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고담 시티
로건이 노트북으로 지난 빅스퀘어 이벤트 영상을 보며 한껏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당연히 비서 혼자 들어올 줄 알았는데, 오한결의 모습이 보이자 로건이 벌떡 일어나 반가운 손님을 맞이했다.
“와우! 오한결 작가님이 오셨군요. 때마침 작가님 작품 영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랬나요? 하하.”
한껏 고조된 로건의 모습에 오한결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로건은 당연히 리나와 관련된 일로 자신을 찾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리나에게 신뢰할 만한 음반 제작사 리스트를 만들어 제공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오한결의 부탁에 의해서였지만.
로건은 마주 앉은 오한결에게 말했다.
“소식을 들으니, 리나가 제작사를 정했다고 하더군요. 꽤 유명하고 신뢰할 만한 곳이죠.”
“로건 덕분입니다. 앞으로 리나는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게 됐어요.”
오한결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로건은 슬쩍 흘러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오한결은 그의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느껴졌다.
“로건은 예술가를 매우 아끼시는 분 같군요.”
“물론이죠. 사실 저도 예술을 전공했거든요. 사업이 성공했지만 저의 뿌리는 언제나 예술입니다.”
오한결은 로건의 답변을 들으면서 신태진 회장을 떠올렸다. 재벌들의 예술 사랑이 이렇게 순수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로건의 확고한 예술 사랑을 확인한 오한결은 오늘 온 목적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사실, 오늘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일종의 제안이죠?”
리나 때문에 방문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로건은 살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설레는 마음이 더 컸다. 또 어떤 짜릿한 이벤트를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지 기대됐기 때문이다.
은근한 기대를 내포한 로건의 표정을 보면서 오한결이 당당하게 말했다.
“뉴원 애비뉴를 바꾸고 싶습니다.”
“네?”
뉴원 애비뉴라는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들은 로건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거긴 뉴욕에 있는 대표적인 슬럼가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그래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로건의 머릿속에서 오래되고 지저분한 뉴원 애비뉴의 거리 이미지가 빠르게 스쳐갔다. 소외되고 버려진, 그리고 범죄의 온상인 곳을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로건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말했다.
“글쎄요, 오한결 작가님답게 파격적인 뭔가를 들고 오셨지만, 이번만큼은 공감하기 힘들군요. 저는 예술을 지원하겠다는 것이지 범죄를 소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정치적인 이슈 같군요.”
“음, 예술의 역할에 대해 좁게 생각하고 계시군요. 저는 어떤 변화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하.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세요. 뭘 어떻게 바꾸겠다는 겁니까?”
오한결은 타이론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했다. 뉴원 애비뉴 출신인 그가 어떤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는지, 하지만 그에 대한 여론의 따가운 시선까지 솔직하게 말했다.
무엇보다 타이론을 아끼는 윌리가 슬럼가가 두려워 그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사태에 대해 심각하게 전했다.
“그게 뉴욕의 두 얼굴이죠. 화려한 도시 뒤편에 숨겨진 민낯이요. 하지만 오한결 작가님, 치안을 해결할 순 없어요.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저는 예술을 하자는 겁니다.”
감을 잡지 못하는 로건에게 오한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는 뉴원 애비뉴를 예술의 마을로 만들고 싶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솔깃한 제안에 로건이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뉴욕은 예술의 도시 아닙니까? 사람들은 볼만한 가치 있는 예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리라 생각합니다. 뉴원 애비뉴에 멋진 작품들이 곳곳에 전시된다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질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도시의 치안도 좋아지겠네요. 범죄나 기타 여러 문제는 마을이 방치됐기 때문이니까요.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면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겁니다. 참 멋진 아이디어에요.”
오한결의 제안에 흥분한 로건이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말했다.
“하지만 그 정도 파급 효과가 있는 예술 작품을 뉴원 애비뉴에 설치할 수 있을까요?”
“제가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타이론이 있다고.”
“타이론…….”
“저는 그의 재능을 믿어요. 타이론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면 분명 뉴원 애비뉴는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관광 명소가 될 것입니다.”
오한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보이던 로건이 의구심이 드는 점을 솔직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모든 조건이 좋아요. 하지만 그는 아직 10대에 불과하잖아요. 무엇보다 최근 뉴욕 타임즈에게 혹독한 평가도 받았고요.”
“맞아요. 그래서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오한결 작가님이요?”
다시금 오한결의 멋진 예술 작품을 보게 될 거라는 생각에 흥분한 로건이 벌떡 일어선 후 말했다.
“네, 우선 뉴원 애비뉴를 홍보할 첫 번째 작품은 제가 그리겠습니다. 도시 입구에 설치하면 효과가 있겠죠?”
“세상에!! 진심이십니까?”
“물론이죠.”
“오! 갑자기 뉴원 애비뉴가 너무 보고 싶군요. 거기가면 타이론의 작품도 볼 수 있는 거고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로건이 사무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말했다.
“제가 직접 뉴원 애비뉴에 가보겠습니다. 못 참겠어요!”
예상대로 로건이 반응해주자, 오한결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토마스 청장입니다. 로건이 안전하게 뉴원 애비뉴를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명함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로건이 히죽 웃으며 생각했다. 오한결은 이 모든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했구나. 자신이 꼼짝없이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건 기분 좋은 함정 아닌가?
* * *
윌리가 거울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있다.
“이런! 도저히 용기가 안 나네!”
벌써 몇 시간 째 현관문 앞 거울 앞에서 서성이며 중얼거리고 있다.
윌리는 어제 밤새 고민 끝에 며칠째 나타나지 않고 있는 타이론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문제는 타이론의 집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뉴원 애비뉴라는 사실이다.
사춘기 시절 우연히 길을 잃고 뉴원 애비뉴에 들어갔는데, 그때 만났던 깡패 형님들 덕분에 아주 고약한 아픈 추억을 갖고 있었다.
“아,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네.”
잊고 살았던 트라우마였는데 뉴원 애비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오한결 작가님한테 동행을 부탁해볼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지 않은가.
자신의 제자를 찾아가는 것도 오한결 작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그리고 오한결 작가처럼 호리호리한 사람에게 무슨 경호를 받는다고. 자신처럼 멋지고 든든한 몸매를 가진 사람이 더 갱들에게 맞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정리하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육중한 거구의 몸이 멋지게 보였다.
물론 생각은 그랬지만 떨리는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동하는 한 시간 동안 떨리는 마음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지만 윌리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드디어 뉴원 애비뉴로 통하는 골목에 접어들자, 다리가 후들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뉴욕의 세련된 모습과 정반대로 오래된 건물 특유의 음침함과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윌리는 당당하게 그러나 앞만 바라보며 타이론의 집으로 향했다.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내 마음이 풀리면서 윌리의 발걸음은 살짝씩 가벼워졌다.
“이제 저 골목만 돌면 되겠구나. 뭐 쉽네. 하하.”
긴장이 풀린 윌리의 눈에 주변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 슬쩍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데, 뒤늦게 윌리는 자신을 지켜보는 수많은 눈동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들은 낮은 건물 곳곳에 숨어서 윌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친 윌리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는데, 다행히도 손으로 입을 가려서 가벼운 신음만 새어나왔다.
걸음을 재촉하며 위기 상황을 피해보려 했지만 그들은 결코 윌리가 그곳을 빠져나가게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이! 너 거기 좀 서봐라.”
윌리는 마치 못 들은 척,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그 소리를 외면했다.
“야! 너 뚱보. 왜 모른 척 해?”
갑자기 키가 대략 2미터 정도 되는 근육질의 흑인이 윌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윌리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아……. 저요?”
“그래, 너! 여기 너 말고 또 있어?”
“하하하……. 살짝 짐작하긴 했는데, 그랬군요.”
이제 건물 안에서 윌리를 노려보던 갱들이 슬금슬금 거리로 나와 윌리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략 20명 정도로 생각보다 많아 윌리를 더욱 당황케 했다.
“무슨 일이신지……. 제가 좀 바빠서.”
윌리가 은근슬쩍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그를 둘러싼 갱들 중 그 누구도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윌리는 이제 독 안에 든 쥐 신세나 다름없었다.
“우리 동네에 무슨 일로 왔나?”
“타이론을 보려고요…….”
“타이론? 그게 누구지?”
그러자 옆에 있던 레게 머리 흑인이 대답했다.
“낙서하는 꼬맹이잖아. 리틀 바스키아.”
“아! 맞다. 하하. 근데 그놈한테 친구도 있었나?”
레게 머리 흑인이 어깨를 으쓱하자, 윌리를 위협하던 흑인이 씨익 웃었다.
“그럼 여기 룰을 잘 알고 있겠구먼.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뉴원 애비뉴에 오면 이곳 룰을 따라야겠지.”
“여기 룰이 뭔가요……?”
윌리가 한껏 불안한 표정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건 저렴한 통행료. 보니까 좀 사나 본데? 옷도 신발도 명품이고.”
“아……. 이거 짝퉁입니다. 그래도 원한다면 드릴게요.”
윌리가 순순히 가진 것을 내놓겠다고 하자, 두목 갱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바로 배운 사람들의 행동이지. 똑똑하네. 우리 말을 잘 알아듣고. 그래도 더 중요한 걸 얘기 안 했어.”
“……뭔데요?”
“돈.”
“아……. 혹시 마약이나 그런 거 하시는 건 아니시죠? 제가 드릴 순 있는데, 그런 쪽으로 쓰이면…….”
윌리를 보고 실실 웃고 있던 갱들이 그의 폭탄 같은 발언에 빈정이 상했는지 모두 얼굴을 찡그리며 윌리를 쳐다봤다.
“이 자식이, 오냐 오냐 해줬더니.”
갱들 중 가장 키가 작고 왜소한 남자가 윌리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두 배나 덩치가 큰 윌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남자가 안간힘을 써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윌리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뭐야, 이 꼬맹이는?’
윌리는 그 왜소한 남자를 내려다보고 피식 웃었다.
‘이놈은 내가 이기겠는걸.’
왜소한 남자는 자신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지 계속 윌리의 멱살을 흔들어댔지만 윌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윌리가 몸을 살짝 흔들자, 그의 덩치에 밀린 왜소한 남자는 저 멀리 나가떨어져 버렸다.
“으악!”
왜소한 남자가 대략 1미터 거리에 대자로 뻗어 있자, 윌리가 당황해서 변명을 쏟아 냈다.
“저는 안 쳤어요. 저분이 혼자서 나가떨어진 거라고요.”
동료가 공격받았다고 생각한 두목 갱은 근육에 힘을 잔뜩 주고 소리쳤다.
“너 이 자식! 감히 우리 조직을 건들어!”
두목 갱이 윌리를 노려보던 동료 갱들에게 소리쳤다.
“이 자식 오늘 완전히 뭉개버리자. 이곳이 어떤지 보여주는 거야!”
“안돼! 살려주세요!!”
눈을 질끈 감은 윌리가 목청껏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