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아트 딜러
인천공항에 도착한 오한결 일행은 한국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꼭 몇 년 있다가 온 것 같네요.”
최하늘이 웅장한 인천공항을 둘러보며 기쁜 말투로 말하자, 데이비드 오 교수도 맞장구쳤다.
“나도 그렇군.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였어.”
이제 휘트니 미술관에서 사라져버린 자신의 작품을 떠올리자, 그의 얼굴에는 아쉬움보단 후련함이 활짝 피어올랐다.
오한결은 그의 심경 변화를 온전히 느끼며 대답했다.
“이제 한국에서 볼 수 있잖아요. 자주 가서 보세요.”
“아하하. 그래야겠군. 이제야 내 작품 앞에서 떳떳하게 됐어. 고맙네, 오한결 작가.”
두 사람의 훈훈한 분위기에 감동한 최하늘이 한 마디하고 싶어 끼어들었다.
“다음 주부터 아리 미술관에서 전시한대요. 꼭 오세요. 교수님!”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인천공항을 나서려는데,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
“오한결 작가님!!”
산다라가 손을 마구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모두 반가운 마음에 같이 손을 흔들며 다가가다가, 문득 그녀 옆에 곱게 나이든 할머니 한 분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세 사람의 시선을 눈치챈 산다라가 자신의 어머니를 소개했다.
“어머니야. 어때 너무 예쁘시지.”
잦은 야외활동으로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는 산다라와 피부색은 확연하게 달랐지만 웃을 때 산다라가 풍기는 묘한 매력을 그대로 그녀의 어머니는 보여주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산다라의 어머니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 딸을 찾아주셔서.”
어머니가 선한 눈매로 오한결을 보며 고개를 숙이자, 놀란 오한결도 깊게 몸을 숙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어머니께서 산다라에게 보낸 편지 때문인걸요.”
오한결이 살짝 당황스러워하자, 데이비드 오 교수가 도와주려는지 슬쩍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산다라의 친구 데이비드 오입니다.”
“어머나. 참으로 멋진 분이시네요.”
중년의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이비드 오 교수를 보면서 산다라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엄마!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얼굴이 붉어진 산다라는 민망함을 감출 길이 없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자 여기 명함 받으세요.”
산다라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오한결과, 최하늘, 데이비드 오 교수에게 나눠줬다. 명함을 살피던 오한결이 산다라 이름 옆에 ‘아트 딜러’라는 명칭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우. 산다라가 새로운 일을 시작했군요.”
“뭐, 재즈클럽보단 별로지만 그래도 재밌을 것 같아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거든.”
“언니! 멋지다. 이거 정말 쉽지 않은데. 그래도 언니는 전 세계에 친구가 많잖아요. 원래 이 직업이 정보력 싸움인데, 거기서 유리할 거예요.”
“맞아. 그래서 예전부터 하고 싶었어.”
산다라가 자신의 어머니를 슬쩍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하면서 한국에 정착하고 싶기도 했고.”
그러면서 오한결을 보면서 살짝 윙크했다.
“언젠가 오한결 작가 그림도 꼭 거래할 거야. 각오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하.”
오한결이 기분 좋게 응수하자, 금세 분위기가 매우 밝아졌다.
이제 그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오랜 뉴욕 생활의 피로를 풀 차례였다.
* * *
다음 날 오후,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오한결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거실에서 앉아서 불안한 얼굴을 한 가족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어디 아픈 거 아닐까?”
아버지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말하자, 어머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외 일정이 빠듯했나 보죠. 얼마나 힘들었으면 12시간을 넘게 잘까요?”
“사람이 12시간을 어떻게 자?”
오한수가 입을 삐죽 내밀고 말하자, 어머니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한수야, 너 주말마다 12시간씩 자잖아. 잊었니?”
“그랬나? 하하하…….”
그렇게 두 시간이 더 흐르고, 어머니가 늦은 점심을 차린 뒤 오한결 방문 앞을 서성거렸다.
“여보! 열어 봅시다. 저도 갑자기 걱정이 되네요.”
어머니의 한 마디에 오준근과 오한수가 재빨리 오한결 방문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오한수가 재빨리 손을 뻗어 방문을 열었다.
암막 커튼으로 가려진 방은 몹시 어두워서 오한결의 형체만 어렴풋하게 보였다.
잠시 숨죽여 오한결을 쳐다보던 가족은 갑자기 환한 표정으로 방문을 닫았다.
“코를 골고 자고 있네요.”
그때야 아버지는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말 했잖아. 피곤해서 자는 거라고.”
“당신이 언제, 그건 내가 아까 말한 거죠.”
부모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금세 배가 고픈 오한수는 식탁에 앉고 소리쳤다.
“그게 뭐가 중요해요. 지금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다고요.”
밥그릇에 불고기를 산처럼 쌓는 모습을 본 어머니가 오한수를 나무랐다.
“형 것도 좀 남겨둬.”
잠시 멈칫한 오한수가 씨익 웃었다.
“저녁 때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땐 메뉴가 달라지니까…….”
한편 오한수의 떠드는 소리에 오한결은 이미 침대에서 눈을 뜬 채 누워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여독에 오한결이 몸을 뒤척이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번뜩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고 보니, 오늘 친구들이 야옹이 마을에 간다는 날이구나.’
* * *
야옹이 마을 입구에서 노을이 눈 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언제봐도 너무 멋진 곳인 것 같아.”
신선한 해풍이 얼굴을 스치자, 최무열도 눈을 감고 말했다.
“공기부터 달라.”
하지만 서정익 작가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우리는 놀러 온 게 아닙니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잖아요.”
서정익 작가의 지적에 살짝 민망해진 노을이 히죽 웃으며 대답하자, 서정익 작가도 그건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우리는 어서 고양이들의 실태를…….”
서정익 작가가 말을 하는 도중, 고양이 한 마리가 유유자적 그들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실태를…….”
당황해서 말을 잠시 멈춘 서정익 작가가 힘겹게 말을 이어가려는데, 다른 고양이 한 마리가 서정익 작가 앞에서 발라당 누워버렸다.
최무열이 두 고양이 앞에 쭈그려 앉고는 이렇게 말했다.
“실태는……. 고양이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건가요?”
누가 봐도 여유롭고 행복해 보이는 고양이들 모습을 보면서 아무도 그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을이 당황한 서정익 작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설마, 오자마자 병들고 아픈 고양이들이 지천에 깔려있는 그런 걸 상상한 건 아니죠?”
“…….”
서정익 작가가 대답이 없자, 노을이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에 같이 왔었잖아요. 여기 대다수의 고양이들이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고양이들이 영역 동물이다 보니까, 소수의 고양이가 무척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요. 그 실태를 직접 보러 온 거잖아요…….”
검은 고양이가 서정익 작가의 발에 매달리자, 서정익 작가의 몸이 잔뜩 굳어버렸다.
“아, 알아요. 근데 얘 좀 떼어 주세요. 절 공격하려고 그래요.”
서정익 작가의 말과 반대로 검은 고양이는 서정익 작가가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을 다리에 비벼대며 자신의 영역 표시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노을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만 검은 고양이의 마음을 받아주세요. 작가님.”
고양이들도 이제는 세 사람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슬그머니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마지막까지 남았던 검은 고양이마저 사라지자, 세 사람은 서서히 고양이 마을 안쪽으로 이동했다.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세 사람은 지난번 그들이 벽화를 그려줬던 할머니 집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노을이 쪼르르 달려가 벽화를 마주했다.
“이야, 다시 보니까 새롭네.”
최무열은 자신이 만든 고양이 집이 여전히 담벼락 아래에 예전 모양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양이 집도 그대로 있네. 헤헤.”
서정익 작가는 대문 안쪽을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 모습을 보였다.
“작가님, 뭐 찾아요?”
“아……. 그때 휠체어 만들어준 고양이가 있나 해서. 안 보이네…….”
세 사람의 말을 들었는지, 할머니가 드드륵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자네들 왔구나!”
반가운 마음에 할머니가 밖으로 나오자, 휠체어를 탄 새끼 고양이도 재빨리 따라 나왔다.
그 모습에 감동한 서정익 작가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완전히 휠체어에 익숙해졌구나…….”
할머니가 세 사람을 향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유, 말도 마. 자네들이 갔다 온 뒤로 뭐냐, 방송국에서 막 뭘 찍어가더니, 동물 단체랑 공무원들이랑 수시로 이곳을 왔다 갔다 하지 않았는가. 어우, 생각만 해도 정신 사나워 죽겠어.”
할머니의 말에 흥미를 느낀 노을이 물었다.
“동물 보호 관련해서 방문했나 보네요. 그들이 무슨 조치를 취했나요?”
“조치는 개뿔. 기록을 남긴다고 사진만 엄청나게 찍어갔어. 뭐 한 달 뒤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가더라고.”
최무열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무슨 사진을 찍어갔을까요?”
“그게? 저기 담벼락에 숨어든 고양이들 찍어가더라고. 마을 곳곳에 그런 고양이들이 좀 있거든.”
“어머! 불쌍해라.”
노을의 말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거야. 솔직히 지금 밖에서 잘 사는 놈들 밥 챙겨주기도 너무 벅찬데 아픈 놈들까지 보살필 여력이 없었지. 테레비에서 뭐라고 지적을 하는데, 솔직히 얼굴이 화끈거렸다니까. 하지만 보다시피, 그 이후로도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한 표정을 짓는 할머니를 향해 노을이 활짝 웃어보였다.
“할머니 잘못이 아니에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문제였던 거죠. 이제 동물단체하고 정부가 도와준다고 하니까, 좀만 더 기다려봐요.”
그제야 할머니가 마음이 풀렸는지 애써 웃어보이자, 노을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근데 할머니, 혹시 저희도 동물단체가 살펴본 곳 볼 수 있을까요?”
할머니가 무슨 말이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잠시 고민하던 노을이 이렇게 말했다.
“아픈 고양이들 보고 싶어요.”
“아! 그 불쌍한 것들.”
그러더니 할머니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서와! 보고 싶다며.”
할머니의 불호령에 세 사람이 재빨리 뒤따라 갔다.
할머니는 마을 곳곳 숨겨진 장소를 찾아가서 아픈 고양이들을 보여줬다.
영역 다툼에서 밀려난 연약한 고양이들이 낯선 사람들이 다가오자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경계를 했고, 몇몇은 피부 질환을 앓아 털이 많이 빠진 고양이들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다리를 저는 고양이부터 낑낑 신음 소리를 내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고양이까지 처참한 그들의 모습을 어둡고 음습한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들이 그런 더럽고 열악한 환경에서 비장하게 버티는 것을 본 노을은 뭉치가 생각나 눈시울을 붉혔다.
“괜찮아? 아가씨가 눈물이 많네.”
할머니가 위로하자, 노을이 애써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제가 이 문제를 세상에 알려야겠어요.”
놀란 할머니가 물었다.
“어머나! 아가씨도 방송국에서 왔는가?”
“아뇨. 저는 예술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