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피자 세 판
뉴욕의 예술가 모임 이후 바로 호텔로 돌아온 오한결은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이제 슬슬 뉴원 애비뉴를 위한 작품을 구상해야 한다.’
오한결이 토마스 청장에게 뉴원 애비뉴의 치안을 부탁하고 로건에게 재정적 지원을 주문했던 사실이 은근한 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오늘 모임에 참석했을 때도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뉴원 애비뉴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오한결의 작품이 뉴욕 도시의 재건을 위해 쓰인다는 사실 그 자체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어떤 이들은 경매를 통해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라고 은근히 제안했지만 그렇게 된다면 뉴원 애비뉴를 향한 순수한 마음이 손상될 것 같아 오한결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을 정리한 오한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뉴욕의 야경을 바라봤다.
“어떤 콘셉트가 어울릴까? 뉴욕의 대표적인 슬럼가의 변화라면…….”
눈앞에 화려하게 빛나는 대도시의 풍경 뒤에 숨겨진 어둡고 음침한 슬럼가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예술의 도시? 아니면 안전한 도시?”
오한결과 최하늘을 둘러싼 흑인 갱들의 매서운 눈빛과 굶주린 하이에나 같은 그들의 행동이 머릿속에서 불현듯 스쳐 갔다.
“나 역시 슬럼가 하면 위험했던 순간이 떠오르는구나.”
오한결이 눈을 감자, 왜소한 체격의 타이론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구석진 벽면에 낙서를 하고 있는 영상이 떠올랐다.
“하지만 뉴원 애비뉴를 예술의 도시로 만드는 건 타이론 같은 작가들의 역할일 거야.”
오한결은 자신이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청장에게 치안을 담당하게 하고 로건에게 재정적 부분을, 타이론에게 예술 도시로서 미래를 맡기는 사람.
“그렇다면 나는 뉴원 애비뉴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역할이면 좋겠어.”
오한결은 자신의 명성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뉴원 애비뉴에 쏠리게 하고 싶었다.
축제를 알리는 폭죽처럼.
화려하고 즐겁고 신나는 그림으로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작품을 구상해 보자.
콘셉트가 정해지자 오한결은 이미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온갖 즐겁고 행복한 감정의 멜로디가 추상적인 형태로 물결친다.
휘몰아치는 감정이 의식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지면 오한결은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면 된다.
눈을 뜬 오한결이 씨익 웃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폭죽 같이 터지는 이 감정을 좀 더 즐기고 싶은데.”
이불을 뒤집어쓴 오한결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근데…… 졸리네……. 그림은 나중에 그리자. 감정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 * *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윌리는 항상 그랬듯이 피자 두 판을 들고 항상 앉던 소파 자리에 편히 앉았다.
식도를 매끈하게 닦아 놓기 위해 콜라를 1.5리터를 단번에 들이킨 후 깔끔하게 트림을 했다.
그리고 피자 두 조각을 겹쳐서 입속에 가져가 우걱우걱 씹었다.
“아, 맛나네. 스트레스가 확 풀려.”
집 안이 너무 조용한 것 같아 근처에 놓인 리모컨을 손에 쥐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뉴스나 봐야겠다.”
채널 버튼을 몇 번 누른 윌리는 CNN 채널에 시선을 고정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타 앵커 윌슨이 배우 같은 모습으로 화면에 나타나자, 은근히 질투심을 느낀 윌리가 중얼거렸다.
“칫, 나도 살 빼면 저 정도 생겼다고.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다시금 이미 손에든 피자를 다 먹은 윌리는 다시금 피자 두 조각을 합쳐 입으로 가져갔다.
윌슨의 중저음 목소리가 정확한 발음으로 들려왔다.
[오늘은 매우 특별한 논문을 소개할까 합니다. 현대 예술의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킨 뉴욕대 출신 강사 윌리의 논문인데요.]
자신의 이름이 윌슨 앵커의 입에서 나오자 깜짝 놀란 윌리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윌리는 정식 교수는 아니고 뉴욕대 박사 학위를 따고 수년 동안 뉴욕대에서 강의를 해오고 있는 베테랑 강사입니다. 그를 따르는 학생들의 평이 좋은 점으로 봐선 그가 예술계에서 꽤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윌리는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뭐, 잘 알긴 하네.”
[그런 그가 특별한 논문을 쓴 건 그가 후원하는 제자 타이론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얼마 전 뉴욕 타임즈는 신인 작가인 타이론의 작품에 상당한 비판을 쏟아 냈는데요. 전문가들도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꽤 강도가 높았습니다.]
윌리가 주먹을 움켜쥐고 소리쳤다.
“내 말이! 나쁜 놈들!”
[저희가 몇몇 전문가들을 취재해 본 결과, 현재 활동하는 평론가들이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많았는데요.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방향과 가능성을 보여준 타이론의 작품에 아주 가혹한 평가를 한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제 빛을 보기 시작한 신인작가를 예술계에서 낙인을 찍는 효과가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는 전문가들도 많았습니다.]
앵커의 말에 공감한 윌리가 흥분한 상태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무 몸에 힘이 들어갔는지 갑자기 배가 고파진 윌리가 피자를 입에 다시 욱여넣었다.
[하지만 기울어진 평론계에 다시 균형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거겠죠. 그 역할을 뉴욕대 강사 윌리가 했다는 점에서 무척 고무적입니다. 미국 내 예술계 수장으로 있는 명문대 교수들도 모두 침묵하고 있는 와중에 평론으로는 신인으로 볼 수 있는 윌리가 정면에 나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윌리가 갑자기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다니, 이건 기적이나 다름없다고 윌리는 생각했다.
[윌리 강사는 뉴욕 타임즈의 평론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반박했는데요. 그 수준이 꽤 높아서 이 논문을 미리 읽어본 몇몇 전문가들은 올해 가장 뛰어난 논문으로 선정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한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윌리가 두 손을 모으고 ‘오!’ 감탄사를 연발했다.
[타이론의 신선한 작품 세계와 그 작품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윌리의 논문으로 뉴욕에 새로운 예술의 바람이 불 것이 자명해 보입니다.]
흥분한 타이론이 1.5리터 콜라를 또다시 단숨에 들이켰다.
윌슨 앵커가 한 손에 논문을 잡고 흔들며 말을 이었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를 하지 않은 논문인 만큼 CNN에서는 잠깐의 소개로만 마치겠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훌륭한 논문을 단독으로 입수해서 시청자 여러분께 소개해드렸다는 점이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금도 예술을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작가와 평론가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윌슨 앵커의 멘트가 끝나자 날씨 관련 뉴스로 화면이 전환됐다.
CNN 방송에 너무 놀란 윌리는 지금 소파 위에 올라선 채 어떻게 기쁨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 어리벙벙했다.
“이게 꿈이야?”
그 순간 문화재단 신수진 이사장의 말이 기억났다.
CNN이면 되겠죠?
그녀의 영향력에 놀란 윌리가 주먹을 입에 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갑자기 허기가 지자, 피자 박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
이미 피자 박스 안에 있던 두 판의 피자는 모두 윌리의 뱃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전혀 배가 부르지 않았다.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에는 한 판을 더 먹어도 될 것 같아, 재빨리 전화기를 들었다.
“네. 사장님. 단골 윌리에요. 네네. 페페로니 제일 큰 사이즈로 한 판 더요. 네? 친구가 왔냐고요? 아니요. 제가 먹을 건데요…….”
전화를 끊은 윌리는 아직 읽지 않은 문자 하나를 확인했다.
「뉴욕대 총장: 난 자네가 해낼 줄 알았네. 성공을 축하하네. 곧 기쁜 소식을 알려줄 예정일세.」
* * *
휘트니 미술관 입에서 데이비드 오 교수가 서성이고 있다.
이곳은 그가 오랫동안 외면했던 장소였다.
어디서도 말할 수 없었던 과거가 숨겨진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시기가 온 것 같다.
휘트니 미술관에 다녀온 오한결은 데이비드 오 교수가 작품에 숨겨진 메시지를 발견해냈고 그에게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선택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미국이 데이비드 오 교수를 배신자라고 낙인을 찍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가 미국 내에서 누렸던 모든 명성과 명예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데이비드 오 교수를 짓누르던 마음의 짐은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이제 한 걸음만 떼면 문을 열고 휘트니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질문 하나만 하고 싶었다.
‘나는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인가?’
단숨에 데이비드 오는 대답했다.
‘아니. 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이로써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20대 때 성공만 바라던 젊은 데이비드 오가 저지른 과오를 50대가 된 지금 바로잡는 것이다.
‘그래, 거짓으로 쌓인 명성은 결국 무너지게 돼 있어. 이제 그 시기가 됐을 뿐, 전혀 새로울 것 없는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언제든 무너질 준비가 됐다는 마음가짐에도 밀려드는 두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모든 작품의 진정성이 의심받으면 어떡하지?’
이제라도 뒤돌아 가버리면, 다시는 휘트니 미술관을 쳐다도 보지 않으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예술가로서 명예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자 발이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이 데이비드 오 교수가 입구에서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운 얼굴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사연 있어 보이는 데이비드 오 교수가 다시 발을 떼기 시작한 건 이탈리아 억양이 묻어 나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데이비드 오 작가님? 맞으시죠?”
무척 반가운 마음에 환하게 웃는 알베르토가 마치 연예인을 본 듯 소리 질렀다.
데이비드 오 교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휘트니 미술관에서 매년 초대장을 보내도 바쁘셔서 못 오셨는데, 드디어 발걸음을 하셨군요. 너무 영광입니다. 작가님!”
“제가 좀 바빴어요…….”
“물론 이해합니다. 작가님은 휘트니 미술관의 자랑이니까요. 얼마나 바쁘겠어요. 사람들이 작가님을 우러러보는 만큼 저희 미술관의 명성도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하.”
알베르토 관장의 지나친 립서비스에 데이비드 오 교수가 아찔함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그를 밀치고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 순간, 오한결의 충고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충동이 가라앉았다.
이제 진실을 밝히세요. 교수님. 그리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겁니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살짝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
“특별 전시실이 어딘가요? 제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알베르토가 대답했다.
“물론 가보셔야지요!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제가 일정이 있긴 한데,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우리 미술관의 자랑이신 작가님이 오셨는데, 제가 안내해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알베르토가 문을 열어 주자, 데이비드 오 교수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