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완벽한 개인전
오한결이 호텔 VIP 라운지에서 최하늘과 뉴욕 일정을 논의하고 있는데, 띠링 문자 알람 소리가 들렸다.
“어, 친구들이네요.”
오한결의 한 마디에 최하늘이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너무 보고 싶다. 어서 빨리 답장해 줘요.”
하지만 테이블에 널브러진 서류 더비를 보고 오한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확정해야 할 스케줄이라면서요. 마무리하고 답장할까 봐요.”
“에이, 나는 괜찮아요. 친구들 급한 연락이면 어떡해요?”
최하늘의 표정에서 진심을 읽은 오한결은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늘 씨, 화상통화로 해볼까요?”
최하늘이 생각지도 못한 발에 매우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어서 해봐요. 얼굴 보고 싶어요.”
오한결이 화상통화 버튼을 누르자, 띠리링 띠리링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의 소리가 난 뒤, 화면 가득 노을의 얼굴이 나타났다.
[작가님! 오! 하늘 언니!]
화면 가장자리에서는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가 앞다퉈 먼저 얼굴을 비치겠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작가님! 저 최무열이에요. 히히.]
[안녕하세요. 오한결 작가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해외 일정은 어떠신지요?]
여전히 딱딱한 서정익 작가의 모습에 오한결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잘 지내고 있어. 너희들도 잘 지내지?”
[잘 지내죠. 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지만.]
노을이 마치 뭔가가 있는 듯 여운을 남기자 최하늘이 그 뜻을 이해하고 물었다.
“노을이 무슨 일 있구나? 말해봐. 언니가 도와줄 수 있음 도와줄게.”
[사실, 저희가 해결할 일이에요. 말만으로도 너무 감사해요. 언니.]
오한결이 궁금증을 못 참고 다시 물었다.
“그럼 무슨 일인지 말해줄래?”
잠시 뜸을 들인 후 노을이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사실 해산군청에서 정식으로 작품을 의뢰했어요. 그것도 제가 무척이나 원하던 동물보호를 주제로 말이죠!]
“어머! 너무 잘 됐다. 정말 엄청난 커리어가 되겠네. 축하해!”
하지만 최하늘의 응원에도 노을은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간파한 오한결이 진지하게 물었다.
“뭔가 더 있구나? 뭔데?”
노을이 계속 머뭇거리다 옆에 있던 최무열이 화면 정중앙으로 끼어들었다.
[뭘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대요!]
[야!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우린 지금 작품 구상 중이라고. 모르는 게 아니라!]
[그게 그거지!]
노을과 최무열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화면에 잡히자 오한결과 최하늘은 멍하니 그 모습을 모면서 미소지었다.
오한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충분히 고민의 시간이 필요한 거지. 내가 보기엔 지금 너무 잘 하는 것 같은데. 더 부지런히 자료를 찾고 생각하고 여러 아이디어를 내봐. 그럼 기적처럼 영감이 찾아올 거야.”
[네, 그래서 야옹이 마을 다시 가보기로 했어요. 고양이들의 실태를 정확히 봐야 우리도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예전에 가서는 그냥 예쁜 그림만 보고 왔었죠. 그게 마음에 걸려요.]
노을의 말에 최하늘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 나도 야옹이 마을에 가고 싶다. 거기 되게 좋다던데. 부럽다.”
[언니, 빨리 한국에 오세요. 저랑 같이 가요.]
노을이 힘내라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자, 최하늘이 감사의 표시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데 훈훈한 분위기를 뚫고 최무열의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오한결 작가님. 소식 들었어요? 홍철수 사장님 시위 준비 중이라던데요.]
“시위?”
갑작스러운 소식에 오한결이 놀라 묻자, 최무열이 자세히 설명했다.
며칠 전 삼각지 화랑거리 근처에 북유럽 대기업 ‘유코아’의 준공 계획이 발표됐다는 소식을 듣고 홍철수 사장이 전국에 퍼져있는 화랑거리 출신 예술 관계자들을 모두 불렀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뜻을 보아, 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셨대요.]
놀란 오한결은 말문이 막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내가 뉴욕에 너무 오래 있었어.’
최하늘이 대신해서 말을 했다.
“저런, 보통 일이 아니네. 최대한 뉴욕 일정을 마무리 짓고 서울가서 정확한 내막을 알아봐야겠어요.”
최하늘이 말에 정신을 차린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인 후 화면에 얼굴을 비추고 말했다.
“알았어. 소식 전해줘서 고마워. 일단 한국에 가서 얘기 나누자.”
[네! 뉴욕 일정 잘 마무리하고 오세요. 저희도 야옹이 마을 잘 갔다 오겠습니다.]
이후 서로 훈훈한 말로 작별 인사를 하고 통화를 끝냈다.
오한결은 여전히 침묵을 유지한 채 홍철수 사장이 왜 그런 단체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삼각지 화랑거리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시작해야겠어. 결국 화랑거리의 경쟁력이 생존을 좌우하겠군.’
최하늘은 너무 몰입해 딴 세상에 가 있는 오한결에게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녀는 오한결의 이런 모습이 그의 성공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
* * *
휘트니 미술관 앞에 수많은 취재진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정장을 차려입은 타이론이 입구에 나타나자,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그를 반겼다.
찰칵. 찰칵. 찰칵!
어색한 미소로 답한 타이론이 어정쩡하게 서 있자, 때마침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나타난 알베르토 관장이 자연스럽게 타이론을 미술관 내부로 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두 사람이 다정하게 서 있는 장면이 찍히도록 알베르토는 카메라를 향해 잠시 서 있는 것을 잊지 않았다.
찰칵. 찰칵. 찰칵!
“작가님! 오늘은 무척 좋은 날이니까. 활짝 웃으시면 됩니다.”
알베르토 관장이 긴장해서 얼굴을 잔뜩 구긴 타이론을 향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로비 안에는 커다란 타이론의 얼굴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의 첫 번째 전시회를 알리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제1회 타이론 작가의 개인전」
“오한결 작가님은요? 윌리도 곧 오겠죠?”
생각보다 더 성대한 개인전의 모습을 보고 긴장한 타이론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오한결과 윌리를 찾았다.
“곧 오실 겁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작가님 곁에는 제가 있으니까요.”
알베르토 관장이 하얀 치아가 훤히 드러나도록 미소를 짓자, 타이론이 억지로 따라 웃으며 말했다.
“아…… 네. 그래도 빨리 그분들이 왔으면 좋겠네요.”
때마침 건물 밖에서 기자들의 웅성거림과 카메라 셔터 소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곧이어 전시실 문이 열리고 오한결과 윌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타이론이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자, 그 뒤에서 알베르토가 씁쓸하게 웃었다.
“윌리! 오한결 작가님!”
두 사람이 말끔한 차림의 타이론을 보자 박수를 쳤다.
“와우! 멋지다. 타이론. 오늘의 주인공다워.”
“아, 너무 긴장돼요. 실수하면 어쩌죠?”
윌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슨 실수. 타이론 네가 그린 거잖아. 솔직하게 말하면 돼. 어떤 느낌으로 어떻게 그렸는지.”
말 속에 진심을 느낀 타이론은 힘을 얻었는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러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분들은요? 최하늘 님도 안 보이네요.”
“미술관 앞이 워낙 북적여서 이따가 조용히 와서 보겠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짓는 타이론이 조용히 읊조렸다.
“아……. 어쩔 수 없죠.”
이제 전시 시간이 다가오자, 밖에서 취재를 하던 기자들이 로비로 몰려들었다. 갑자기 조용하던 로비가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자, 다시금 타이론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찰칵.
여기저기서 카메라 소리가 계속 들리자, 한편으론 흐뭇하면서도 빨리 이 어지러운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 알베르토가 제안을 하나 했다.
“타이론 작가님. 기자 회견부터 할래요?”
“네? 그건 행사 마지막에 하는 거잖아요.”
놀란 타이론이 경계를 하듯이 말하자, 더욱 조심스럽게 알베르토가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지금 안 하면 계속 뜬금없는 질문에 시달릴 수 있어요. 그리고 작품을 구경하기에 앞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으면 좋잖아요.”
유난히 극성인 기자들의 모습에 윌리가 넌지시 말했다.
“그래, 기자 회견부터 해. 아니면 따라 다니면서 계속 질문할 듯.”
잠시 뒤, 미술관 로비에 안내 방송이 나왔다.
[오늘 타이론 작가님의 개인전 일정이 변경되어 안내 말씀드립니다. 마지막 행사 일정으로 예정된 기자 회견이 앞당겨졌습니다. 지금부터 30분 후 1층 로비에 마련된 프레스 센터에서 기자회견이 있을 예정이오니, 기자분들은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자 프레스 센터에는 남은 자리가 없을 정도로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대부분 타이론의 이력과 관련 이슈들을 점검하며 추후 있을 공개 질의에 대비하는 듯 보였다.
오한결과 윌리도 프레스 센터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타이론이 잘 하겠죠? 이런 경험이 없어서 엄청 떨릴 것 같은데요.”
윌리가 걱정하자, 오한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주 좋은 경험을 하는 겁니다. 대중 앞에서 작가는 누구보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장내가 어수선하더니 이윽고 알베르토가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알베르토입니다. 저는 휘트니 미술관을 책임지고 있는 미술관장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타이론 작가님의 개인전은 무척 저에게 있어서 상징적인 행사입니다. 바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런 스타일의 작가와 작품이거든요.”
그렇게 알베르토는 자신의 이야기로만 10분 동안 말을 이어갔다. 쓸데없이 긴 알베르토의 말이 끝나자 드디어 타이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베르토를 봤을 때와 다르게 타이론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들이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동시에 노트북 타이핑을 치는 소리가 프레스 센터를 가득 채웠다.
기자 회견은 평범하게 진행됐다.
어떻게 작품을 시작하게 됐으며 낙서란 게 타이론에게 어떤 의미인지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타이론은 어설프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했다.
신인이지만 당찬 타이론에 기자들도 모두 매력을 느끼는 분위기였다.
그때 금발의 여성이 손을 번쩍 들었다.
“뉴욕타임즈입니다. 아시다시피, 뉴욕타임즈는 타이론 작가님의 작품에 아주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때 당시 기분은 어땠는지 알고 싶네요.”
뉴욕타임즈 기자의 도발적인 발언에 오히려 윌리가 의자를 들썩이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흥분하지 마세요.”
오한결이 그렇게 말하자, 윌리는 입을 꾹 다물고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자칫 자신의 거친 말 때문에 타이론에게 피해가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분이 많이 나빴습니다. 언론에 밝히지 않았지만, 저는 작가의 삶을 포기하려고 했어요. 식음을 전폐하며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어둠 속에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타이론의 솔직한 말에 기자들이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머뭇거리더니 타이핑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타이론이 뉴욕타임즈 기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제게 무척 소중한 스승님이 계셨기 때문에 지금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짐작하시겠지만 그분은 윌리입니다. 제 작품의 예술사적 의미를 재해석해준 논문을 쓰진 분이죠.”
윌리 옆에서 기자를 작성하던 기자가 고개를 돌려 윌리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사진을 한 방 찍었다.
찰칵!
그 소리를 들은 기자들이 모두 뒤를 돌아보자, 오한결과 윌리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 플래시 세례가 시작됐다.
찰칵. 찰칵. 찰칵.
그렇게 어수선한 기자 회견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어떤 흑인 기자가 묵직한 손을 들어 올렸다.
“타이론 작가님. 사실 신인이 이런 대형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한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작가님의 어떤 면이 이곳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다시금 도발적인 질문이 이어졌지만 타이론은 흔들리지 않았다.
“맞는 말이에요. 제가 이곳에서 개인전을 한다는 건 거의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알베르토 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알베르토 관장은 기분이 좋은지 씽긋 미소지었다.
“저는 미국을 사랑하는 미국 작가입니다. 이곳의 삶이 고달프고 때론 저주하고 싶을 때도 있었죠. 하지만 그게 내 조국의 모습이라면 저는 그 자체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미국의 어둡고 우울한 면을 예술로 승화시켜 보고 싶어요.”
타이론이 말을 마치자 너무 감동한 알베르토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미국을 사랑하는 미국 작가라니……. 너무 멋진 말이야.’
그렇게 몇 개의 질문이 오고 간 이후 알베르토 관장이 기자들을 이끌고 개인전 작품이 전시된 5층 특별 전시장으로 향했다.
지금 알베르토 관장은 그곳이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았다는 기쁨에 무척 흥분한 상태이다.
‘모든 게 완벽해.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