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지하경제
아트화랑에 다시금 대형 텔레비전이 등장했다.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는 긴장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며 TV를 시청하고 있다.
“곧 시작하겠네요.”
노을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 홍미숙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야옹이 마을 주민들도 작품을 좋아했다며, 그럼 된 거 아냐?”
“그래도 이번 방송은 지난번 다큐 후속 방송이잖아요. 야옹이 마을에서 드러난 동물 보호 문제가 얼마나 해결됐는지 그 점을 집중 취재했다고 했어요. 예고편에서요…….”
최무열이 이렇게 중얼대자, 서정익 작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우리 역할은 아니죠. 동물 보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게 우리의 역할일 뿐인 겁니다. 실제로 야옹이 마을을 변화시키는 건 군청 공무원들이 해야죠.”
서정익 작가의 말에 오한결이 동의하며 대답했다.
“맞아. 그러니까, 이번 방송은 편히 봐도 될 것 같아.”
“그래도……. 방송에서 우리 작품이 이상하다고 나오면 어떡해요…….”
노을이 중얼대는 사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송이 시작됐다.
모두 숨을 죽이고 대형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담당 피디가 여전히 평화로워 보이는 야옹이 마을에 도착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피디는 외형상 달라진 점이 없다고 말하며, 지난번 아픈 고양이들이 몸을 숨겼던 장소로 이동하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 고양이들 모두 구조됐나 보군요.]
습하고 더러운 장소는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그곳에 웅크리며 애절하게 울던 새끼 고양이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마을 전체를 골고루 보여준 후 인터뷰 영상이 이어졌다.
[어우, 말도 못해죠. 요 며칠 동안 전문가라는 양반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뭔가를 하더니, 그렇게 아픈 고양이들이 사라져 버렸다니까요. 소문으로는 모두 병원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하던데요.]
이번에는 혼자 팽이를 돌리며 놀던 아이의 인터뷰 모습이 나왔다.
[고양이들이요? 아파서 병원 갔어요. 아저씨 팽이 잘 돌려요?]
섬에 놀러 온 커플의 인터뷰도 이어졌다.
[방송 보고 궁금해서 놀러왔는데, 여기 엄청 좋네요. 진짜 고양이들도 많고요. 방송에서 보여준 이미지랑 완전 다른데요. 아! 피디님 고양이 작품 보셨어요? 저기 골목 돌면 마을 공터가 나오는데, 거기에 엄청 큰 고양이 작품 있던데요.]
커플의 인터뷰 내용을 듣자마자, 방송을 보던 노을이 소리를 질렀다.
“으악! 드디어 나오나 봐!”
잠시 뒤, 피디가 공터에 도착하자, 거대한 고양이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보면 누가 봐도 고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가까이에서 보니까 재활용 재료들을 마구잡이로 쌓은 듯 보이네요. 와, 상당히 독특한 작품입니다.]
담당 피디의 감탄사가 이어지고 곧이어 그 근처를 지나던 할머니의 인터뷰 장면이 나왔다.
[말도 말어. 밤에는 작품 밑에서 막 뭐가 나와서 얼마나 무서운디. 누가 그러던데. 아픈 고양이를 보여주려고 했다고. 어이구야, 이쁜 거 갖다 놓아도 좋으련만.]
할머니의 인터뷰 내용에 실망한 최무열이 고개를 숙이자, 오한결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힘내. 모두 칭찬만 할 순 없잖아.”
하지만 피디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노을의 작품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 그게 어떻게 동물 보호를 주장하는지 자세한 예술 이론을 거론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피디 양반이 꽤 똑똑하네.”
그 모습을 보던 홍철수가 중얼거렸다.
피디의 설명이 끝나고 잠시 작품을 화면에 담은 뒤, 해산 군청 사무실로 화면이 전환됐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태종 사무관의 인터뷰로 이어졌다.
[지난 방송 이후 우리 해산 군청은 야옹이 마을의 실태 조사를 마쳤고 동물보호 단체와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 동물 보호 단체들도 인정할 만큼 야옹이 마음에 사는 고양이들의 주거 환경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인터뷰 내내 긴장하던 이태종 사무관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야옹에 마을에 설치된 작품에 만족하는데요. 해산 군청에서 딱 원하던 아주 멋진 예술 작품입니다. 그걸 만들어 주신 세 분의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게 인터뷰가 끝나자, 담당 피디가 화면에 등장하여 지난 방송 이후 완벽하게 바뀐 야옹이 마을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곳에 설치된 상당한 수준의 예술 작품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훈훈하게 방송이 마무리되자, 그걸 바라보던 노을과 최무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환호성을 질렀다. 반면 서정익 작가는 덤덤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홍미숙이 준비한 만찬으로 맛있게 식사를 마친 후, 오한결이 서정익 작가를 따로 불렀다.
“아까는 무슨 일 있었어? 갑자기 그런 문자가 와서 깜짝 놀랐잖아.”
서정익 작가는 자신이 정정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거라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렸다.
“아, 그게……. 저도 너무 당황해서 그랬어요. 사실은요.”
서정익 작가는 자신에게 은밀하게 다가온 블랙 딜러에 대해 낱낱이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런 서정익 작가의 설명에 오한결이 흥미를 느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무척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블랙 딜러라는 존재에 흥미가 생긴 오한결이 대답했다.
“알았어. 내가 한 번 알아볼게. 블랙 딜러라니, 콘셉트 한 번 기가 막히네.”
오한결의 말에 서정익 작가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강남의 뒷골목에 자리한 허름한 빌딩.
1층에서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오한결은 전용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띵!
4층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생각보다 작은 사무실 풍경이 펼쳐졌다.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깔끔한 사무실 벽면에는 한눈에 봐도 고가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오한결 작가님.”
산다라가 웃음을 머금고 다가와 오한결을 살며시 포옹했다.
“사무실이 무척 깔끔합니다.”
“그래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해요.”
산다라는 오한결을 손님 접대용 테이블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잠시 안부 인사를 건네며 이야기를 나눴고 그 사이 오한결은 슬쩍 서정익 작가가 받았던 검은 우편물을 산다라에게 건넸다.
“오호! 이게 그거군요.”
산다라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우편물을 이리저리 살폈다.
“제가 서정익 작가에게 받은 거예요. 어떤가요? 블랙 딜러라고 아시나요?”
“물론이죠. 이 업계에서 유명해요.”
그녀의 말에 오한결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산다라가 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비밀에 싸여 있어요. 누구도 그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산다라도요.”
“저도 예외는 아니에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오한결은 블랙 딜러가 서정익 작자게에 했던 제안에 대해 설명했다.
오한결의 말을 듣던 산다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그건 엄청난 행운일 거예요. 블랙 딜러가 선택한 작가는 사실상 백만장자가 된다는 소문이 있거든요.”
오한결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과장이 있어보이네요.”
“훗, 그럴지도요. 하지만 분명한 건 돈방석에 앉는다는 건 변함없어요.”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산다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전 세계 신인 작가들의 데이터 베이스를 모두 구축했다고 한다.
사실상 그가 원하는 건 천부적인 재능의 신인이 아닌, 돈이 될 만한 그림을 그리는 신인이라고 했다.
“돈이 될 만한 그림이란 건 뭐죠?”
오한결이 묻자, 산다라가 바로 대답했다.
“오한결 작가님은 잘 모르실 거예요.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건 지하 세계의 검은 돈입니다. 하지만 그 한계도 명확하죠. 어둠 속에서는 빛을 보지 못 하니까요.”
“그 말은, 지하 세계 돈을 현실 세계로 끌어 들이는데 작품을 이용한다는 건가요?”
“빙고! 꽤 그럴 듯 하지만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작품들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하는 겁니다. 그렇게 팔린 그림은 절대로 가격이 변동되지 않아요. 일종의 수표같은 역할을 하죠.”
“그림을 거래하는 거지만, 사실상 지하 세계 돈을 현실에서 거래하는 것과 마찬가지겠군요.”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입막음용으로 작가에게도 엄청난 수수료를 챙겨주고요.”
오한결의 이해력에 감탄한 산다라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소문만 들었지, 그걸 실제로 본 적은 없어요.”
오한결은 산다라의 설명에 무척 혼란을 느꼈다.
물론 예술가에게 돈의 문제는 중요하지만 그게 검은 돈의 세탁용으로 자신의 그림이 활용된다면 서정익 작가의 성격상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산다라는 그런 오한결의 생각을 단번에 간파했다.
“서정익 작가가 그걸 싫어한다는 보장은 없어요. 말씀드렸듯이 천문학적인 돈이 오고 갑니다.”
오한결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은 서정익 작가가 해야 해요.”
다시금 들려오는 산다라의 진심어린 충고에 오한결은 고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니까.
* * *
“오한결 작가가 한국에 왔단 말이지…….”
이상민 장관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숨을 내쉬자, 모습에서 희열을 느낀 문한국 보좌관이 감정을 숨기며 대답했다.
“조만간 식사 자리라도 마련할까요?”
“아니야!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이상민 장관은 그간 소더비와 크리스티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마치 자신이 오한결 작가의 뒷배인 것처럼 행동했는데, 그게 은근히 중독성이 강해서 그만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소더비와 크리스티 모두에게 오한결 작품을 경매에 부칠 수 있도록 약속했었다.
“근데 내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무슨 또 엉뚱한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문한국 보좌관이 장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장관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그의 눈빛 따위에 관심조차 없었다.
“지금 한국에서 오한결 작가와 가장 친한 건 누구보다 나 아니겠어? 내게 그 유명한 교육방송 그림 한 점을 선물할 정도니까.”
“네……?”
“오한결 작가를 잘 설득하면 기꺼이 그 경매 업체들에게 그림을 넘길 거야. 그렇지?”
“모르죠……. 그러지 마시고 오한결 작가님을 만나서 솔직하게 얘기를 하세요. 소더비와 크리스티가 교육방송 그림을 원한다고. 그리고 지금까지 오한결 작가님을 대신해서 장관님이 그들을 상대하고 계셨다고요.”
왠지 장관은 자신이 사기꾼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찜찜했다.
무슨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오한결의 신뢰를 얻을 만한 대책이 필요했다.
“알았어. 그 전에 우리도 준비를 좀 해야지. 요즘 이슈 없어?”
“아! 하나 있어요. 내일모레, 삼각지 화랑거리 사장들이 시위를 한다고 합니다.”
“뭐 때문에? 갑자기?”
문한국 보좌관은 스위스 대기업 유코아의 등장으로 삼각지 화랑거리의 상권이 위태로워질 거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래? 하지만 시대가 변하는데, 그걸 막을 수 있을까?”
이상민 장관이 회의적인 시선을 보이자, 문한국 보좌관이 답답해했다.
“앞일은 생각하지 마시고 현재를 보세요. 이건 기회입니다. 장관님이 화랑거리 사장들에게 힘을 보태주시면, 오한결 작가님이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아시잖아요. 오한결 작가가 화랑거리를 얼마나 많이 아끼는지를요.”
문한국 보조관의 전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동안 잔뜩 구겼던 얼굴을 펴며 장관이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먼! 좀 더 시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게!”
“네! 장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