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늦은 후회
신태진 회장이 자신을 찾아온 박영운 실장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됐나 보군. 피곤해 보여.”
“저는 괜찮습니다, 회장님.”
푸석한 얼굴을 한 박영운 실장이 슬며시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는 불과 두 시간 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뉴욕에서 서울로 날아오는 내내 멍한 얼굴로 오한결 작품을 생각하던 그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신태진 회장에게 연락해 급히 찾아온 것이다.
오직 오한결 작품에 대한 이 감동을 나눌 사람은 그밖에 없었으니까.
“뉴욕에서 오한결 작가 작품을 직접 봤겠구먼.”
생각에 빠진 박영운 실장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신태진 회장이 말을 건네자, 박영운 실장이 화들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실 그것 때문에 제가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하하하. 설마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잠시 머뭇거리던 박영운 실장이 대답했다.
“뭐……. 짐작하긴 했습니다. 하하.”
누가 신태진 회장의 정보력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박영운 실장은 자신의 출국 사실과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오한결의 작품을 봤던 모든 사실을 신태진 회장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짐짓 모른 척을 했던 것이다.
‘내가 오한결 작가의 실력을 의심했는데, 무슨 낯으로 회장님을 뵙겠나.’
지난날 자신의 고집을 생각하던 박영운 실장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제 오한결 작가의 예술적 능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으니,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온 게 아니던가.
“그게…….”
박영운 실장이 주춤하자, 신태진 회장이 몸을 소파에 편히 기댄 채 말했다.
“어서 말하게.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렇게 달려온 게 아닌가?”
“제가 오만했던 것 같습니다. 오한결 작가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한 제가 많이 미흡했습니다.”
몹시 기다렸던 그 말이 나오자 신태진 회장이 몸을 앞으로 숙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박영운 실장이 오한결 작가를 인정했구먼.”
“인정이라뇨! 가당치 않습니다. 그 압도적인 작품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미리 알아보지 못한 제가 부끄럽더군요.”
신태진 회장은 그의 진심어린 말에 마음이 한껏 흐뭇해졌다. 둘 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라 더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고집을 쉽게 꺾지 않을 것 같던 박영운 실장이 오한결 작가를 이렇게 인정하니 속으로 쾌재가 절로 나왔다.
“제가 오한결 작가를 만나 정중하게 명일 글로벌 무역센터 로비 디자인을 부탁하겠습니다.”
“그거 잘 됐구먼.”
박영운 실장의 말에 신태진 회장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큰 고비를 하나 넘겼다는 안도감도 잠시, 불현듯 불안한 생각이 신태진 회장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근데, 우리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네?”
“오한결 작가가 수락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지난번에 오한결 작가가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신태진 회장은 답답한지 박영운 실장을 슬쩍 바라보고 말했다.
“이 사람아, 그건 그때 일이지. 이미 세계적인 작품을 하나 더 선보인 오한결의 스케줄은 아무도 예측하기 힘들게 됐어. 거절한다고 해도 이제는 뭐라 할 말이 없네. 진작 계약서라도 쓸 걸 그랬어.”
회장의 말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박영운 실장이 옅은 신음을 토해냈다.
“제가……. 무슨 짓을 한 걸까요. 그분이야말로 명일의 철학을 작품으로 표현할 적임자인데, 그것도 못 알아보고….”
그 모습에 흥미를 느낀 신태진 회장이 갑자기 털털하게 웃었다.
“하하하. 이제 자네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구먼.”
“네?”
“자네가 직접 오한결 작가를 설득해야겠어. 꼭 명일 글로벌 무역센터를 그가 맡게 해주게나.”
회장의 엄중한 말에 박영운 실장이 진지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을 향해 구십도로 허리를 숙였다.
“네! 회장님. 꼭 임무 완수하겠습니다.”
하지만 박영운 실장 마음속에서 은근히 느껴지던 불안감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 내가 왜 고집을 부려가지고…….’
* * *
아리미술관 회의실에 묵직한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제가 신수진 이사장에게 부탁받은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난밤 뉴욕에 출장 중인 신수진 이사장이 자신의 어머니인 이현미에게 전화를 걸어 휘트니 미술관에 걸린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현재 그의 작품이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데이비드 오 교수가 미국 작가로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전했다.
어머니! 아니, 이현미 관장님.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 바람은 아리 미술관에서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이 전시되는 거예요. 그건 분명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요!
모든 내용을 전달받은 한소정 큐레이터는 사실상 난색을 보였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단호한 한소정 큐레이터의 말에 이현미 관장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물론 힘들 겁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단언할 필요가 있나요?”
하지만 한소정 큐레이터는 터무니없는 계획에 동조해줄 생각이 없었다. 물론 자신의 앞에 앉은 사람은 아리 미술관을 책임지는 미술관장이지만 큐레이터로서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외국 미술관에 있는 한국 작가 작품을 우리가 원한다고 이관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 휘트니 미술관은 데이비드 오 교수에게 직접 작품을 구입해서 전시하고 있어요. 이 모든 건 돈의 문제가 아니에요.”
솔직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준 한소정 큐레이터에게 이현미 관장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마워요. 솔직하게 말해줘서.”
예상치 못한 이현미 관장의 말에 한소정 큐레이터가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닙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제 말이 그렇게 도움이 못 돼서요.”
“호호호. 아니에요.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인걸요. 휘트니 미술관의 명예가 달린 일이에요, 그들은 절대 돈 때문에 작품을 넘기지 않을 겁니다.”
갑자기 이현미 미술관장이 묵직한 목소리 톤으로 바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리 미술관의 목적은 단순하게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에 그치지 않아요. 한국에 있어야 할 마땅한 작품을 외교적인 해법을 통해 아리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도 포함돼 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방법이야 찾으면 되죠. 우리 함께 머리를 맞대 봅시다.”
고민에 빠진 한소정 큐레이터를 지그시 바라보던 이현미가 다시금 물었다.
“질문 하나 할게요. 한 큐레이터.”
“네……. 관장님.”
“휘트니 미술관에 전시된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을 잘 알고 계시죠?”
“네, 워낙 이쪽에서는 유명한 작품이니까요.”
“그렇다면 더 중요한 걸 물어야겠네요. 데이비드 오 교수의 그 작품이 휘트니 미술관에 어울립니까? 그들은 그 작품이 미국적인 작품이라고 하고 있어요. 공감하시나요?”
“그건…….”
한소정 큐레이터는 데이비드 오 교수를 순간 떠올렸다.
그가 어딜 봐서 미국적인 성향의 작가란 말인가? 그는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에 찬란한 예술 문화가 꽃피웠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었다.
‘근데 이 모든 사태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오 교수는 왜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작가가 나서서 모든 걸 해명한다면 여론은 급격하게 한국에 유리해질 수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한소정 큐레이터가 대답했다.
“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이 미국을 대표하는 멋진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는 사실은 무척 기쁩니다. 하지만 단순 전시에 그치지 않고 미국인의 사상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분명 문제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이현미 관장이 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한소정 큐레이터를 설득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해결의 열쇠는 데이비드 오 교수님입니다. 우선 그가 자신의 입장을 표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리 미술관이 움직일 수 있어요. 분명 외교적 문제로 번질 수도 있지만요…….”
한소정 큐레이터의 대답에 만족한 이현미 관장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오한결 작가가 데이비드 오 교수를 만나보기로 했으니까요. 아마도 곧 우리는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현미 관장은 데이비드 오 교수에게 다른 의중이 있을 것처럼 말을 했지만 내심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정말로 미국을 위해서 작품을 만들었을 수도 있잖아?’
* * *
뉴욕의 야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멋진 라운지에서 오한결과 데이비드 오 교수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열지 않고 야경만 바라봤다.
잠시 뒤 오한결이 슬쩍 말을 꺼냈다.
“휘트니 미술관에서 교수님 작품을 봤습니다.”
데이비드 오 교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그랬군. 이미 예상했던 일이야. 자네는 어땠나? 내 작품 괜찮았지?”
오한결은 데이비드 오 교수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오한결이 대답하기 전에 데이비드 오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작품은 20년 전 작품이야. 내가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뉴욕에 건너와 작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 만든 작품이지.”
“상당히 오래전 작품이라는 생각은 안 들더군요.”
“고맙네. 미국에서 몇 년간 무명생활을 거치면서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만든 작품이야. 그 작품 하나로 나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고, 내가 원하는 예술을 마음껏 펼칠 기회가 찾아왔지.”
오한결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데이비드 오 교수를 쳐다봤다.
“교수님도 무명 생활이 있었나요?”
“물론이지. 자네처럼 등장하자마자 천재 작가로 대접받는 경우는 없어.”
데이비드 교수의 말에 오한결은 회귀 전 끔찍했던 자신의 무명시절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 절망감은 회귀 후 기쁜 일만 있는데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오한결은 굳이 자신의 과거를 밝히며 데이비드 오 교수와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운이 좋았죠.”
그리고 또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연거푸 술을 마셔서 그런지 살짝 취한 듯 보이기도 했다.
오한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휘트니 미술관은 대외적으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리고 흥미롭게도 휘트니 미술관을 대표하는 특별 전시장에 데이비드 오 교수님의 작품이 있고요.”
“자네에게 그게 흥미로워 보이는구먼.”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데이비드 오 교수를 향해 오한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교수님은 본인의 작품을 둘러싼 논쟁을 아시나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고개를 들고 오한결을 바로 쳐다봤다.
“알고 있네.”
“그렇다면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금 뜸을 들인 데이비드 오 교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작품은 나의 자랑이자,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일세. 그걸 부정할 수 없어. 하지만 그건 나의 부끄러움이기도 하지.”
데이비드 오 교수 입에서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 나오자, 오한결이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