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미국적인 작가
문화재단 뉴욕지부 회의실에서 신수진 이사장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에 아리 미술관의 한소정 큐레이터와 통화를 했어요. 데이비드 오 교수의 충격적인 고백 이후 휘트니 미술관의 생각이 바뀔 줄 알았는데, 그대로더라군요.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을 한국으로 갖고 오려는 시도가 막히고 있어요.”
강철 지부장이 신수진 이사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니, 이미 한국 언론은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을 한국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강철 지부장의 말을 듣자마자, 신수진 이사장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음……. 사실 이 방법까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압력을 넣어볼까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강철 지부장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알베르토 관장에게요?”
“그럼 누구에게 넣겠어요?”
강철 지부장이 부정의 의미로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추후 문제 될 소지가 너무 많아요. 이건 휘트니 미술관이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지금 바늘로 찔러도 꼼짝하지 않는 겁니다. 그걸 풀어주는 수밖에 없어요.”
차분하게 회의 내용을 받아 적던 최하늘이 의견을 말했다.
“저는 생각이 좀 다른데요. 휘트니 미술관이 자존심이 상해서 작품을 안 내놓는다고 하지만, 사실상 이제 데이비드 오 교수님의 작품을 전시하는 그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됐어요.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작품을 다른 곳으로 넘기고 싶어할 겁니다.”
최하늘에 말에 공감한 오한결이 끼어들었다.
“맞아요. 아주 정확한 지적을 해줬어요. 한국이 그 작품을 가져오려면 휘트니 미술관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듯한 것으로요. 아마도 그건 ‘명분’이 되겠죠?”
“명분이라…….”
신수진 이사장은 ‘명분’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되풀이했다.
그 사이 신수진 이사장이 오한결의 얼굴을 봤는데, 마치 해답을 아는 사람처럼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오한결 작가님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좋은 아이디어가 있거든요.”
머뭇거림 없이 대답하는 오한결의 목소리에 모두 은근히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오한결이 입을 열었다.
“이 문제의 해결의 열쇠는 타이론입니다.”
“타이론이요?”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한결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타이론의 개인전을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하면 모두 해결됩니다.”
모두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오한결을 바라보는데, 신수진 이사장이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 이해가 안 되는데요? 더 설명을 해주시죠. 작가님.”
“휘트니 미술관이 지금 슬퍼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이 미국을 대표하는 작품이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라는 점이죠. 그렇다면 타이론의 작품은 어떤가요? 그의 작품이야말로 상당히 미국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는 작품 아닙니까. 저는 타이론의 작품이 충분히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한결의 말뜻을 알아들은 강철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군요. 하지만 변수가 하나 있습니다. 데이비드 오 교수는 세계적인 작가이고 타이론은 이제 갓 데뷔한 신인이에요.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오한결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 말했다.
“타이론의 작품을 보셨잖습니까? 그리고 최근에 윌리의 논문의 힘도 확인했고요.”
오한결의 의도를 파악한 신수진 이사장이 크게 웃었다.
“오호호. 역시 오한결 작가님이십니다. 현재 타이론은 뉴욕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 예술가입니다. 그리고 윌리의 논문으로 인해 그의 작품은 이론적 지지기반도 탄탄해졌죠. 아마도 수십 년 후면 데이비드 오 교수만큼, 아니면 더 유명한 작가가 돼 있을 가능성이 크죠.”
“아! 그 점을 강조해서 알베르토 관장을 설득하면 되겠군요.”
신수진 이사장의 설명을 들은 강철 지부장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맞습니다. 이제 휘트니 미술관은 데이비드 오 작가라는 과거와 이별하고 타이론이라는 새로운 미래와 손을 잡을 때가 왔습니다.”
오한결에 말에 감동한 최하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데이비드 오 교수님의 작품은 한국에서 새 출발을 하면 되겠군요.”
최하늘의 수줍지만 정확한 발언에 모두가 크게 웃었다.
회의 마지막으로 오한결이 한마디 했다.
“제가 알베르토 관장을 불러 설명하겠습니다. 타이론의 작품을 준비해주세요.”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척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한결이 직접 나선다면 방금 회의한 모든 내용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무척 크기 때문이다.
* * *
몇 시간 뒤, 알베르토 관장이 문화재단 뉴욕지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때마침 알베르토를 맞이하기 위해 서 있던 오한결이 그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알베르토 관장님.”
오한결의 모습이 보이자, 잔뜩 찡그렸던 얼굴을 활짝 피며 알베르토도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최고 예술가를 향한 알베르토의 진심이 담긴 인사였다.
“다시 뵙게 돼 영광입니다. 오한결 작가님.”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몹시 보여드리고 싶은 작품이 있어서요.”
“저도 상당히 놀랐습니다. 오한결 작가님이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고 저를 초대하다니요. 혹시 신작이 나온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오한결의 모호한 설명에 멍한 표정을 짓던 알베르토를 데리고 문화재단 지하 1층 전시실로 향했다.
그곳은 평소 문화재단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쓰였는데, 몇 시간 전 신수진 이사장의 지시로 오직 타이론의 작품을 전시하는 단독 전시장으로 바꿔버렸다.
전시실 앞에서 오한결이 문을 열어주자, 알베르토 관장이 감사의 인사로 고개를 끄덕이며 전시실로 들어갔다.
“와우! 이건 혹시?”
알베르토는 전시실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낙서 그림이라면?”
알베르토는 오한결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게 누구의 그림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타이론 작가의 작품이군요.”
왼쪽부터 낙서로 이뤄진 추상적 형태가 주는 압도적인 몰입감에 눈을 떼지 못하는 알베르토 관장은 작게 탄식했다.
“미디어를 통한 예전 작품과 그 깊이감이 다르군요.”
그 전에는 느낌을 중시한 추상적 형태였다면 이제는 작가 개인의 스토리가 묻어나는 연작 형태로 그려져 있었다.
오한결은 혼자 중얼거리는 알베르토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타이론의 작품에 몰입해 가는 과정이기에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한결이 충분한 시간을 준 뒤 알베르토에게 말했다.
“대단하지요?”
힘들게 작품에서 시선을 뗀 알베르토가 오한결을 쳐다봤다.
“완벽합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런 완성도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에요. 더군다나 윌리의 논문을 읽고 이 작품을 보니 더욱 더 새롭고 위대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아낌없는 찬사에 오한결이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윌리의 논문을 보셨나요?”
“그럼요! CNN에서 소개되자마자, 수소문해서 찾아 읽었습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창의적이고 완벽한 이론을 만든 논문이에요. 미술계의 새로운 시각을 던져줬습니다.”
알베르토는 대답을 하면서도 눈은 타이론의 작품에 고정되고 있었다.
‘좋았어. 이제 다음 단계로 들어가 볼까?’
오한결이 예상한대로 알베르토가 타이론의 잡품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자, 때가 됐다는 생각에 타이론에게 문자를 보냈다.
「잠깐 전시실로 들어올래?」
「네, 작가님.」
전시실 문이 아주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타이론이 그 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오한결이 들어오라고 신호를 보내자 타이론이 주춤주춤 발을 질질 끌며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알베르토는 여전히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기 때문에 타이론이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알베르토 관장님?”
오한결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알베르토가 정신을 차리고 뒤돌아섰다. 그러자, 눈앞에 타이론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타이론 작가님?”
타이론은 중년의 이탈리아 남자가 누군지 몰라 슬며시 오한결을 쳐다봤다.
오한결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여긴 휘트니 미술관 관장님이셔. 지금 타이론의 작품을 보고 아주 감동하고 계시지.”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 관장님이라는 말에 타이론이 얼른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타이론입니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허허.”
알베르토가 타이론을 아주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무 훌륭해요. 타이론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뉴욕의 미래가 머릿속으로 그려집니다. 이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군요. 단순히 잘 그린 작품이 아니라 새로운 예술 지평을 열고 있잖아요.”
알베르토의 말에 감동을 받은 타이론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오한결이 때를 기다렸다가 말을 꺼냈다.
“타이론은 머지않아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될 겁니다. 그의 존재 자체는 미국의 상징이며 그의 작품은 미국 예술의 기준이 되겠죠.”
“오!!”
알베르트는 자신이 듣고싶어하는 말을 해준 오한결에게 무한한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맞습니다. 제가 타이론의 작품을 보고 감동한 포인트가 그거예요.”
특유의 이탈리아 사람의 제스쳐를 하며 몸으로 감동을 표현하고 있는 알베르토에게 오한결이 말했다.
“알베르토 관장님. 제가 제안을 하나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얼마든지요.”
이미 타이론의 작품에 감동을 받은 알베르토는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오한결이 타이론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타이론의 개인전을 휘트니 미술관에서 하고 싶습니다.”
“네?”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짓는 알베르토에게 오한결이 설명을 덧붙였다.
“관장님은 항상 미국적인 것을 강조하셨죠. 데이비드 오 교수님의 작품을 좋아했던 이유도 그게 미국을 대표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잖아요. 안 그런가요?”
“……그건 부정할 수가 없군요.”
오한결이 타이론의 팔을 잡아당겨 알베르토 바로 앞에 서 있게 했다.
“이 아이를 보십시오. 이 아이의 존재는 미국의 상징이고 그의 작품은 미국을 대표하게 될 것입니다.”
오한결의 설명을 들은 알베르토는 타이론 모습이 화려하게 빛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어쩌면 내가 평생 찾아 헤매던 작가가 이 아이일 수도 있겠구나.’
오한결이 타이론에게 물었다.
“타이론은 미국을 어떻게 생각해?”
“제가 태어난 곳이죠. 힘든 일도 많았지만 저는 미국을 누구보다 사랑해요. 앞으로 미국의 빛과 어둠을 제 작품 속에 녹아내리고 싶어요. 저는 미국 작가니까요.”
타이론의 말에 알베르토가 두 손을 모으고 눈시울을 붉혔다.
“너무나 감동적이군요. 좋습니다. 여기 와서 작품을 보니까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는 게 맞는 것 같군요. 제가 힘써 보겠습니다.”
“단!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오한결이 급하게 말을 끊고 들어오자, 알베르토가 살짝 경계를 했다.
“뭔가요?”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을 한국에 넘겨주십시오.”
“!!”
지금까지 보였던 감동받은 표정이 싹 경계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건 안 됩니다. 데이비드 오 교수는 휘트니 미술관 소유물로서 영원히 저희가 보관할 것입니다.”
“하지만 숨겨진 메시지가 드러난 이상, 전시는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오한결의 말에 알베르토가 할 말을 잃고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러자 오한결이 추가 설명을 이어서 했다.
“이제 세대 교체가 되어야지요.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 대신 타이론의 작품이 들어가는 겁니다. 타이론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할 것이고 그 시작에 휘트니 미술관이 있는 거지요.”
알베르토가 머뭇거리자, 타이론이 오한결을 돕고 싶은 마음에 한 마디 덧붙였다.
“오한결 작가님의 부탁을 들어주시면, 제 개인전의 모든 작품을 휘트니 미술관에 넘길 의향이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파격적인 제안에 알베르토가 넋 나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한결이 슬쩍 타이론에게 물었다.
“괜찮겠어?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돼.”
“아뇨. 저도 오한결 작가님을 돕고 싶어요.”
오한결이 타이론의 머리를 쓰담아 준 뒤 알베르토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충분히 고민하고 연락 주세요.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오한결은 고민의 단계를 넘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알베르토의 표정을 보면서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저건 분명히 타이론의 작품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모습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