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베스트 프렌드
며칠을 잠적하며 작품 활동에 몰입하던 서정익 작가가 붓을 내려놓으며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마무리됐군.”
그동안 작품에 몰입하는 중간에도 블랙 딜러의 은밀한 속삭임이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제 손을 잡는다면 앞으로 향후 10년 이내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흔들리고 있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서정익 작가는 이런 낯선 자신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내가 돈 앞에서 흔들리다니. 결국 나도 속물이었어. 하하.’
그리고는 커다란 창을 덮고 있던 암막 커튼을 힘껏 젖히자, 창밖으로 푸른 하늘과 새하얀 뭉게구름이 그림 같이 나타났다.
다시 그림 앞에 선 서정익 작가는 고민에 빠졌다.
“블랙 딜러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어떻게 연락하지?”
서정익 작가는 블랙 딜러가 전해진 ‘검은색 초대장’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때마침 전화가 걸렸다.
‘설마’하면서 통화 버튼을 누르자, 블랙 딜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작품 활동에 몰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아셨죠? 제가 방금 작품을 완성했는데…….”
[그런가요? 잘됐네요. 그럼 제가 모실 차를 하나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대화를 마친 서정익 작가가 얼떨결에 전화를 끊고는 굳은 자세로 눈을 굴리며 사방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뭐야! 몰래 카메라라도 있는 거야?”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따위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게 더 서정익 작가를 불안하게 했다.
블랙 딜러가 보내준 차는 금세 도착했고 서정익 작가는 지난번처럼 그 차를 타고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장소로 이동했다.
이번에 두 번째였지만 서정익 작가는 왠지 이제는 이런 이동 방식이 익숙해졌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을 달린 후 도착한 곳에 블랙 딜러가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작가님.”
블랙 딜러는 첫인상과 달리 무척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대한 대로 서정익 작가의 손에 작품이 들려 있자, 그는 서정익 작가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작품이 매우 궁금하군요.”
서정익 작가가 작품을 건네자, 블랙 딜러는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품을 점한 블랙 딜러의 표정은 마치 얼음장처럼 몹시 차가워졌다.
어둡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오죽 두 사람의 얕은 호흡뿐이었다.
긴 침묵을 깨고 블랙 딜러가 물었다.
“작품 제목이 뭔가요?”
“<친구>입니다.”
서정익 작가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블랙 딜러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이 작품은 서정익 작가의 진심을 내포하고 있군요.”
블랙 딜러가 작품을 들어 올리자, 서정익 작가의 눈에 작품이 정면으로 보였다.
오한결, 노을, 최무열이 나란히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그림.
작품의 배경은 서정익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노을의 작업실이었다.
세 사람은 별다른 포즈도 없이 편안한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평범한 요소들로 가득한 그림인데도 그림은 무척 특별해 보였다.
마치 설명을 해보라는 눈빛을 블랙딜러가 보내자, 서정익 작가가 입을 열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흔히 말하는 베스트 프랜드죠.”
그리고는 작게 말을 보탰다.
“제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거였죠…….”
블랙 딜러는 서정익 작가의 얼굴에 나타난 진실성에 살짝 놀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이 그림 속 주인공들 얼굴에 보이는 편안함과 사랑스러움은 결국 서정익 작가의 내면의 모습일지도 몰겠습니다.”
“그런가요?”
서정익 작가가 쑥스러워하자, 블랙 딜러가 피식 웃었다.
“제가 일전에 거래할 그림을 달라고 했는데, 이걸 가지고 왔군요. 하지만 제가 판단하기엔 서정익 작가는 이 그림을 절대 팔 수 없어요.”
“왜 그렇죠?”
“너무 진심이 느껴지니까요. 절대 서정익 작가는 이 그림을 팔 생각으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이건 제 제안에 대한 거부 표신 거 같아요.”
블랙 딜러의 말에 서정익 자신도 적잖이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다. 블랙 딜러의 제안이 워낙 달콤해 거부할 수 없긴 했다. 하지만 그게 뭐든, 일단 그림을 그렸고 블랙 딜러에게 보여줬다.
오히려 서정익 작가의 마음은 블랙 딜러가 작품을 보고 해석해준 꼴이랄까.
“저 그림 속 세 분과 행복한 삶을 꿈꾸시는군요. 제가 제안한 화려한 부자의 삶이 아니라.”
마지막 블랙 딜러의 이 한 마디에 서정익 작가는 ‘아!’하고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맞아요. 제 마음이 그런 것 같습니다.”
블랙 딜러는 웃으며 그림을 서정익 작가에게 다시 건네줬다.
“예전에 말씀드렸듯이, 작가님 아버님에게 은혜를 갚고자, 제가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제 도움은 필요치 않은가 보군요.”
블랙 딜러는 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서정익 작가에게 내밀었다.
“비록 우리의 거래는 불발됐지만, 언제든지 작가님이 도움이 필요할 때면 연락 주세요.”
명함을 받아든 서정익 작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명함 속 그의 신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언젠가 연락 드릴 날이 있을 겁니다.”
서정익 작가의 말에 블랙 딜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모습을 보며 서정익 작가가 살짝 미소 지었다.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만났지만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던 굉장한 경험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언젠가 그의 도움이 필요한 날이 오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서정익 작가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 * *
분주하게 화물 차량이 움직이는 공사 현장 앞에서 홍철수 사장과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어설프게 서 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했다.
“유코아는 한국 미술 시장의 생태계를 파괴한다!”
“당장, 공사를 멈추고 상생 방법을 마련하라!”
“값싼 자본이 한국 미술 시장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다!”
홍철수 사장이 피켓을 높이 들고 목소리를 높이자, 그걸 본 사람들도 자신들의 피켓을 추켜세우고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공사 현장 아닌가.
대형 레미콘 차량의 엔진 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보다 높았던지, 주변 인부들은 그들의 외침에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온갖 소음이 들리고 먼지가 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홍철수 사장은 절대로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터무니없이 싼 가격, 품질의 저하, 미술 시장의 붕괴!”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저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그건 오한결과 노을, 최무열이었다.
홍철수 사장이 이번 시위가 위험한 공사 현장 근처에서 하는 만큼 오한결과 친구들이 혹시 다칠 수 있으니 근처도 오지 못하도록 신신당부했다.
서운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홍철수 사장의 진심을 이해한 세 사람은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위 참가자들이 걱정되기도 하고 일의 진행 상태가 궁금해 세 사람은 먼발치에서 시위를 바라보기로 한 것이다.
“아, 시위가 좀 그렇다…….”
시위자들의 외침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자, 노을이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SNS에 올렸는데, 이렇게 무관심일 줄이야…….”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에 최무열이 의기소침해졌다.
“그래도 기자들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오한결이 초라한 시위 현장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최무열의 말대로, 이번 시위는 SNS에 사전 정보가 퍼져 있었다. 그런데 왜 언론이 이렇게 관심이 없는 걸까.
북유럽 최대 기업인 유코아의 등장에 연신 팡파레를 터트렸던 언론이, 그들의 민낯을 고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뭔가가 있다!’
오한결은 지금 이 상황이 벌어지게 된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내가 나서야겠군!’
지금까지 홍철수 사장의 노력을 조용히 지켜보던 오한결은 이제 자신이 전면에 나설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 * *
“아니, 안 된다고요!”
“저리 비켜!”
“이러지 마세요. 여긴 아무나 들어갈 수 없어요.”
세종청사 문체부 장관실 앞에서 원로 예술가들이 장관실로 막무가내로 들어가려고 하자, 문한국 보좌관이 그들의 가로막으려고 기를 쓰고 있다.
그들의 실랑이가 벌어지던 순간, 한 노인이 문한국 보좌관을 슬쩍 밀치고는 재빨리 장관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체부 장관님!”
장관실에 발을 들인 노인이 소리치자, 문체부 장관이 굳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서 대답했다.
“아니……. 여기는 아무나…….”
이어서 다른 노인들도 속속 장관실로 들어왔다. 문밖에 서 있던 문한국 보좌관은 차마 이상민 장관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아, 밖에서 서성이며 서 있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전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저희 보좌관을 통해서…….”
“상민아, 이상민!”
자신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소리에 놀란 이상민 장관이 두리번거리며 그 당사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매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교수님?”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다고 했어.’
이상민 장관은 예술대 대학원 시절 자신의 지도 교수를 발견하고는 공손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자자, 다들 소파에 앉으시죠. 제가 여러분들의 얘기를 오늘 하루종일이라도 들어드리겠습니다.”
진땀을 흘리며 스승과 몇몇 노인들을 자리에 앉힌 장관은 눈치를 살피며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수가 소리쳤다.
“유코아 얘기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어찌, 정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지?”
역시 짐작한 대로 유코아 문제를 따지려고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한 이상민 장관은 들키지 않게 한숨을 푹 쉬고는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유코아의 진출은 법적인 문제가 없어요. 그리고 시장에 정부가 개입하는 건 옳지 않아요. 무엇보다 저는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는 문체부 장관입니다.”
교수의 눈빛에서 강렬한 의심의 불꽃이 튀었다.
“그건 변명일 뿐이야.”
“네? 교수님. 제가 설명드렸잖아요. 이건 법과 제도의 문제라고요.”
이상민 장관은 자신의 스승을 지그시 바라봤다. 사실, 대학 때도 굉장히 독특한 사고 방식 때문에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이분은 더 나이가 들수록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나 보다.
‘하긴, 그러니까 그런 훌륭한 예술 작품을 남겼을 것이다.’
예술가로서 존경하지만, 지금 그가 보인 행동은 억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상민 장관이 생각에 잠긴 사이, 교수가 말을 걸었다.
“자네가 어떤 식으로든 화랑거리를 돕고자 한다면 뭐든 했겠지.”
“…….”
“명심하게. 자네도 예술을 전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걸 잊으면 안 돼.”
그렇게 대략 2시간 가량, 노인들은 수십 년째 이어지는 화랑거리와의 인연을 마치 장황한 대하 드라마처럼 쉬지도 않고 말을 했다.
그리고는 문체부가 어떤 조치를 취하는지 두 눈 뜨고 지켜보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남겼다.
모두가 떠나자, 완전히 기가 빨린 이상민 장관이 의자에 몸을 묻고 문한국 보좌관을 불렀다.
“생각보다, 화랑거리의 영향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러게요. 그저 작은 미술품 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서로 만족할 만한 해결책은 없을까? 솔직히 유코아의 진출을 막을 수는 없잖아.”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문한국 보좌관이 대뜸 대답했다.
“사실, 제가 조사를 좀 해봤는데요. 오한결 작가가 화랑거리와 인연이 깊더라고요. 그분과 상의를 해보면 어떨까요?”
이상민 장관이 허리를 펴고 대답했다.
“그래! 오한결 작가가 있었지. 언젠가 한 번 보려고 했는데, 이번 기회에 삼각지 화랑 거리 얘기도 할 겸, 겸가겸사 한 번 만나봐야겠어. 어서 약속을 잡아봐!”
“네! 장관님.”
방금까지 울상을 하던 이상민 장관은 오히려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에 희미하게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