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비즈니스 미팅
오한결이 아트화랑에 들어오자, 홍철수 사장과 홍미숙이 무척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나. 도대체 이거 얼마 만이야!”
“오한결 학생! 어서 와요. 어머! 얼굴이 반쪽이 됐네!”
진심으로 반기는 두 사람의 마음 덕분에 오한결이 무척 기분이 좋은지 방긋 웃어 보였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뉴욕에서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오한결이 테이블에 앉자, 음료수를 건네며 홍철수가 말했다.
“알다마다. 노을하고 최무열 학생이 자네의 활약상을 모두 말해주고 갔네.”
그러면서 오한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홍철수가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세계적인 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거야.”
“오빠! 그건 프랑스 출장 때부터 그랬어요.”
“아? 그렇지. 하하.”
오한결도 쑥스러운지 살짝 붉어진 얼굴로 그저 미소짓기만 했다.
잠시 소소한 대화를 나누던 오한결은 홍철수 사장 얼굴에 은근히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평소 고민으로 잠 못 자는 사람들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이제는 그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할 때라고 생각한 오한결이 용기내 말했다.
“사장님, 최근 화랑거리 근처에 대기업 매장이 생긴다면서요.”
오한결의 한 마디에 방금까지 싱글벙글 웃음을 짓던 홍철수의 표정을 싹 굳어졌다.
“자네도 이미 소식을 들었군.”
“네, 모두 들었습니다. 화랑거리 출신 예술가와 화랑 사장들도 모였다면서요.”
“맞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더 있겠나? 전 세계 시장을 휩쓴 외국계 기업이 우리 생존권을 위협한다는데, 가만히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을 마친 홍철수 사장이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도 잘 알고 있네. 우리의 노력이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홍미숙이 홍철수 사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봐야죠. 그게 우리의 계획이잖아요.”
“그렇지. 결과가 아닌 과정에 충실하기로 했지.”
“저기…….”
두 사람의 대화를 진득하게 듣던 오한결이 입을 열자, 두 사람의 시선이 그의 입으로 쏠렸다.
“제가 도움을 드려도 될까요?”
“자네가?”
홍철수는 진심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었다. 오한결은 이제 막 세상에 이름을 알린 순수 예술가이다. 그런 그를 이용해서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면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오한결 작가는 신경 쓰지 말게나. 이번 일은 우리 일이야.”
홍철수 사장의 단호한 말에 살짝 놀란 오한결은 굳이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은 서운했다.
그가 말한 ‘우리’에 오한결 자신은 들어가지 못하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철수 사장이 오한결의 명성에 누가 될까 내린 결정인 만큼 오한결은 그를 최대한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갑자기 어색해진 두 사람은 말없이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홍미숙은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에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차라리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풀릴까 싶어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가 간식을 하나 만들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숨 막히는 어색함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때마침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아트화랑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오한결 작가님!”
“형님!”
“안녕하십니까. 오한결 작가님.”
단숨에 분위기가 활기차게 바뀌자, 그제야 오한결도 긴장을 풀고 세 사람을 즐겁게 맞이했다.
“이야, 다들 피곤해 보이네. 어제 야옹이 마을 갔다 와서 그런가?”
“말도 마세요. 왕복 10시간이 넘었어요.”
최무열이 피곤해 죽겠다는 듯 울상을 짓자, 오한결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 수고했어.”
방금까지 웃고 있던 노을이 울상을 짓자, 오한결이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야옹이 마을 얘기만 나오면 우울해요.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할지 아직도 헤매고 있어요.”
“어제 방문한 고양이 마을에서 영감을 못 얻은 거야?”
그 말에 어떤 생각에 빠진 노을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느낌은 와요. 어떤 느낌의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지. 하지만 어떤 소재로 어떤 크기로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잠시 고민하던 오한결이 노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노을은 재료를 독특하게 쓰기로 유명하잖아. 평소 하던 대로 해. 그럼 되는 거 아냐?”
오한결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최무열이 소리쳤다.
“맞아!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지. 괜히 잘 만들려고 하니까 막히는 거야.”
“평소 하던 대로?”
노을이 확신을 못하자, 오한결이 도와줬다.
“재료를 독특하게 쓰잖아. 고급 재료 따위 생각하지 말고, 평소 쓰던 그런 재료를 활용해봐. 손에 재료가 닿는 순간 어떤 모형으로 만들어야 할지 바로 떠오를 수 있어.”
오한결의 조언에 뭔가 깨달음은 얻은 노을은 몹시 초조한 얼굴을 했다.
“나, 지금 가야할 것 같아.”
그 말에 최하늘이 놀라 물었다.
“왜? 어디 아파?”
“아니, 빨리 가서 작업하고 싶어서.”
오한결은 그런 노을을 보며 마음 속으로 그녀의 성공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 * *
데이비드 오 교수가 아리 미술관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뒤, 그 뒤로 산다라가 모습을 나타냈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
“산다라? 여기 웬이죠?”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산다라를 보니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말했다.
“이상하게 오늘 여길 와 봤으면 했거든요. 그리고 어쩌면 데이비드 오 교수님도 왔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산다라의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산다라는 촉이 좋군요.”
“칭찬으로 들을게요.”
산다라가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선 데이비드 오 교수 작품 설명을 읽기 시작했다.
「작가 : 데이비드 오
설명 : 작가는 다양한 미디어 요소를 활용해 ‘위대한 대한민국’ 메시지를 작품 속에…….」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군요.”
산다라가 나직이 속삭이자 데이비드 오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래 걸렸지만, 결과적으로 잘 됐죠.”
“속이 시원한가요?”
“한 편으론 그렇죠. 하지만 나를 미워하는 미국인들이 많아서 마냥 좋지만은 않네요.”
산다라가 데이비드 오 교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 한국인 팬들이 더 늘어났으니, 좋게 생각하세요.”
산다라의 위로에 마음이 풀린 데이비드 오 교수가 편안한 마음으로 작품을 유심히 살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여전히 산다라가 서 있었다.
“아직 안 갔군요.”
“어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마 제가 혼자 갈까봐서요?”
“아, 하하. 근데 사업을 새로 시작하셨다면서, 아트 딜러라 그랬죠? 안 바쁜가요?”
산다라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바쁘죠. 그래서 여기 온 것도 있고요. 잠시 얘기 좀 나누시죠 작가님. 이제 비즈니스 얘기를 할 때가 됐어요.”
데이비드 오 교수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산다라를 매우 신뢰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래요. 얘기를 나눠보죠!”
* * *
“으아악!!”
노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자, 최무열이 깜짝 놀랐다.
“누나! 정신 차려!”
“아냐. 이게 아니란 말이야.”
노을이 한숨을 푹푹 쉬며 이번에도 망친 작품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오한결의 조언을 듣고 바로 작업에 착수했지만 벌써 두 번이나 작품을 갈아엎었다.
물론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와 함께 만들다 보니 흠잡을 데 없이 그럴듯한 작품이 나왔지만 아쉽게도 그건 노을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 아니었다.
“분명, 우리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게 분명해.”
노을이 활활 타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최하늘과 서정익 작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켜 멍하니 그녀를 볼 뿐이었다.
사실 노을에게 팀 리더 자리를 준 건 여러 이유가 있어서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노을이 이번 프로젝트의 기반을 다졌고 처음부터 그 방향을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수적인 이유도 있는데, 최무열은 대학생이라 항상 과제에 치여 살았고 서정익 작가도 조만간 개인전을 할 예정이라 이번 프로젝트에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지난번, 화랑거리 조각상 때도 노을이 성공적인 리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믿었는데 이번만큼은 노을이 스스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누나!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그걸 정하고 시작해야지, 무작정 작품만 만들면 어떡해?”
어제도 밤새서 학교 과제를 한 최무열은 참고 참았던 화를 폭발시켰다.
하지만 노을은 무척 혼란스러워 그런 최무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던 서정익 작가가 말했다.
“안 되겠어요.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지겠어요.”
가까스로 소파에 엉덩이를 걸친 노을이 물었다.
“큰일이요?”
“네. 망할 거라고요.”
“!!”
“다들 번아웃이 왔잖아요. 이건 밀어붙여 될 건 아니네요. 무조건 휴식이 답입니다.”
“하지만 작품을 만들어야…….”
끝끝내 노을이 고집을 꺽지 않자, 최무열이 소리쳤다.
“누나! 이제 그만해. 우리는 지금 쉬어야 해. 지금 누나 모습이 어떤지 알아?”
“어떤데?”
“좀비 같아. 그것도 아주 독한 좀비.”
그 말에 노을이 웃긴지 피식 웃으며 최하늘과 서정익 작가를 바라봤다. 살짝 여유가 생겨서 그런 걸까? 이제야 노을의 눈에 꼭 좀비를 닮은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나만 좀비가 아니네.”
노을이 자리에서 펄떡 일어서더니 말했다.
“그래, 좀 쉬자고. 내가 너무 밀어붙인 거 같아. 너무 미안하게 생각해.”
그렇게 세 사람은 각자 휴식의 시간을 보내기로 합의를 봤다.
우선 간단하게 야식을 먹으려고 했는데, 서정익 작가가 치킨을 고집하는 바람에 무거운 식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치킨을 먹는 서정익 작가가 무척 행복해 보여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치킨은 사랑입니다.”
“아, 네.”
“…….”
그렇게 배를 채운 세 사람은 간이 침대를 나란히 놓고 몸을 뉘였다.
“딱 세 시간만 수면을 하자고.”
노을이 그렇게 말하자, 최무열이 투덜댔다.
“그거 갖고 되겠어?”
하지만 서정익 작가에겐 충분했던 것 같다.
“좋은 수면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수면의 질입니다.”
“아……. 네.”
아주 간단한 대화를 나눴는데도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주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그사이 노을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뛰어노는 새끼 고양이의 어렴풋한 모습.
너무 귀여워 다가가려 하지만 새끼 고양이는 더 도망가고 만다.
‘어디가? 이리 와봐!’
그렇게 한참을 새끼 고양이를 쫓아다닌 끝에 결국 고양이를 발견한 노을은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손으로 잡아 올렸다.
끼야약!!
자지러지게 소리치는 새끼 고양이.
깜짝 놀란 노을이 고양이를 살펴보려 하지만 고양이는 끝까지 저항한다.
끼야약!!
‘어디 보자? 다친 거야? 그래서 아파서 소리 지르는 거야?’
두 손에 꽉 잡힌 고양이의 모습을 아무리 살펴봐도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근데 왜 소리를 지른 거니?’
노을의 소리를 들었는지, 고양이가 다시금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
끼야약!!
‘분명 뭔가가 있구나.’
새끼 고양이의 몸에 작은 상처가 있을까 싶어 휴대폰을 꺼내 플래시를 비춰봤다.
그러자 빛이 몸을 비추는 순간, 고양이의 전신에서 지독한 상처 자국이 짙게 드리웠다.
피부는 짓물러 고름이 나오고, 털은 거의 다 빠져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보던 노을이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안 돼!!!”
노을의 고함에 깜짝 놀란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가 동시에 소리쳤다.
“괜찮아요? 악몽 꿨어요?”
고개를 끄덕이던 노을이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할지 정확히 알겠어. 이제 다시는 실패하지 않아.”
노을이 작품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사이, 피곤에 찌든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는 금세 잠이 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