 아끼지 않고요.”

맥스가 고개를 돌려 신수진 이사장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마치 명일문화재단이 전 세계 예술 단체에 지원하듯이 말입니다.”

맥스는 나름 칭찬의 어조로 말했지만, 신수진 이사장은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맥스를 설명을 다 들은 오한결이 자료를 참고하며 정리하듯 말했다.

“종합해 보면, 뉴코아가 한국에 정착해서 예술 시장을 유럽처럼 만든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역시 오한결 작가님은 머리 좋으시군요.”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오한결이 대답했다.

“그럼, 한국 전통 미술시장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전통시장이요?”

맥스가 어리둥절하자, 옆에서 오스카 팀장이 설명했다.

“그거 있지 않습니까. 삼각지 화랑거리. 거길 말하는 게 아닐까요?”

“아! 그거 말이군요.”

이제야 오한결의 말뜻을 이해한 맥스가 자신 있게 말을 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한국에 그런 곳이 있을 줄 몰랐거든요. 그리고 지난번 한국의 작은 예술잡지에서 특집 기사를 다뤘던 것 같은데, 참으로 무의미한 일 아니겠어요? 유코아와 화랑거리는 비교 대상이 아니거든요. 왜 그런 기사를 썼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맥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진심으로 화랑거리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자, 오한결이 이번엔 참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알기론, 유코아는 값싸고 질이 나쁜 미술품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전 세계적으로도 그 평가가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 점에서 유코아가 한국 예술의 수준을 더 떨어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충격적인 오한결의 발언에 정신이 어찔해진 맥스가 할 말을 찾고 있을 때, 오스카 팀장이 더 흥분해서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 삼각지 화랑거리는 한국 미술의 수준을 얼마나 높였습니까?”

“수준이라…….”

오한결이 고민하는 척 하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제가 그 결과입니다. 저는 화랑거리가 없었으면 예술을 포기했을 수도 있거든요. 그만큼 지금의 저를 만든 곳이라고 할 수 있죠.”

오한결의 파격적인 발언에 오히려 서운함을 느낀 건 신수진 이사장이었다.

‘뭐지, 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듣기 무척 서운한 말이네…….’

오한결은 차분하게 자신과 삼각지 화랑거리와의 인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난했던 시절, 미술 재료를 구하기도 힘들었을 때 화랑거리에서 만났던 인연들과 지금까지도 함께 예술적 철학을 공유하며 끈끈하게 이어지는 관계를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화랑거리는 전 세계인들이 찾는 예술의 거리가 될 것입니다. 외국의 대기업이 값싼 미술품을 파는 시장이 될 수 없어요. 하지만 한국에 정착하고자 하는 유코아의 권리를 인정합니다.”

오한결이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해봐요. 맥스.”

오한결이 손을 내밀자, 맥스가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눴다. 오한결은 맥스의 얼굴에 나타난 당혹감을 기분 좋게 바라봤다.

* * *

호텔로 향하는 택시를 탄 맥스와 오스카 팀장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한결 작가! 오냐오냐 해줬더니. 일개 작가 따위가 감히!”

상당히 심기가 불편한 맥스가 엄청 투덜대자, 오스카 팀장이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솔직히 오한결 작가와 화랑거리와의 인연은 조금 감동적이긴 했습니다.”

“뭐!!”

맥스가 짜증을 확 내자, 오스카 팀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그동안의 사업 노하우를 총동원해서 한국의 미술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거야. 나중에 한국인들도 우리에게 고마워할걸. 수준 높은 미술 거래 시장을 만든 건 결국 유코아일 테니까.”

오스카 팀장이 고개를 돌리자, 택시 창문에 맥스의 음흉한 미소가 그대로 비춰 보였다. 오스카 팀장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된 마음에 침을 꿀꺽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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