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77화 (177/202)

제177화 천둥 번개

드디어, 데이비드 오 교수가 자신의 작품 앞에 섰다.

오랫동안 휘트니 미술관의 상징과 같았던 이 작품은 작가에게는 지우고 싶은 과거의 산물이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멍하니 작품을 바라봤다. 복잡 미묘한 심정을 가까스로 숨긴 것이었지만 알베르토 관장은 그가 감동해 말을 잃은 것으로 착각했다.

“이해합니다. 얼마나 감동적이겠어요. 사실 저도 아직도 볼 때마다 감동받습니다.”

데이비드 오 교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품에 더 깊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스크린에 검은 점처럼 나타난 무용수들이 똑딱똑딱 기계음에 따라 알 수 없는 춤을 주고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의 움직임이 마치 최면을 거는 것처럼 데이비드 오 교수는 30년 전 뉴욕에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던 그 시절로 기억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청년 데이비드 오는 춥고 가난했다.

이상민 선배가 자신을 배신하고 한국에 남기로 결정하면서 뉴욕의 모든 에이전시와의 계산이 모두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아 맨몸으로 무작정 온 낯선 나라에서 가난한 청년 예술가의 삶이란 뻔했다.

하루 한 끼 햄버거로 겨우 배를 채운 데이비드 오는 청소, 식당 서빙 등 알바를 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버티는 방법밖에 없다.

마땅한 작업실이 없었던 데이비드 오는 좁은 자신의 원룸에서 겨우 그림을 그리기만 했다.

‘그래, 버텨보자.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그의 간절한 바람을 신이 들었던 것일까.

어느 날, 오래된 건물 지하에 위치한 작업실을 하나 구할 수 있었다.

건물주는 은근히 미안한 얼굴로 데이비드 오에게 말했다.

‘청년이 딱해서 도와주려고 그래. 근데 사연이 많은 곳이라, 찜찜하면 안 와도 돼.’

‘사연이요?’

‘음, 그게……. 그런 게 있어. 지하라 그런지 나쁜 생각들을 많이 하더라고.’

데이비드 오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작업실을 얻고 본격적인 작품 준비에 들어갔다.

알바를 그만두면 생계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낮에 알바를 하고 저녁에 작품을 하는 고단한 삶을 그렇게 이어갔다.

‘보여주겠어. 반드시!’

오직 악과 깡만 남은 뉴욕의 생활.

데이비드 오에겐 성공이란 개인적 영광이 아닌 생존의 한 수단이었다.

‘성공해야 해. 살아남기 위해서 성공해야 해.’

그렇게 곰팡내가 잔뜩 나는 사연 있는 음침한 작업실에서 스스로 최면을 걸듯 마음을 다잡으며 작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작업에 몰두하던 어느 날 뉴욕대에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뉴욕대에서 신인 작가 후원 프로그램이 있는데, 혹시 지원할 의사가 있으신가요?]

데이비드 오는 대학 시절 뉴욕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잠시 머문 인연으로 예술대 교수들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그들이 잊지 않고 그를 챙겨준 것이다.

“물론이죠. 제가 뭘 준비하면 될까요?”

[특별한 건 없고요. 작품을 하나 갖고 와서 발표하시면 돼요. 심사위원들이 최종 전시 여부를 결정할 겁니다.]

30년 전 그 당시만 해도 현대 무용과 미디어를 혼합한 양식의 예술이 드물었었다. 데이비드 오는 자신의 창의적인 작품을 드디어 보여줄 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 후. 뉴욕대에 도착한 데이비드 오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인 작가 지원 프로그램 이름이 바로 ‘창의적인 미국 스타일 작가 양성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미국 스타일 작가?’

알고 보니, 뉴욕대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미국을 대표하는 창의적인 작가를 양성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얼떨결에 심사위원들 앞에 선 데이비드 오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자신의 작품이 미국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어필을 할지.

아니면 순수한 창작물로서 자신 있게 설명을 할지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를 양성하는 곳 아닌가? 조건에 맞지 않으면 나는 탈락한다.’

순간 좁고 꾸리꾸리한 냄새가 나는 원룸과 곰팡내가 잔뜩 풍기는 사연 있는 작업실이 떠올랐다.

‘더는 그런 곳에서 살 수는 없다. 더는 그런 비참한 삶을 이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데이비드 오는 준비해온 작품 설명 대신 심사위원들이 아주 만족스러운 말로 바꿔 말을 했다.

“이 작품만큼 미국을 대표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리한 심사위원 중 한 명은 강하게 의구심을 드러냈다.

“저는 그게 왜 미국적인 작품인지 모르겠군요. 상당히 독특한 작품인 건 알겠으나, 그게 미국과 무슨 상관이 있죠?”

마치 거짓말을 들킨 아이처럼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데이비드 오가 대답했다.

그는 미국의 대표적 이념의 상징인 ‘자유’를 자신의 작품의 표현법과 연계해서 설명했고 무용수들의 유연한 몸짓과 툭툭 끊어지는 전자음은 세계 정상에 선 미국의 유연한 지배력과 단호함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질문을 했던 심사위원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지만, 나머지 심사위원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데이비드 오의 작품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양성 프로젝트의 대표작으로 선정돼 뉴욕대 전용 전시장에서 2년이나 넘게 전시가 됐었다.

나중에 평론가들의 찬사가 이어지자, 미국 작가의 작품을 소유하기로 유명한 휘트니 미술관에서 그 작품을 상당한 비용을 들여 구입해 단독전시를 했던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데이비드 오 교수는 작가로서 승승장구했고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너무 감동적입니다. 저는 작가님이 저 작품을 만드실 때 어떤 마음일지 너무나 공감이 갑니다.”

씁쓸한 과거를 떠올리던 데이비드 오 교수는 알베르토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데이비드 오 교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알베르토 관장을 바라봤다.

“어떤 마음이죠?”

“미국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그 말에 선뜻 공감할 수 없었던 데이비드 오 교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관장님은 이탈리아 사람 아닙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알베르토가 끝내 말을 잇지 못하자, 데이비드 오 교수는 그에게 관심을 거두고 다시 작품을 바라봤다.

그리고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분명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위대한 대한민국’

너무 양심에 찔린 데이비드 오는 30년 전 뉴욕대에 작품을 제공할 때 몰래 수정해서 저 메시지를 넣은 것이다.

데이비드 오 교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선 채 두 시간 이상을 더 작품을 관찰했다. 그 사이 알베르토는 개인 일정이 있다며 모습을 감춰버렸다.

“이제 더욱 확실해졌어. 진실을 밝히자.”

데이비드 오 교수가 크게 말하자, 주변 사람들이 놀라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존에프케네디 공항에 모던아트 박수호 기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내가 뉴욕으로 출장도 다와 보네. 이제 모두 데이비드 오 교수 덕분이지.”

12시간 전.

데이비드 오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안녕하세요, 데이비드 오 교수입니다. 모던아트 박수호 기자 맞으신가요?]

그때 집에서 넹플릭스를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던 박수호 기자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 갑자기 무슨 일로?”

[혹시 뉴욕으로 오실 수 있으신가요? 제가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에 박수호 기자가 놀라서 물었다.

“갑자기 왜요? 혹시 이유라도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잠시 뜸을 들이던 데이비드 오 교수가 힘없이 대답했다.

[한국 언론에 먼저 말하고 싶었습니다.]

데이비드 오 교수의 말에 특종의 냄새를 맡은 박수호 기자는 더는 묻지 않고 대답했다.

“당장 달려……. 아니지, 날아가겠습니다!”

그렇게 박수호 기자는 정신없이 짐을 싸고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을 빠져나온 박수호 기자가 택시를 타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건 기자 인생 최대 기회다!”

* * *

그날 새벽, 뉴욕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천둥 번개가 끊임없이 몰아쳤다.

그리고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지며 창가를 무자비하게 두들겼다.

“으아아악!!”

알베르토 관장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자, 옆에서 잠을 자던 아내가 놀라서 같이 눈을 뜨고 말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방망이 치는 심장이 잠시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린 후 알베르토가 힘없이 말했다.

“악몽을 꿨어.”

창밖에 비가 거칠게 쏟아지는 모습을 확인한 아내가 대답했다.

“날씨 때문에 그럴 수도 있어요. 좀 진정하시고, 다시 주무세요.”

“하지만 다시 잠들기가 너무 무서워. 이건 단순한 악몽이 아니야.”

“대체 무슨 꿈을 꿨는데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알베르토가 대답했다.

“휘트니 미술관 작품들이 죄다 도둑맞았어. 한 점도 남은 게 없다고.”

남편의 말이 어이없게 들린 아내는 침대에 다시 눕고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그거야말로 진짜 꿈이네요. 당신한테는 악몽이겠지만.”

“아니야. 진짜야. 너무나 선명하다고.”

급하게 어둠 속에서 알베르토가 전화를 찾고는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린 뒤 피곤함이 묻어나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관장님. 무슨 일로……? 이 새벽에?]

“미술관은 괜찮은 거지? 도둑이 들어오거나 그런 건 없지?”

당직 근무자는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관장의 말에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너무나 단호하게 말한 탓에 정말로 도둑이 들었는지 걱정이 되기까지 했다.

당직자는 급하게 수십 개가 넘는 CC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재빠르게 이상 여부를 확인했다.

“아무런 이상 없는데요, 관장님. 갑자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수화기 너머 알베르토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다행일세.]

“관장님? 정말 괜찮으세요?”

[이제 좀 괜찮아졌네. 사실 내가 꿈을 꿨거든. 미술관 작품들이 모두 도난당하는 꿈 말이야.]

당직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뭐야, 그까짓 꿈 때문에 전화를 했다고?’

그사이 엄청난 천둥소리가 다섯 번이나 연이어서 들렸다.

우르르쾅!

우크크쾅!

덩달아 무서워진 당직자도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댔다.

“아마도 날씨 때문에 꿈자리가 사나웠을 수도 있겠네요.”

[아내도 그렇게 말하더군.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하네. 그럼 이만 전화를 끊겠네.]

“네, 푹 쉬세요. 관장님.”

전화를 끊은 알베르토 관장이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 모습을 본 아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봐요. 미술관에는 아무 일도 없죠? 그냥 악몽이에요.”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내가 너무 예민했어. 그까짓 꿈 가지고. 참 민망하군.”

“어서 주무세요. 오늘 오전 회의 있으시잖아요.”

“그래, 그만 잡시다.”

그렇게 잠이 든 알베르토는 얼마간 편안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날씨는 또다시 천둥 번개를 몰아치고 엄청난 강풍이 창문을 흔들어 댔다.

그러자 다시금 알베르토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안 돼!!”

그는 식은땀을 손으로 닦으며 생각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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