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공정한 경쟁
“뭐라고요? 다시 말게 보세요!”
오스카 팀장의 충격적인 보고에 스웨덴 뉴코아 본사 사무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게…… 한국의 한 언론사가 유코아의 한국 진출에 매우 부정적인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더불어 삼각지 화랑거리에 대한 상세한 기사도 실었고요.”
“분명 한국 언론은 꽉 잡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맥스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오스카 팀장을 향해 묻자, 오스카 팀장은 버벅거리며 겨우 대답했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엉뚱한 데서 이런 잡음이 들리다니.
매사에 완벽을 추구한 맥스는 오스카 팀장의 보고에 매우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맥스도 삼각지 화랑거리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다.
미미한 한국 예술 시장을 이끈 꽤 오래된 미술거리라고 들었다.
하지만 오스카 팀장이 보여준 자료와 현재 화랑거리의 낙후된 모습을 보고는 솔직히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도 사실이었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은 유코아의 존재를 반가워할 것이다.’
문제는 세계 어디든 전통을 건든다는 건 언제나 위험부담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한국 언론에 로비를 했는데, 기어이 문제의 기사가 하나 툭 튀어나온 것이다.
“모던아트의 인지도는 어떤가요?”
“예술 잡지로서는 꽤 규모가 있지만 사실상 한국의 주요 언론은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맥스가 얼굴을 구기며 오스카 팀장을 노려봤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이런 일이 생긴 거 아닙니까. 요즘은 SNS 시대라 작은 언론사도 언제든 커다란 이슈를 만들어 낼 수 있어요. 보세요. 지금이 딱 그런 거 아닙니까.”
오스카 팀장은 맥스의 말에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으니까.
현재 모던아트의 박수호 기자가 쓴 기사는 SNS를 통해서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몇몇 열성 지지자들은 그 기사를 영어로 번역해 퍼 나르고 있는 실정이라, 국제적으로 유코아의 이미지가 계속 손상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맥스가 평소와 다르게 엄청 투덜댔지만, 딱히 오스카 팀장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런 오스카 팀장을 답답하게 쳐다보던 맥스가 결단을 내렸다.
“제가 직접 서울로 가겠어요. 이번 서울 프로젝트는 동아시아 상권의 성공여부를 결정할 정도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네! 바로 서울로 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맥스의 단호한 말에, 오스카 팀장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답했다.
* * *
홍철수 사장이 모던아트 기사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세상에, 화랑거리 역사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기사는 처음 보네.”
그렇게 말하던 홍철수 사장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기사에 나왔듯이, 과거 자신도 미군 부대 옆에서 장사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20대 때 화가 지망생 시절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벌겠다고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이제는 어엿한 화랑 사장으로 화랑거리 터줏대감이 되지 않았는가.
화랑거리에서 겪었던 인생의 희로애락을 생각한 홍철수 사장은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러던 중 오한결의 시선이 느껴지자 재빨리 현실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여론이 갑자기 이렇게 우리 편이 될 줄 미처 몰랐어.”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서운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봐 달라고 할 땐 외면하더니…….”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홍철수 사장의 표정을 보며 오한결이 잠시 숨을 고르며 적당한 말을 찾았다.
사실 언론이 홍철수 사장에게 호의를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주요 언론사들은 화랑거리 문제점에 관해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SNS에서 화랑거리와 인연이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열성적인 지지가 이어지자, 인터넷 언론사를 중심으로 관련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언론사도 사정이 있었겠죠.”
그러나 오한결은 차마 그 사정이란 게 무언인지 짐작한 결과를 얘기하지 않았다.
북유럽 유코아의 등장에 따른 주요 언론사 침묵은 분명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해지는 로비의 결과일 것이다.
“그래, 사정이 있겠지. 아마도.”
홍철수 사장은 오한결의 진심 어린 말에 무척 신뢰를 보이며 대답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갑자기 문자 메시지 알람이 계속 이어지자, 놀란 홍철수 사장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게 뭐야!!”
놀란 오한결이 고개를 빼꼼히 들고 쳐다보자, 홍철수 사장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여러 곳에서 인터뷰 요청 문자가 엄청 오네.”
“한다고 하세요! 기회잖아요.”
말없이 홍철수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몇몇 문자를 선별해서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너무 조심스러워 표현하지 않았지만, 홍철수 사장의 심장은 기대감으로 무척 두근거렸다.
* * *
명일그룹 본사에 도착한 이상민 장관은 고개를 들고 끝없이 하늘로 솟은 건물을 올려다봤다.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분명 다를 거야.’
그간 신태진 회장과 대립각을 세웠던 자신이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신태진 회장은 누구나 인정하는 대한민국 재벌 1위이자, 세계 경제를 호령하는 대단한 권력가였다.
하지만 이상민 장관은 오한결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그런 대단한 사람과 사사건건 대립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회장이 많이 참았던 거겠지.’
이런 아찔한 생각이 들자, 저절로 이상민 장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스마트하게 생긴 양승호 비서의 안내를 받아 회장실을 방문한 이상민 장관은 웬만한 갤러리보다 더 화려한 회장실 내부에 입을 떡하고 벌어졌다.
그런 장관의 모습을 예상했던 신태진 회장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장관님이 좋아할 만한 작품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상민 장관은 고개를 획 돌려 신태진 회장을 쳐다봤다.
“이런, 아닙니다. 여기 있는 작품 하나하나가 무척 빛나는군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키스> 작품 앞에 이상민 장관이 멈춰 섰다.
“세상에 ‘구스타프 클림트’ 작품 아닙니까?”
어느새 회장이 이상민 장관 옆에 다가와서 대답했다.
“이 작품을 보면 오한결 작가를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저는 그전까지 이 작품이 원본을 충실히 따른 작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신태진 회장은 황금빛 옷으로 둘러싸인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원작의 의도와 완전히 다르게 제작되었습니다.”
신태진 회자의 말에, 이상민 장관이 <키스> 작품을 유심히 살폈다.
‘원작과 다르다고? 내 눈엔 원작 그대로인 것 같은데.’
예술학 박사 학위 소지자인 이상민 장관은 클림트의 <키스> 작품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석사 학위 논문을 클림트와 관련된 주제로 쓰지 않았던가.
나름 전문가로서 판단해 보건대, 이 그림은 <키스>의 원본을 완벽하게 영상화한 작품인 것이다.
“오한결 작가가 틀렸을 수도 있죠.”
이상민 장관은 자신도 모르게 솔직한 심정을 얘기했다.
그러자 신태진 회장이 온화한 말투로 손으로 그림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그림 속 남녀의 발밑에 보이는 낭떠러지 이미지와 숨겨진 기호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이상민 장관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몰랐습니다. 클림트의 <키스>가 사랑이 아닌, 남자의 일방적 애정표현이었다니.”
“하하하. 이해합니다. 저도 몰랐던 사실이니까요. 오직 오한결 작가만이 그걸 지적했습니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이상민 장관은 그렇게 한참을 서서 클림트의 <키스> 그림을 관찰했다.
그런 그의 진중한 모습을 보던 신태진 장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가 충분히 작품을 감상할 시간을 주었다.
작품을 충분히 감상한 이상민 장관이 고개를 돌리자, 이미 신태진 회장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살짝 민망해진 이상민 장관이 서둘러 신태진 회장을 마주보고 앉았다.
‘뭐지?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신태진 회장이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나 온화하게 보여 이상할 정도였다.
그간 회장의 호랑이 같은 눈빛은 경계의 대상이었고 언제든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했다.
‘하지만 왜 갑자기 변한 거지?’
이상민 장관의 당혹감을 알아챈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저는 방금 장관을 다시 봤습니다. 이곳에 업무 차 들린 유명 인사들은 많았어요. 하지만 장관처럼 클림트의 <키스>를 진정성을 갖고 오랫동안 관찰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시계를 확인한 장관은 무려 자신이 30분 넘게 작품을 관찰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이 신태진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예술에 진심인 사람은 좋아합니다. 그간 장관을 오해했던 것 같군요.”
신태진 회장의 직설적인 칭찬에 살짝 낯뜨거워진 이상민 장관이 서둘러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
“오한결 작가가 말하더군요. 회장님께서 화랑거리 변화에 도움을 주신다고요.”
업무 이야기로 돌아서자, 신태진 회장의 눈빛이 다시 매서워졌다.
“삼각지 화랑거리는 저도 매우 아끼는 곳입니다. 하지만 북유럽 기업의 진출 또한 시대적 변화라고 생각하고요.”
“그럼 유코아의 한국 진출에 반대하시는 입장은 아니시란 말인가요?”
“물론이죠.”
회장의 단호한 대답에 이상민 장관은 기대했던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신태진 회장은 사업을 하는 사람 아닌가?
유코아의 진출은 그들의 시선에선 너무나 당연한 경제적 논리일 것이다.
“근데, 왜 오한결 작가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하신 건가요?”
신태진 회장이 자세를 바꾸고 대답했다.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가 봅니다. 유코아의 한국 진출을 인정하는 것이 화랑거리의 몰락을 원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저는 유코아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능력을 펼치길 원할 뿐이죠.”
“그게 같은 말 아닌가요?”
“아닙니다.”
신태진 회장이 이상민 장관의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저는 공정한 경쟁을 바랍니다. 그렇기에 저는 유코아의 사업에 절대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기업인으로서 한국 예술의 본고장인 화랑거리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막대한 투자 계획은 있습니다.”
신태진 회장의 말뜻을 이해한 이상민 장관이 탄성을 질렀다.
“아! 화랑거리의 경쟁력을 높여서 유코아와 경쟁시킬 계획이군요.”
“그렇죠. 그런 겁니다.”
신태진 회장이 너털 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오한결 작가는 화랑거리 리모델링을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서울시장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장관님이 그를 설득해 주세요.”
이야기가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간 것 같아, 이상민 장관이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제가 서울시장을 다시 만나야 하는군요.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파구가 떠오르지 않아요.”
신태진 회장이 씨익 웃고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걸 이용해 보세요. 아마도 효과가 있을 겁니다.”
수백에 달하는 투자금이 적힌 문서에 이상민 장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부족하면 더 말씀하세요. 얼마든지 지원할 의사가 있으니까요.”
문서를 들고 멍하니 신태진 회장을 쳐다보는 이상민 장관은 그의 얼굴과 오한결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오한결 작가는 이 모든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겠구나. 소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