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70화 (170/202)

제170화 숨겨진 사연

휘트니 미술관 내부로 신수진 이사장이 들어서자, 미리 연락을 받은 알베르토 관장이 그녀를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알베르토입니다. 워낙 명성이 대단하셔서, 이렇게 뵙게 돼 기쁘군요.”

바로 오늘 오전 갑자기 문화재단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문화재단을 총괄하는 신수진 이사장이 알베르토 관장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알베르토 관장은 신수진 이사장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녀가 미국 내 주요 예술단체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예술 단체 후원을 시작해 이제는 주요 언론까지 모두 장악한 그녀는 업계에서 대단한 인맥으로 통한다.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왔구나.’

그런 알베르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수진 이사장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가운 얼굴로 휘트니 미술관 내부를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저도 관장님을 무척이나 만나고 싶었습니다. 미술관이 참 깔끔하고 고급스럽네요.”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던 알베르토 관장이 말했다.

“뉴욕에 멋진 미술관이 많긴 하지만, 휘트니 미술관은 그 중 으뜸이라고 자부합니다. 미국 근현대 회화, 건축, 디자인 등 총 25,0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할 정도로 규모도 대단하고요.”

그때 신수진 이사장의 눈에 층별 안내문이 들어왔다.

「지상 8층: 데이비드 오 작가의 특별전」

쓴웃음을 지으며 신수진 이사장이 말했다.

“사실은 8층 특별 전시를 보러왔습니다.”

“아하! 역시 대충 짐작하긴 했습니다.”

그제야 신수진 이사장의 방문 목적을 짐작했다는 듯이 알베르토가 말을 이었다.

“휘트니 미술관을 찾는 방문객 중 대략 70~80%가 데이비드 오 작가의 작품을 보러 옵니다. 이미 20년이 넘은 작품이지만 그의 창의력에 견줄 수 있는 작가는 아직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미국 시민들을 그를 무척 자랑스러워하죠.”

‘미국 시민’이라는 말에 신경이 쓰인 신수진 이사장이 물었다.

“해외 관광객들의 비중은 크지 않습니까?”

살짝 당황한 알베르토 곤장이 뜸을 들인 후 말했다.

“글쎄요. 워낙 미국적인 작가니까요. 해외 관광객들도 오긴 하지만, 워낙 미국답고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다 보니 국내에서 많이 사랑받고 있습니다.”

기가 막힌 말을 들은 신수진 이사장이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허!”

신수진 이사장의 반응에 놀란 알베르토가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아뇨. 죄송합니다. 제가 건조한 곳에 오면 헛기침이 나서요.”

신수진 이사장이 서둘러 둘러대자, 알베르토는 그대로 믿는 눈치였다.

“건조하긴 하네요. 제가 운영팀에 얘기해서 내부 습도 조절을 해야겠어요.”

신수진 이사장이 ‘8층 데이비드 오 작가 특별전’ 팜플릿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저도 이 특별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한가한 다른 전시관과 다르게 8층 데이비드 오 작가 특별전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가요?”

“오늘 특별히 더 많은 것 같군요. 엊그제 데이비드 오 작가가 언론과 인터뷰를 했거든요. 그게 홍보가 된 것 같군요.”

뉴욕에 출장 중인 데이비드 오 교수는 수많은 문화단체 및 언론과 자주 만남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를 취재한 기사가 나올 것이고 휘트니 미술관도 관광객이 늘어나는 효과를 봤을 것이다.

신수진 이사장은 알베르토의 안내를 받아 작품 근처로 다가갔다.

어두운 전시장을 배경으로 커다란 스크린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딱딱 끊어지는 전자음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음악과 춤의 동작은 하나의 메시지였다.

그것을 보는 관람객들은 각자 그 영상 언어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다.

“참, 독특하죠.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이렇게 사람들의 몰입을 끌어내는 작품을 본 적이 없어요. 보통은 슬쩍 보고 지나가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직접 보니까 왜 데이비드 오 교수가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 알 것 같네요.”

“맞습니다. 유럽이 예술로서 자부심을 드러내지만, 미국에는 데이비드 오 작가가 있습니다. 그거 하나면 충분합니다. 하하.”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알베르토를 유심히 바라보던 신수진 이사장이 말했다.

“근데 알베르토 관장님은 이탈리아 출신 아닙니까? 유럽 작품과 비교하시는 모습이 꽤 흥미롭군요.”

“그, 그거야. 저는 휘트니 미술관 관장이니까요. 일종의 직업정신?”

신수진 이사장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작품에 몰입하자, 알베트로는 찜찜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뭐지, 내가 말린 거 같은데.’

잠시 뒤, 작품 관람을 끝낸 신수진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데이비드 오 교수가 왔나요? 현재 뉴욕에 있잖아요.”

알베르토가 훤하게 벗겨진 자신의 머리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게, 저희가 몇 번을 초청했는데 응하지 않으세요. 하지만 이해는 합니다. 워낙 바쁘시니까요.”

“그래요?”

신수진 이사장은 꽤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작품을 특별전까지 해가며 대우하고 있는 휘트니 미술관 방문을 꺼리다니. 데이비드 오 교수는 분명 이곳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민하고 있던 신수진 이사장에게 알베르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작품을 더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제 사무실로 가셔서 차 한잔하시지요.”

“네, 좋아요. 저도 마침 관장님과 나눌 얘기가 있거든요.”

미술관 후원 얘기가 나올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진 알베르토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가시지요!”

한 시간 뒤, 휘트니 미술관 밖으로 나온 신수진은 찜찜한 기분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알베르토 관장은 한 시간 내내 휘트니 미술관 전시 작가를 찬양했고 특히, 데이비드 오 교수를 가장 으뜸으로 뽑았다.

조용히 얘기를 듣던 신수진 이사장이 데이비드 오 교수가 한국 대표 작가라고 은근히 운을 띄워 봤지만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알베르토 관장이 말했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데이비드 오 작가도 자신을 미국 작가라고 소개했는걸요.”

그런 말을 하면서 20년 전 미국에서 발행된 예술 잡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신수진 이사장은 눈을 크게 뜨고 기사를 읽으면서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잖아. 왜 이런 인터뷰를 한 거지?’

끔찍한 생각을 지워버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신수진 이사장이 오한결 번호를 누르고 통화를 했다.

“오한결 작가님! 저 신수진입니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당황한 오한결이 버벅댔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제가 작가님과 의논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시간 되시나요?”

[네? 아시다시피, 제가 뉴욕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저도 뉴욕에 있어요.”

[네. 네?]

“방금 휘트니 미술관에서 데이비드 오 교수 작품을 봤습니다.”

그녀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챈 오한결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그렇군요. 만나야지요. 어디서 볼까요?]

“문화재단 뉴욕지부로 오세요! 최하늘 씨와 함께요.”

[네, 출발하겠습니다.]

* * *

문화재단 뉴욕지부 회의실에 앉은 최하늘이 좀처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건너편 자리에 신수진 이사장이 특유의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자료를 검토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그리고 무엇보다 더 충격적인 건 신수진 이사장이 뉴욕에 온 지 꽤 됐다는 사실이었다.

‘널널하게 오한결 작가님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맛집 투어도 자주 했는데, 들켰을까?’

이런저런 고민에 빠진 최하늘을 깨운 건 신수진 이사장의 목소리였다.

“다들 휘트니 미술관에 데이비드 오 교수 작품이 특별전으로 전시돼 있는 걸 아시죠?”

먼저 대답한 건 강철 지부장이었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특별전을 진행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당하게 대답하는 강철 지부장을 쳐다보며 신수진 이사장이 말했다.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하지만 강철 지부장도 자신의 일에는 언제나 당당한 편이었다.

“문제죠. 하지만 그건 데이비드 오 교수의 결정이었습니다. 우리가 끼어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강철 지부장의 견고한 눈빛에 흥분을 가라앉힌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합니다. 제가 좀 흥분한 것 같군요. 지부장님 말이 맞아요. 작가의 선택은 언제나 존중돼야 하죠.”

조용히 대화를 듣던 오한결이 말했다.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에 숨겨진 뜻을 모두 찾으셨나요?”

모두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오한결을 바라봤다. 그러자 오한결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은 대한민국을 찬양하고 있었어요.”

더욱 놀란 표정을 짓던 사람들에게 오한결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의 작품 속 검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은 전자음에 춤을 추는데 그 형상을 자세히 보면 ‘위대한 대한민국’이라는 문자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워낙 교묘하게 숨겨놨기 때문에 그 의미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정말 소수였을 거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뒤, 강철 지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데이비드 오 교수에게 남모를 사연이 있는 거겠군요. 아니면 단순한 장난이거나.”

최하늘이 물었다.

“네? 장난이요? 설마요.”

“휘트니 미술관은 미국의 대표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에요. 그곳에 ‘위대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작품을 전시한다는 건 그 자체로 퍼포먼스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오한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흥미로운 추론이긴 하나, 가능성이 희박해 보여요. 20년 전 작품입니다. 그때 데이비드 오 교수의 상황을 짐작해 보자면,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최하늘이 오한결을 바라보며 물었다.

“20년 전이면 어땠는데요?”

“그는 가난한 예술가였죠. 누구보다 성공하고 싶었던 열망이 가득했던 청년이었기도 하고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그 당시 미국을 위해 작품을 만들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오한결의 말을 곱씹던 신수진 이사장이 대답했다.

“어찌 됐든 그건 20년 전 얘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작품이 미국을 대표하지 않고, 오히려 대한민국이 위대하다고 말하고 있는 걸 알았어요. 어떤 식으로든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사장님이 생각하신 계획이 있으신지요?”

강철 지부장이 회의적인 시선으로 묻자 신수진 이사장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작품을 한국으로 가져갈 겁니다.”

“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데이비드 오 교수가 휘트니 미술관 전시를 결정한 것이라고요. 작가 개인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끼어들 수 없어요.”

그럼에도 단호하게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는 신수진 이사장을 보면서 오한결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그 작품에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데이비드 오 교수를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눠볼게요.”

오한결의 말에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작가님. 생각해 보니까, 그게 맞는 것 같군요.”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저는 아리 미술관에게 도움을 청해보겠습니다. 그쪽이 더 전문가니까요.”

최하늘은 은근히 회의실 분위기에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건 뭐, 예술계 어벤져스만 모였구나.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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