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케이크 킬러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돌아온 강철 지부장은 자신의 책상 근처에 서성이는 타이론을 보고 놀라 물었다.
“타이론? 무슨 일 있나요?”
“아…… 그게.”
머뭇거리며 대답을 꺼리는 타이론을 보고 강철 지부장은 그의 방문이 작업실과 관련된 일 때문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뭐 필요한 게 있는 거군요. 말 만하세요. 뭐든 지원해 드릴게요.”
“아니……. 그게,”
중얼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던 타이론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강철 지부장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논문이에요.”
“논문이요?”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을 받은 강철 지부장이 논문을 천천히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대략 삼 분의 일 정도 읽은 강철 지부장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저자가 윌리군요. 내용은 타이론 작가 작품에 대한 미술사적 분석이고요. 현대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실려 있어요. 세상에!”
솔직히 강철 지부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타이론이 물었다.
“그래서 잘 쓴 거죠?”
“물론이죠! 이 정도 수준의 논문은 현직 교수들도 수년은 걸릴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은 타이론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탁을 좀 들어주시겠어요?”
타이론은 윌리가 푸념하듯 자신의 상황을 설명한 것을 그대로 전달했다.
뉴욕대 강사에 불과한 자신이 논문을 발표한다고 해서 귀담아 들어줄 사람이 별로 없다는 얘기와 함께, 정식 절차를 밟으면 이 논문이 언제 학술지에 실릴지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미 그쪽 분야에 지식이 많은 강철 지부장은 타이론이 전하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알겠어요. 이건 제가 쉽게 결정할 사항이 아닌 것 같군요. 마침 1층 카페에 신수진 이사장님이 계세요. 같이 가실래요?”
타이론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쑥스러운지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문화재단 뉴욕지부 1층 카페는 직원과 소속 작가들 전용이라 그런지 점심 시간인데도 상대적으로 한가했다.
창가 근처에 앉은 신수진 이사장은 태블릿 피씨로 한국 뉴스 기사를 읽으며 에스프레소를 홀짝이고 있었다.
여유를 즐기던 신수진 이사장이 어수선한 주변 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강철 지부장과 타이론이 멀뚱멀뚱 서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죠? 지부장님.”
“이사장님께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강철 지부장이 슬며시 윌리의 논문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신수진 이사장은 아무런 설명도 요청하지 않은 채 천천히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십 분의 숨 막히는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신수진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대단하군요. 정말 놀랐어요.”
감탄사를 내뱉은 신수진 이사장이 타이론을 쳐다봤다.
“타이론의 작품을 평가절하 한 뉴욕 타임즈의 평론을 완벽하게 깨부수는 이론입니다. 이 논문은 현대 미술의 전반적인 역사를 다룬 후 그동안 축적된 이론적 양식에 따라 타이론의 작품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론을 전개하고 있어요. 새로운 미적 양식을 제안하고 그것을 완벽한 이론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논문입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논문을 찬양하자 타이론은 마치 자신의 논문이 인정받은 것처럼 무척 기쁜 표정을 지었다.
무척 무서운 신수진 이사장이지만 타이론이 용기 내 한마디 했다.
“……윌리의 논문이에요.”
“알아요. 저자가 써 있으니까.”
상당히 딱딱한 말투로 신수진 이사장이 대답하자, 타이론이 다시 얼어 버렸다.
강철 지부장이 그런 타이론을 대신해 설명을 이어서 했다.
“논문을 썼지만 발표가 쉽지 않은가 봅니다. 아마도 뉴욕 타임즈를 썼던 평론가의 위상을 생각해서 뉴욕대도 쉽게 공표하지 않을 것 같고요. 난관이 예상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시만요!”
왜 이 논문이 세상에 나오기 힘든지 이유를 나열하던 강철 지부장의 말을 신수진 이사장이 끊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지금 이 논문이 세상에 나오길 바란다는 거죠?”
“맞습니다.”
강철 지부장보다 타이론이 더 먼저 대답했다.
잠시 고민하던 신수진 이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CNN에서 소개하면 어떨까요?”
“그게 가능한가요?!”
놀란 타이론이 대답하자, 신수진 이사장이 그를 위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그렇게 만들게요. 이제 이 논문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타이론은 작품에 집중해 주세요. 작가는 작품 할 때가 가장 멋지니까요.”
타이론의 눈에는 신수진 이사장이 원더우먼으로 보였다.
‘너무 완벽하신 분!’
* * *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뉴욕대에서는 뉴욕대의 밤 만찬이 진행된다.
총장의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행사여서 뉴욕대 전 직원이 빠질 수 없는 행사이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교수들과 교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앤드류 옆에 앉은 윌리는 행사장에 마련된 맛있는 케이크를 거의 흡입하고 있었다.
“교수님도 드셔보세요. 이거 완전 수제네요. 크림이 달지도 않고 아주 촉촉해요.”
윌리 입 주변에 크림이 잔뜩 묻은 것을 발견한 앤드류가 티슈를 건네며 대답했다.
“그래, 천천히 먹게나. 탈 나겠어. 음료도 좀 마시고.”
교직원들을 차례로 만나며 인사를 나누던 총장이 앤드류와 윌리를 발견하고는 환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있었구먼. 다들.”
앤드류와 윌리가 입 주변을 정리하고 꾸벅 멋쩍은 자세로 인사를 했다.
“네, 총장님. 참 멋진 파티입니다. 매번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분위기도 좋고 고급스럽군요.”
앤드류가 총장에게 파티에 대한 소감을 전하자 총장이 무척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앤드류 자네는 눈썰미가 좋다니까. 하긴 그러니까, 예술가로서 그렇게 명성을 떨쳤던 거겠지.”
그리고는 조용히 옆에 서 있던 윌리를 쳐다보며 총장이 말을 이었다.
“자네는 요즘 어떤가. 강사는 할 만해?”
윌리가 대답하려는 찰나, 총장이 먼저 말을 이었다.
“하긴, 힘들겠지. 좀 더 분발해 보게. 솔직히 말해서 앞으로 분명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학교에 남아 있기 힘들어. 자네도 언젠가 정교수를 해야 하지 않겠나? 가끔 보면 욕심이 없는 사람 같아. 그건 인생 선배로서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네.”
총장이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내용은 정말 뼈아픈 말이라 윌리가 쉽게 웃질 못했다.
그런 윌리의 표정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총장이 말했다.
“저쪽에서 나를 부르는구먼. 자네들하고 얘기를 더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어. 나중에 또 보자고.”
총장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앤드류가 윌리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너무 마음에 담지 말게나. 자네는 잘하고 있어. 다만 정교수는 워낙 경쟁이 세서 쉽지 않을 뿐이지. 그래도 노력만 한다면 언제든 기회가 올 거야.”
“혹시, 제가 쓴 논문 읽어 보셨어요?”
앤드류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논문?”
“제가 어제 드린 거 있잖아요. 제가 쓴 건데…….”
이제야 생각난 앤드류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윌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 맞네. 자네가 준 논문. 내가 이번 주는 정말 바빠서 말이야. 다음 주쯤에 읽고 피드백해주면 안 될까? 도저히 시간이 안 돼서 말이야.”
실망한 윌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열심히 쓴 건데요, 교수님. 아쉬워요.”
“하하하. 걱정하지 말게. 자네 논문 스타일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안 봐도 어떻게 썼는지 훤히 알 수 있어. 다음 주에 최고의 피드백을 해줌세.”
윌리는 어쩌면 자신의 논문이 이렇게 묻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이게 현실이지…….’
스트레스가 급격하게 올라온 윌리는 케이크에 향하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 * *
재즈클럽 구석에 자리 잡은 오한결과 최하늘, 리나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엊그제 두 곡 녹음 마쳤어요. 피디님께서 얼마나 칭찬을 하는지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리나의 자랑에 최하늘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예요! 지금 자랑하는 거죠?”
“어머, 들켰나? 미안해요. 제가 너무 기뻐서요.”
리나와 최하늘이 빠른 속도로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오한결은 조용히 클럽 안을 둘러봤다.
오늘따라 유난히 두 사람이 말이 없이 앉아 있었다.
바로 데이비드 오 교수와 윌리였다.
“오한결 작가님, 누구 찾으세요?”
말없이 두리번거리는 오한결에게 리나가 물었다.
“아뇨. 저 두 분이 조용해서 좀 쳐다봤어요. ”
오한결의 말에 그제야 최하늘이 데이비드 오 교수와 윌리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각각 조용한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는 말없이 술만 들이켜고 있었다.
최하늘의 눈에 당혹감이 서리자 오한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님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실 거예요.”
오한결은 지난번 데이비드 오 교수와 단둘이 만나서 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전했다. 모든 얘기를 들은 최하늘과 리나는 몹시 놀라면서도 데이비드 오 교수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항상 멋지게만 보였는데, 데이비드 오 교수님도 그런 과거가 있었군요.”
리나가 데이비드 오 교수의 축 처진 어깨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데이비드 오 교수님이 있는 거겠죠. 이제 교수님이 과거의 일을 모두 털어버릴 때가 온 것 같아요.”
오한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하늘이 이번에는 윌리의 축 처진 어깨를 보며 물었다.
“근데 윌리는 왜 저래요? 혹시 윌리도 숨겨진 과거가 드러났나?”
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제가 윌리를 오랫동안 알았는데, 그런 과거는 없을 거예요. 아마도…….”
리나와 최하늘이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동시에 외쳤다.
“다이어트!”
그리고는 깔깔깔 웃으면서 자신의 추론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맞네. 다이어트. 원래 갑자기 안 먹으면 사람이 힘이 없잖아요. 딱 그 모습인데 뭐.”
리나의 말에 깊은 공감을 표하며 최하늘이 맞장구쳤다.
“이때 건들면 폭발해요. 당분간 윌리에게 말을 걸면 안 되겠어요. 평소에도 예민한데 이제 더 심해지겠네.”
리나와 최하늘이 서로의 추리 능력을 칭찬하고 있었지만 오한결은 윌리의 축 처진 어깨가 단순히 굶어서 생긴 스트레스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명 이유가 있어 보이는데…….’
그때 최하늘이 뭔가가 생각났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했다.
“작가님! 강철 지부장님께서 말씀하셨는데, 타이론이 개인전 작품을 모두 완성했대요.”
“아, 정말이요? 와우, 작업 속도가 빠르네요.”
오한결의 칭찬에 최하늘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대답했다.
“에이, 작가님만큼 빠르겠어요? 호호.”
“어머, 그럼 전시하겠네요. 어디서 해요?”
리나가 관심을 보이며 묻자 최하늘이 대답했다.
“우선 잠정적으로는 문화재단에서 하기로 했어요. 윌리가 신인 작가라 괜찮은 전시 공간을 구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뉴욕 타임즈의 비평도 있고 해서 더욱 그래요.”
“문화재단에서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거 아니에요?”
리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최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하지만 오한결 작가님이 추천한 작가니까, 신수진 이사장님은 더 멋진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고 싶은 거죠.”
두 사람 말을 조용히 듣던 오한결이 속으로 생각했다.
‘멋진 전시장이라……. 내가 도움을 좀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