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새로운 시작
“이제 뉴욕 일정도 거의 마무리 됐네요.”
아쉬움에 최하늘이 중얼거리자,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전 여기 재즈클럽이 제일 그리울 것 같아요.”
“에이, 수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혹시 제가 일정을 너무 많이 잡아서 힘드셨나요?”
맥주병을 테이블에 급하게 내려놓고 최하늘이 묻자, 오한결이 손사래를 쳤다.
“누누이 말하지만 저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너무 재밌었죠. 하하.”
오한결의 반응에 다시 평정을 찾은 최하늘이 히죽 웃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최하늘이 본능적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어라, 로건이 왔네요. 요즘 자주 오는 것 같아요.”
로건 뒤로 리나도 따라 들어오자, 최하늘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최하늘을 발견한 리나가 로건과 함께 다가왔다.
“하늘 씨, 벌써 많이 마신 거 아니죠?”
“아니죠. 오늘은 천천히 그리고 많이 마실 거예요. 며칠 후면 여길 떠나잖아요.”
어느새 테이블 빈자리를 차지한 로건은 아쉬운 표정으로 오한결을 바라봤다.
“작가님 때문에 최근 너무 행복했는데 말이죠. 이렇게 한국으로 가시면 심심해서 어떡합니까. 조금만 더 머무시면 안 되나요?”
오한결이 로건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보며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정해진 기간보다 훨씬 많이 머물렀어요. 이제 한국의 일상으로 돌아가야죠.”
“할 수 없군요. 제가 한국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그 말을 들은 리나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도요. 같이 가요, 한국.”
최하늘이 물었다.
“두 사람은 한국은 처음이에요?”
“아니요. 사업 때문에 자주 갔었습니다.”
로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대답했지만 리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저는 처음이에요. 솔직히 너무 가고 싶어요. 제가 K-POP을 사랑하거든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한국에 가면 모두 아이돌처럼 생겼나요?”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로 리나가 묻자, 최하늘이 억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도요…….”
상당히 리나가 기쁜 표정으로 탄성을 질렀다.
“빨리 가야겠어요! 한국은 정말로 천국이군요.”
최하늘이 슬슬 오한결을 쳐다보며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오한결은 그저 히죽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이제 곧 뉴원 애비뉴가 새 단장 하는데, 분위기를 띄울 방법이 없을까요?”
로건의 말에 최하늘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홍보는 아주 잘 됐잖아요. 뉴욕 사람들 중에 뉴원 애비뉴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에이, 그건 그거고. 저는 새로운 뉴원 애비뉴의 시작을 알리는 아주 멋진 이벤트를 하고 싶어요.”
“흐음…….”
로건이 진지하게 고민하자, 리나가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로건! 정말 이러기에요?”
“네?”
“내가 있잖아요. 무대를 마련해 주세요. 그 새로운 시작, 제가 스타트를 끊어 볼게요!”
“아! 정말요? 저는 리나가 워낙 바빠서 부탁하기를 주저했죠.”
로건이 속내를 드러내자, 그제야 리나가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전 언제든 로건을 돕고 싶으니까요. 지금도 제게 꿈같은 기회를 주고 계시잖아요.”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최하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다.
‘뭐지, 이 묘한 분위기는.’
그런 최하늘을 보습을 보면서 오한결은 바보처럼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 * *
모든 언론사에서 예술마을로 탈바꿈한 뉴욕 애비뉴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자,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이곳으로 물밀 듯이 몰려왔다.
마을 곳곳에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유독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은 오한결의 작품이 있는 마을 입구였다.
그 군중 속에 이현미 관장과 한소정 큐레이터도 있었다.
“세상에 딱 봐도 오한결 작가 작품이군요. 완성도 면에서 따라잡을 작가가 없을 거예요.”
한소정 큐레이터가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리자, 이현미 관장도 그녀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마음으로, 이 작품이 여기 있는 게 아깝습니다. 한국에 있어야 하는데.”
“어머! 저랑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관장님.”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며 깔깔깔거렸다.
“저도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자, 신수진 이사장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수진아!”
이현미 관장이 딸을 가볍게 포용하며 말을 이었다.
“아직 뉴욕에 있었구나. 난 또 한국으로 간 줄 알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올 걸 그랬다.”
“어머니. 저 역시 어머니가 한국에 먼저 가신 줄 알았다고요.”
“그랬니?”
이현미 관장이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신수진 이사장이 피식 웃어 보였다.
뒤이어 한소정 큐레이터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사장님.”
“네, 한 큐레이터님. 데이비드 오 교수 작품 건은 잘 해결됐나요.”
“물론이죠. 그때 전화로 말씀하신 대로 됐습니다. 정말로 알베르토 관장은 데이비드 오 교수에게 마음이 떠났던데요.”
“물론이죠. 타이론이 나타났으니까요. 진짜 미국적인 작가잖아요.”
그 말에 세 사람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알베르토 관장과 대면했던 세 사람은 그가 얼마나 미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천천히 오한결의 작품을 구경하던 신수진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놀라운 작품이네요. 오한결 작가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글쎄다. 아마도 한계가 없는 것 같구나.”
덤덤하게 이현미 관장이 대답하자,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직까지는……. 어쨌든 빨리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어요. 뉴욕에 머물수록 이곳에 계속 작품을 남기잖아요. 한국에 남겨야죠.”
“달리 생각해 보면 더 좋은 거지. 한국에만 있기에는 너무 큰 사람이잖니.”
신수진 이사장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현미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여전히 예술 시장 규모로 따지면 매우 작은 나라이니까.
‘큰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들어 신수진 이사장이 한소정 큐레이터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오한결 작가에게 장소는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는 어딜 가든 기적을 만들어 내니까요.”
“정답이네.”
신수진 이사장의 마지막 말에 세 사람이 활짝 미소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깜짝 이벤트를 알리는 목소리가 마을 곳곳에 울려퍼졌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뉴원 애비뉴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고자,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현 시간부로 약 한 시간 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가수 리나가 중앙 광장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콘서트가 있을 예정이오니…….]
“어머! 리나라면 오한결 작가와 퍼포먼스를 같이한 가수 아닌가요?”
한소정 큐레이터가 놀란 얼굴을 짓자, 나머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중앙 광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JFK공항으로 오한결을 배웅나온 강철 지부장이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런, 그새 정이 들었나 보네요. 왜 이렇게 아쉽지요?”
“제가 좀 오래 머물러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오한결이 민망한지 괜히 웃어 보이자, 강철 지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20년째 뉴욕 지부에서 근무하는데 최근이 가장 흥미진진했던 것 같아요, 하하. 언제든 또 뉴욕에 오세요. 저희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강철 지부장이 이번에는 최하늘을 바라봤다.
“하늘 씨도 수고 많았어요. 역시 일 처리 하나는 완벽하다니까요. 사실 하늘 씨 덕분에 내가 거의 한 게 없을 정도에요.”
“감사합니다. 지부장님.”
최하늘이 쑥스러워하며 대답하자, 그 모습을 본 윌리가 잠시 멈칫하더니 용기 내 말했다.
“그건 맞는 말이에요. 하늘 씨가 워낙 꼼꼼하고 일을 잘 하니까요.”
항상 투덜대기만 하던 윌리가 그렇게 말하자 최하늘이 의외라는 듯이 쳐다봤다.
“뭘 그렇게 봐요. 나도 할 말은 한다니까.”
부끄러운지 윌리가 얼굴이 붉어진 채로 대답하자, 최하늘이 방긋 웃었다.
“고마워요. 앞으로도 자주 연락해요.”
“물론이죠.”
“아, 그리고!”
윌리가 깜짝 놀란 얼굴로 주머니를 뒤진 후 편지 봉투를 꺼냈다.
“와, 깜빡할 뻔했네요. 이건 타이론이 작가님한테 주는 편지에요. 오늘 부득이하게 행사가 잡혀서 못 왔잖아요.”
편지를 받아든 오한결이 생각보다 두꺼운 편지지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윌리가 눈치채고 말했다.
“저도 그렇게 두꺼운 편지는 처음 봐요. 오한결 작가님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나 봐요. 뭐, 그렇다면 그 정도 두께는 당연히 나오겠죠. 하하.”
네 사람이 서로 마지막 안부를 물으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사이,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데이비드 오 교수와 앤드류가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자네한텐, 잊지 못할 출장이었겠군.”
앤드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데이비드 오 교수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맞아. 쉽지 않았어.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 내가 과거를 고백하게 될 줄.”
“오한결 작가를 원망하는 건가?”
앤드류의 단호한 말에 데이비드 오 교수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절대 아닐세.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어.”
“앞으로 작품 활동에 제약이 걸릴 걸세. 아마도 신용 점수가 깎였을 테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안 그랬으면 평생 죄책감에 짓눌러 살았을 테니까. 당분간은 대학교에서 강의에 집중할 생각이야.”
살짝 희망을 품은 얼굴로 앤드류가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뉴욕대로 다시 오는 건 어떤가? 총장님하고 얘기해 봤는데, 자네가 온다면 언제든 환영한다고 하셨네.”
“국립예술교육원이 난 더 좋아. 자네는 아마 모를 거야. 한국 학생들이 가진 그 대단한 잠재력을.”
“잘 알고 있지. 저기 오한결 작가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엄청난 잠재력을 소유한.”
살짝 뒤를 돌아본 데이비드 오 교수가 오한결을 힐끔 쳐다봤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좀 다르네. 오한결 작가는 워낙 특별한 사람 아닌가?”
“그건 그래.”
“그리고 이미 나를 뛰어 넘어섰네.”
데이비드 오 교수가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 내용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앤드류가 주춤했다.
하지만 데이비드 오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자네도 인정하게. 현존하는 기성 작가들 중에 오한결을 따라잡을 수 없어. 앤드류, 오한결은 자네의 실력 또한 뛰어넘었네.”
그동안 오한결이 보여줬던 마법 같은 퍼포먼스와 완벽한 작품 이미지가 앤드류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리고는 옅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맞아. 하지만 인정하기 쉽지 않긴 한가 보네. 선뜻 말이 안 나와.”
데이비드 오 교수가 앤드류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자네 눈빛에서 이미 오한결에 대한 존경심을 읽을 수 있네. 그걸로 된 거야.”
앤드류가 생각이 많아졌는지 침묵하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최하늘의 목소리가 그 기류의 흐름을 끊어버렸다.
“교수님! 이제 그만 가야 해요!”
최하늘이 목청껏 데이비드 오 교수를 부르자, 그가 앤드류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제 정말 이별일세. 잘 살게나.”
아쉬운 표정을 한껏 드러내며 앤드류가 손에 힘을 줬다.
“곧 한국으로 갈 계획이 있네. 그때 다시 보자고.”
그렇게 모든 작별 인사를 마친 오한결과 최하늘, 데이비드 오 교수는 아쉬움을 가득 안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