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뛰어난 전략가
태양이 저물며 점점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시각.
문화재단 뉴욕지부 1층 카페 창가 테이블에 신수진 이사장이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앞에 놓인 커피잔에서는 진한 에스프레소 향기가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다.
퇴근하기 위해 1층 복도를 지나가던 강철 지부장이 신수진 이사장의 모습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장님, 퇴근 안 하십니까?”
뉴욕 거리를 바라보던 신수진 이사장이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지부장님. 퇴근하시나 봐요? 저는 조금 있다가 가려고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강철 지부장의 배려에 신수진 이사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니에요. 기다리는 전화가 있어서요.”
개인적인 약속이겠거니 싶어, 강철 지부장이 자리를 비워주려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신수진 이사장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여유로웠던 신수진 이사장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큰 결심을 하듯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철 지부장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네. 네.”
“아. 네.”
“네. 네.”
신수진 이사장이 짧게 대답만 하자, 강철 지부장의 호기심이 더욱 짙어졌다.
마침내 전화를 끊은 신수진 이사장에게 강철 지부장이 물었다.
“기다리던 전화가 맞나요?”
다시 여유를 찾은 신수진 이사장이 대답했다.
“네. 맞아요.”
“개인적인 전화군요. 길게 통화하지 않는 걸 보니.”
프라이버시 침해일 것 같아, 강철 지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업무 전화입니다.”
강철 지부장이 놀란 표정을 짓자, 신수진 이사장이 재밌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휘트니 미술관 알베르토 과장이에요.”
“!!”
강철 지부장은 몇 시간 전 알베르토를 데리고 지하 1층 전시실을 방문한 오한결이 생각났다. 그때 다른 직원은 동행하지 않고 오직 타이론만 전시실로 들어올 것을 그가 요청했었다.
그 만남의 목적은 타이론의 개인전 장소를 휘트니 미술관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오한결은 알베르토와의 만남 이후 최대한 말을 아끼며 이렇게 대답했다.
늦어도 오늘 중으로 연락이 올 겁니다.
그 연락이 오한결이 아니라 신수진 이사장에게 가는 거였구나.
오한결은 자신의 역할을 하고 추후 일정은 모두 신수진 이사장에게 맡겼던 것 같다.
생각에 빠진 강철 지부장을 유심히 지켜보던 신수진 이사장이 말했다.
“궁금하신가 보군요. 알베르토가 오한결 작가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세상에! 그렇다면 타이론의 개인전이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리는군요! 와우, 엄청납니다. 너무 놀라운 결과에요.”
“그걸로 그렇게 놀라면 어떡합니까? 하나 더 있는데요.”
강철 지부장이 재빠르게 그 말의 뜻을 해석했다.
“설마……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도 한국에 반송하겠답니까?”
“네. 확실히 오한결 작가님의 전략이 먹힌 것 같군요.”
신수진 이사장은 덤덤하게 말하긴 했지만 내심 뜻밖의 결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손에 들고 에스프레소를 들이켰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귀에 강철 지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한결 작가님은 예술적 재능도 뛰어나지만 전략가로서도 손색이 없군요.”
그 말에 신수진 이사장이 공감하며 대답했다.
“오한결의 마법이 또 통한 거죠.”
* * *
몇 시간 뒤, 양승호 비서에게 알베르토의 전화 내용을 보고 받은 신태진 회장이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오한결 작가가 또 해냈군! 정말 자랑스러워.”
“맞습니다. 뉴욕에서 대단한 활약을 하고 계시죠.”
신태진 회장이 몹시 기뻐하자, 양승호 비서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물론 그도 진심으로 오한결의 활약이 대단하고 생각했다.
활짝 웃던 신태진 회장이 갑작스럽게 얼굴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그런데 말이야. 오한결 작가는 뉴욕에 언제까지 있는 거지? 너무 오래 머무는구먼.”
“그게……. 예정대로라면 벌써 귀국했어야 했지만, 일정을 바꿔서 좀 더 머물기로 했답니다.”
신태진 회장이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대답했다.
“이런! 그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뉴욕에 좀 더 있다가 올 걸 그랬어.”
“아……. 아쉽게 됐습니다.”
“뉴욕에 한 번 더 갈까?”
갑작스러운 신태진 회장의 제안에 양승호 비서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회장님, 회사 일이 많이 바쁩니다. 특히 명일 무역센터 공사가 한창이라 해외 출장을 가시기에 무리가 좀 있습니다만.”
아쉬워하는 신태진 회장의 눈치를 보며 양 비서가 말을 이었다.
“제가 전해 들은 소식으로는 아리 미술관을 대표해서 이현미 관장님과 한소정 큐레이터가 곧 뉴욕을 떠난다고 합니다. 아마도 데이비드 오 교수 작품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호라. 그렇다면 휘트니 미술관으로 가겠구먼.”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내가 간다면 내가 굳이 또 갈 필요는 없겠지. 어쨌든 오한결 작가가 한국에 없으니까 너무 삶이 단조롭구먼.”
신태진 회장 책상에 수북하게 쌓인 결재 서류를 바라보며 양승호 비서가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보고서들과 결재 서류들을 처리하면서도 삶이 단조롭다고?’
양승호 비서가 생각하기엔 신태진 회장이야말로 가장 바쁘고 엄청난 책임감에 짓눌린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신태진 회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분명 오한결은 흥미진진한 일들을 몰고 다니는 작가니까.
당장 뉴욕 출장만 해도 그렇다.
빅스퀘어 빌딩의 퍼포먼스부터 타이론이라는 신인작가의 발굴까지. 이게 보통 일인가?
하물며 최고 수준의 정보원에 의하면, 뉴욕시 최대 슬럼가를 예술의 도시로 만들려고 한다고 하지 않는가.
‘에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오한결이라면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생각에 빠진 양승호 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태진 회장이 말을 걸었다.
“자네, 뭐하나?”
회장 목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린 양승호 비서가 급하게 다음 보고 내용을 말했다.
“흥미로운 소식이 있습니다. 오한결이 자주 가는 화랑거리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묘한 기류?”
“북유럽 대기업인 ‘유코아’가 화랑거리 근처에 대형 미술상점을 열 예정입니다. 그 결과 화랑거리 상권이 실질적으로 위협을 받을 것 같습니다.”
“저런! 골목 상권을 침해해선 안 되지 않은가. 상인들이 걱정이 많겠구먼.”
“그래서 상인들이 모임을 만들어서 대처하고 있지만, 아마도 힘에 부칠듯합니다.”
신태진 회장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야. 유코아라면 나도 잘 알지. 이미 해외에서 성공 사례가 많아서 한국 진출도 그렇게 어렵지 않겠지.”
진심으로 화랑거리의 미래를 고민하던 신태진 회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화랑거리도 시대적 변화를 따라 할 때가 온 것 같군. 이제 그들도 바뀌어야겠지.”
골목 상권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양승호 비서는 신태진 회장의 말이 공허하게 들렸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려면 상당한 자금력과 상인들의 의지가 필요했다.
그런 양승호 비서의 걱정을 눈치 챘던 걸까, 신태진 회장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들이 변화를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의사가 있어. 양 비서! 좀 더 그들의 동태를 살핀 후 내게 보고해 주게나.”
“네, 알겠습니다.”
양 비서는 생각지도 못한 회장의 말에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회장님이 개입하면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길 수도 있는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양승호 비서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 * *
삼각지 화랑거리 근처 대형 체육관을 빌린 홍철수 사장이 입구에서 서성이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전국에서 화랑거리 출신 예술가들과 화랑 사장들이 모이는 날이다.
미리 온라인 및 여러 단체를 통해 초대장을 발송한 홍철수 사장은 꼭 많은 사람이 참석했으면 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한 심정이다.
시계를 확인한 홍철수 사장이 살짝 파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이제 사람들이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뒤를 돌아본 홍철수 사장은 체육관 내부에 빈 의자만 가득한 것을 보고 불안함을 느꼈다.
체육관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홍미숙과 눈이 마주친 홍철수 사장은 애써 웃어 보였지만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았다.
‘혹시 공지가 잘 못 됐나?’
불안함 마음에 휴대폰을 꺼내 오늘 모임 공지를 확인해 봤지만 날짜와 시간 모두 정확히 적혀 있었다.
북유럽 대기업에 맞서 화랑거리 상권을 살려보겠다고 한 자신의 노력이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의욕만 앞섰던 걸까?
자신 빼고 모두 대기업을 상대로 행동을 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며 실패가 예견된 일임을 확신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 그렇게 생각해도 그들을 탓할 수 없지.’
세상은 끊임없이 변했고 이제 화랑거리도 그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한 거니까.
이런저런 생각에 심란해진 홍철수 사장이 마지막으로 시각을 확인하자 이제 5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포기해야겠지?’
오늘 행사의 실패는 앞으로 삼각지 화랑거리 부흥에 상당한 타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국에 퍼져있는 수많은 선후배의 호응과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면 그 어떤 운명도 달게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고개를 숙인 홍철수 사장이 마음 정리를 끝내고 뒤를 돌아서는데, 어딘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고 있던 홍철수 사장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지하철 입구와 연결된 골목을 쳐다봤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홍철수 사장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홍철수 사장도 그들의 인사에 번쩍 손을 들고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어서 오세요!”
“어이구! 홍 사장. 이게 얼마 만이야?”
20년 전 아트화랑 옆에서 장사를 했던 백발의 백 사장이 홍철수 사장을 곁에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백 사장님! 건강하시죠?”
“그래그래. 자네가 우리를 이렇게 초대해줘서 고맙네. 삼각지 화랑거리에 일이 생기면 우리는 맨발로라도 달려올 거야.”
“고맙습니다. 사실 못 오시는 줄 알았어요.”
백 사장과 주변 사장들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네. 우리가 멀리서 와서 그런지 이 근처에서 만나서 수다 좀 떠드느라고. 딱 시간 맞춰왔지 뭐야.”
수없이 많은 사람이 체육관으로 들어오는데, 입구 쪽에서 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뭐해! 어서 홍 사장 데리고 오게. 다들 홍 사장 얘기를 듣고 싶어 해.”
홍철수 사장이 체육관 연단에 서자, 그렇게 마음을 심란하게 했던 빈 의자에 사람들이 꽉 차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 삼각지 화랑거리와 인연을 닿았던 수많은 예술가, 화랑 사장, 미술용품 판매상 등 전국에서 홍철수 사장의 공지를 보고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선후배 여러분들. 아트화랑 홍철수입니다.”
다소 웅성거리며 얘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홍철수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 자세를 바로잡고 홍철수를 향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국 미술 산업을 오랫동안 떠받치고 있던 삼각지 화랑거리에 실질적인 위험이 닥쳤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합니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홍철수가 현실적인 문제를 숨기지 않고 얘기하자, 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홍철수는 그들의 반응에도 꿋꿋이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제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화랑거리 근처에 공사 중인 ‘유코아’는 2년 후 완공할 예정입니다. 그들은 화랑거리와 비교도 할 수 없는 편의시설을 갖추고 고품질의 미술 재료와 그림들을 싸게 시장에 내놓을 것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그들은 막대한 자본으로 국내 미술 시장을 독점할 것이고, 나중에 터무니없이 거래 가격을 올릴 것입니다. 그러면 한국 미술 시장은 분명 혼란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홍철수 사장이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의 미술 시장은 유례없는 가격 폭등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될 수도 있습니다.”
구석에서 강렬한 눈빛을 뽐내던 한 참가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게 시대적 흐름 아닐까요? 경쟁에서 뒤처지는 사람들은 낙오될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저는 화랑거리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에 맞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 스스로 바꿔 갈 필요가 있어요. 다만, 갑자기 찾아온 거대 자본에 의해 우리 미술시장이 잠식되는 걸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홍철수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단상을 손바닥을 쿵 쳤다.
“우리의 뜻을 알리는 시위를 하고자 합니다. 효과는 크게 없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의 뜻을 전국민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여기저기서 목소리라 들려왔다.
“맞습니다!”
“찬성합니다.”
“그래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가자고요! 그게 아무리 작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