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공식 요청서
옥탑 작업실 한쪽 구석에서 노트북을 유심히 바라보는 노을을 향해 최무열이 물었다.
“누나, 메일 왔어요?”
최무열의 목소리에 휴대폰을 보던 서정익 작가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마 6시 전까지 올 거예요. 기다려보세요.”
해산 군청 사무관의 메일을 기다리던 노을이 살짝 실망한 얼굴로 대답했다.
“안 왔네요. 근데 서정익 작가님은 그걸 어떻게 아세요?”
“공무원이니까요. 6시 퇴근 전에 마무리 짓겠죠?”
“아……. 맞네. 호호.”
노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까지 작품 관련 공식 요청서 보내주기로 했는데……. 아마도 내부 회의가 길어지나 봐요. 설마 다큐멘터리도 나갔는데, 여전히 관광용 전시품을 원하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기다려보세요.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서정익 작가의 단호한 말에 노을은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한결 작가가 주는 위로와는 다른 색깔이었지만 아주 단단하고 안심이 되는 위로였다.
그렇게 두 시간 후, 6시 오 분 전이 됐을 때 노을이 소리를 질렀다.
“왔다!”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노을 곁으로 모여들었다.
노을의 메일에는 해산군청의 작품 제작의뢰 메일이 와 있었다.
해산군청에서 야옹이 마을 예술품 제작의뢰를 공식으로 요청합니다.
“누나! 빨리 클릭해봐.”
최무열이 재촉하자, 노을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메일을 클릭했다.
「안녕하세요, 해산군청 사무관 이태종입니다. 일전에 안내해 드렸듯이 해산군청은 야옹이 마을에 적합한 예술 작품을 제작하여 마을의 문화적 성취와 주민들의 생활 환경 개선을 한 단계 더 높이고자 합니다. 이에 군청은 아래와 같이 제작 의뢰서를 발송하오니 작가님께서는 심사숙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긴장한 노을이 천천히 시선을 화면 아래로 떨구더니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됐다! 해산군청이 동물 보호 주제로 작품을 제작해 달래!”
“정말?”
최무열이 모니터에 얼굴을 들이밀며 공문을 집중해서 읽었다.
“야옹이 마을을 관광지가 아닌 한국 동물 보호 중심지로 만들 예정이래. 이번 프로젝트는 자체 예산에 동물보호 단체의 후원까지 합쳐서 대규모로 진행될 거라는데.”
호기심을 참지 못한 서정익 작가도 모니터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네요. 영역 다툼에서 소외된 고양이를 돌보고 무료 의료 지원도 약속했어요. 그리고 무분별한 번식을 막고 개체수를 조정하고자 중성화 수술도 진행될 거라네요.”
세 사람은 잠시 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원하던 대로 일이 진행됐다는 희열감도 잠시, 들떴던 노을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 모습에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도 덩달아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거 스케일이 너무 커졌어요.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노을이 먼저 입을 열자, 최무열이 맞장구쳤다.
“맞아. 애초에 간단한 작품 하나 만드는 거였는데……. 한국 동물 보호의 상징적인 작품을 만들라는 거잖아.”
노을과 최무열이 동시에 서정익 작가를 쳐다봤다.
오한결이 없는 지금, 현역에서 작가 활동을 하는 서정익 작가가 어떤 말로 지금의 상황을 판단할지 몹시 궁금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서정익 작가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도 이쪽 분야는 잘 몰라요. 저는 오한결 작가님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도 아니고요.”
다시 절망적인 얼굴로 돌아간 노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오한결 작가님을 기다려야 할까요? 도대체 뉴욕에 언제까지 있는 거예요? 빨리 왔으면.”
“오한결 작가님께 연락해서 언제 오는지 일정을 알아보자!”
최무열이 휴대폰을 들고 오한결 작가에에 전화를 하려고 하자, 서정익 작가가 잽싸게 그를 말렸다.
“하지 마세요. 이거 우리끼리 해결했으면 해요. 저는 진심으로 우리 모두 힘을 합치면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다고 믿거든요.”
“하지만…….”
노을이 자신없어 하자, 서정익 자가가 단호하게 말했다.
“왜 자신감이 없어요? 지금까지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서 작품 활동을 해 왔잖아요. 그리고 기억 안 나요? 삼각지 화랑거리 조각품 우리가 만들었어요. 누구의 도움없이 우리 세 사람이 만든 거라고요.”
서정익 작가의 말에 다시금 작업실 공기가 희망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자신감을 회복한 최무열이 소리쳤다.
“맞아요. 까짓거 한 번 해봅시다. 우리가 누군지 보여주는 거예요.”
“재밌겠네. 호호.”
여유를 찾은 노을도 웃으면서 대답하자, 서정익 작가도 한마디 보탰다.
“우리 기념으로 치킨 먹고 합시다.”
“네? 또요?”
서정익 작가가 씨익 웃고는 단골집이 된 두 마리 치킨집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완료했다.
치킨은 생각보다 빨리 왔고, 세 사람은 서로가 경쟁하듯 닭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 배부른 상태가 되자, 슬슬 외면했던 문제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제 치킨 먹었으니까, 작품 얘기 좀 할까요?”
노을이 슬쩍 말을 걸었으나, 배가 부른 최무열은 오늘은 생각 따위는 하고 싶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노을이 짜증나는 얼굴로 쳐다보자, 최무열이 움찔하며 대답했다.
“누나,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난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다음 주에 해산군청 사무관이 방문한다고 하잖아. 작품 때문에. 그 전에는 구체적인 계획안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조급함에 안절부절못하는 노을을 바라보며 서정익 자가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야옹이 마을에 다시 한번 가 봐요. 직접 가서 다큐에 나왔던 현장을 확인하면 뭔가 기가 막힌 영감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 맞아요. 이렇게 작업실에만 있는 건 도움이 안 될 테니까요.”
서정익 작가의 제안이 마음에 든 노을이 환하게 웃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최무열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서정익 작가는 이미 머릿속으로 다큐에서 거론된 장소와 고양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앞으로 어떤 식의 현장 답사를 진행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 * *
뉴욕 도심을 가로지르는 택시에 이현미 관장과 한소정 큐레이터가 타고 있다.
손에 든 자료를 넘겨보던 이현미 관장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휘트니 미술관에서 흔쾌히 작품을 우리 쪽으로 넘기겠다고 하다니 말이야.”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저도 처음이라…….”
한소정 큐레이터는 창밖으로 보이는 뉴욕의 고층 빌딩들을 보면서 며칠 전 휘트니 미술관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떠올렸다.
[안녕하세요, 휘트니 미술관 미술품 관리팀입니다. 혹시 한소정 큐레이터님 맞으신가요?]
생각지도 못한 전화에 한소정 큐레이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맞습니다. 정말 휘트니 미술관 맞나요?”
[하하. 너무 갑작스럽게 전화 드린 것 같군요.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알베르토 관장님께서 데이비드 오 작가의 작품을 아리 미술관으로 이관하라고 하셨거든요.]
미술품 관리팀장은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은 채, 마치 급한 매물을 처리하듯이 언제 가져갈 수 있냐고 재촉하기에 이르렀다.
내부적으로 회의 후 전화를 하겠다고 전화를 끊은 한소정 큐레이터는 급히 이현미 관장을 찾아 해당 내용을 보고했다.
잠시 고민하던 이현미 관장은 직접 뉴욕으로 가보자고 제안을 했던 것이다.
‘일단 상황을 알아보자고. 그리고 알베르토 관장과 얼굴 보고 대화를 나눠봐야겠어.’
그렇게 차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한소정 큐레이터를 깨운 건 택시 기사의 목소리였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뉴욕의 자랑 휘트니 미술관입니다.”
이곳에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던 이현미 관장과 한소정 큐레이터는 미술관 정문을 통과해 아주 능숙하게 전시장으로 향했다.
특별 전시장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데이비드 오 교수 작품 앞에서 침묵을 유지한 채 작품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중하여 작가가 숨겨 놓은 메시지, ‘위대한 대한민국’을 찾으려고 했다.
화면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검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의 추상적인 몸짓에 집중해 보지만 메시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꽁꽁 숨겨놓았군요. 이러니까, 20년 동안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거겠죠.”
한소정 큐레이터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리자, 이현미 관장이 대답했다.
“아니, 최소한 한 명은 발견했잖아요. 오한결 작가.”
“결국 오한결 작가가 발견하지 못했으면 영원히 비밀에 부쳐졌을 수도 있겠군요.”
“아마도요. 하지만 데이비드 오 교수는 언젠가 자신의 비밀을 알아볼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믿었다고 생각해요.”
한소정 큐레이터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는 메시지가 밝혀지길 바랐다는 거군요.”
“아마도요. 메시지 자체가 양심 고백이니까요. 언젠가, 하고 생각은 했겠죠.”
그렇게 대답을 마친 이현미 관장은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숨겨진 메시지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삼십 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이현미 관장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찾았군요. 세상에!”
그 말에 더 조급해진 한소정 큐레이터가 눈에 힘을 주고 쳐다봤지만 그녀는 아무런 소득을 거둘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현미 관장이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숨겨진 메시지에 대해 설명했다.
이현미 관장의 손끝을 따라 화면을 바라보던 한소정 큐레이터도 드디어 숨겨진 메시지의 형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머나! 정말 있네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참 힘들었겠어요. 양심이란 건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죠.”
그때 투벅투벅 발소리가 뒤에서 들리더니 이탈리아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가 들렸다.
“데이비드 오 교수의 소원을 제가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이현미 관장이 뒤를 돌아보자, 알베르토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알베르토!”
“이현미! 오랜만이군요.”
“세상에, 하나도 안 변했군요.”
허물없이 대화하는 두 사람을 멍하게 쳐다보는 한소정 큐레이터에게 이현미 관장이 수줍게 말했다.
“교수 시절에 이탈리아로 연구 교수를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알베르토를 알게 됐죠.”
이제 상황이 이해 간 한소정 큐레이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두 분이 친분이 있으신지 몰랐습니다.”
이현미 관장이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알베르토가 저를 기억 못 할까 봐, 딱히 말하지 않았어요. 혹시 못 알아보면 제가 좀 창피하지 않겠습니까. 호호.”
“세상에,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탈리아로 연수 온 교수 중에 제일 똑똑했던 사람 아닙니까. 지성과 미모를 갖춘 완벽한 여성이었지요.”
이현미 관장은 알베르토의 말이 전형적인 이탈리아 남자 화법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어버렸다. 그나저나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야 한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왜 갑자기 데이비드 오 교수 작품을 아리 미술관으로 이관하겠다는 거죠? 정확한 경위를 듣고 이관 일정을 확정하려고 왔어요.”
이현미 관장이 사무적으로 말하자, 알베르토도 금세 태도를 바꿔 말했다.
“휘트니 미술관은 데이비드 오 교수의 의견을 존중했을 뿐입니다. 숨겨진 메시지가 발견된 이상 작가의 뜻에 따라 한국으로 가는 게 맞겠죠. 그리고 이곳 특별 전시실에서 아주 멋진 작품이 전시될 예정이거든요.”
알베르토가 무척 자랑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펴고 말을 이었다.
“타이론 작가의 개인전을 이곳에서 할 예정입니다.”
이현미 관장은 놀람과 동시에 호기심을 보였다.
타이론이라면 최근 미국 언론이 주목하는 작가이지 않은가? 관련 기사를 꼼꼼하게 챙겨보고 윌리의 논문도 세세하게 읽어봤던 이현미 관장은 알베르토의 선택이 몹시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잘 됐군요. 하지만 의외이긴 합니다. 그래도 신인 작가 아닙니까?”
“하하. 특별한 이유가 더 있긴 합니다. 타이론은 미국을 자랑스러워하는 미국적인 작가입니다. 심지어 타이론 스스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 뭘 바라겠습니까?”
이현미 관장이 몰래 피식 웃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에게 뒤통수를 맞은 알베르토에겐 아마도 미국적인 요소가 짙은 타이론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 사람은 자리를 옮겨 추후 작품 이관 일정에 대해 상세한 논의를 진행했다.
휘트니 미술관 실무자와 변호사가 동반한 회의는 아주 깔끔하게 끝이 났다. 알베르토의 의지가 무척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업무를 마치고 휘트니 미술관 밖으로 두 사람이 나왔다. 회의 때문에 지친 두 사람이 말없이 택시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소정 큐레이터가 불현듯 물었다.
“알베르토 관장은 이탈리아인인데 왜 미국적인 것에 집착하죠?”
잠시 머뭇거리던 이현미 관장이 대답했다.
“사실 나도 그게 궁금했어.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이현미 관장의 대답에 한소정 큐레이터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빵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본 이현미 관장도 오랜만에 크게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