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어두운 집
구부정한 자세로 타이론이 뉴원 애비뉴를 걸어가고 있다.
그를 발견한 동네 건달이 타이론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어이, 타이론. 우리 인사 좀 하고 살자. 응?”
타이론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건달을 피해 가려고 했다. 그러자 건달이 타이론의 팔을 낚아채고 말했다.
“어이, 얘기 좀 해. 내가 다 널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건달이 비열하게 웃으며 신문지 하나를 타이론에게 쓱 내밀었다.
“우리 위대하신 예술가에 대해 뭔가가 적혀 있더라고. 솔직히 어려운 말로 도배해 놔서 무슨 말인지 대부분 모르는데, 한 가지는 알겠더라고.”
건달이 타이론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말을 이었다.
“네 작품이 형편없다고 말이야. 이걸 어쩌나? 내가 다 슬프다니까, 흐흐흐.”
뜻밖의 말을 들은 타이론은 얼른 신문을 낚아채 펴보았다.
“!!”
자신이 오한결을 위해 그린 뉴욕 지하철의 낙서는 그저 어린 아이의 장난에 불과하고 예술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타이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자, 건달이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낄낄댔다.
“큭큭큭. 어쩌냐. 뉴원 애비뉴 출신 예술가로 어깨에 힘 좀 들어갔었는데 이제는 쪽팔려서 밖에도 못 돌아다니겠네.”
저 멀리 갱들을 발견한 건달이 타이론의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다.
“난 간다. 너도 빨리 가서 가짜 예술 놀이를 해야지? 큭큭큭.”
뉴욕 타임지를 한 손에 들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타이론이 집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곳. 어둡고 습한 집을 보자, 타이론은 자신이 정말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나 따위가 뭐라고. 이게 현실인데.’
오한결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 누구도 타이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리틀 바스키아’라고 부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낙서를 하는 그를 조롱하는 별명에 불과했다.
오한결의 소개로 뉴욕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윌리도 만났고 현재는 문화재단에 개인 작업실도 갖게 됐다.
‘그동안 너무 꿈 같은 일만 일어났어.’
짧은 순간이었지만 타이론은 자신의 낙서가 진짜 예술이라고 믿었다.
그림을 배운 적은 없지만 윌리의 말대로 자유롭게 느낌을 표현하면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개인전도 준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뉴욕 타임즈가 자신을 비판하고 있다.
‘내가 예술가가 아니래. 다른 곳도 아닌 뉴욕 타임즈에서!’
타이론은 언론과 미디어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뉴욕 타임즈는 세계적인 신문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 곳에서 자신의 작품을 비판한다는 건 진짜로 자신이 예술가가 아니라는 확고한 증거임이 틀림없다.
윌리는 어두운 거실 구석에 기대여 쪼그려 앉고 생각에 잠겼다.
‘행복도 잠시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착각은 이제 그만하자.’
이미 해가 떨어져 어두워졌지만 타이론은 집 안 불을 켤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두운 집 안에서 타이론은 무릎을 안은 채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 * *
윌리가 풀이 죽은 얼굴로 재즈클럽에 나타나, 오한결이 앉은 테이블에 앉았다.
“타이론이 며칠째 소식이 없어요. 문화재단에 전화해 보니까, 작업실에도 안 오고 있고요. 아마도 뉴욕 타임즈 평론을 봤나 봐요.”
이미 강철 지부장에게 타이론이 두문불출한다는 소식을 들은 최하늘이 오한결에게도 그 이야기를 전한 상태였다. 오한결은 큰일이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만 했다. 그러고는 곧 윌리가 들이닥치겠다고 말하자마자 오 분도 안 되어서 정말로 윌리가 재즈클럽에 나타난 것이다.
최하늘이 윌리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정말로 타이론이 그 평론을 읽었다면 꽤 충격이겠는 걸요. 정말로 신랄하게 썼잖아요. 그건 기성 작가들도 소화하기 힘든 비평이었어요.”
“그러니까요! 내가 이럴 줄 알았어요!”
윌리가 대뜸 소리를 지르자, 최하늘이 슬쩍 겁을 먹고 몸을 뒤로 뺐다.
“왜 소리를 질러요! 깜짝 놀랐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흥분을 했네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오한결이 끼어들었다.
“전화도 안 받나요?”
“네. 어제부터 수십 통은 했을 거예요. 분명 충격을 먹은 게 틀림없어요.”
“음……. 그러면 윌리가 타이론의 집에 찾아가 보면 어떨까요?”
최하늘이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윌리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네? 왜요?”
최하늘이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윌리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거긴 뉴원 애비뉴잖아요. 저는 못 가요. 절대로!”
오한결과 최하늘은 윌리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도 그곳에서 험상궂은 갱들에게 귀중품을 뜯길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심 윌리도 타이론의 집에 자신이 방문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과 다르게 너무 겁이 나 뉴원 애비뉴 근처도 못 가는 자신이 싫게 느껴졌다.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윌리는 급하게 술을 마셔댔고 오한결과 최하늘은 옆에서 불안하게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술을 진탕 마신 윌리가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흔들거리다가 급기야 테이블에 엎어져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 윌리의 모습을 보던 최하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작가님, 이렇게 지켜보는 게 정말로 맞을까요? 작가님은 계속 지켜보자고만 하시지만, 타이론은 아직 10대에 불과해요. 그에게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다고요.”
“물론이죠. 그건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별로 없어요. 기다리는 수밖에.”
“네? 왜요? 윌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뉴원 애비뉴에 가요. 그래서 타이론에게 희망을 주자고요.”
오한결은 최하늘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모르겠어요?”
갑작스러운 고백 같은 말에 최하늘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뭘? 모른다는 거죠? 어머, 설마…….”
최하늘의 반응에 당황한 오한결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윌리는 본인의 역할을 하고 싶은 거예요. 타이론에게 따스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은데 뉴원 애비뉴 근처에 가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있는 겁니다. 윌리는 결코 우리가 대신해서 타이론의 집으로 가길 원치 않아요. 정말 원했다면 먼저 부탁했겠죠.”
“아……. 그러네요.”
은근히 안쓰러운 표정으로 윌리를 보던 최하늘이 물었다.
“정말로 윌리가 뉴원 애비뉴에 가 볼까요?”
“모르죠. 하지만 타이론이 더 오래 잠수를 타면 윌리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맞아요. 그러겠네요. 거기 갱들 무서운데. 아직도 있나……?”
“우리를 겁주던 그 갱은 그때 들으니까 교도소에 갔던데요. 그때 그 할머니 아들이라고. 하하.”
“아! 맞아요. 그럼 걱정 없겠네요. 윌리가 지레 겁먹은 듯. 호호.”
“아니에요. 제가 본 것만 해도 갱들이 20명은 넘던데요. 모두 숨어 있어서 그렇지.”
“와우. 큰일이네…….”
* * *
문화재단 뉴욕지부 1층 카페.
신수진 이사장이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강철 지부장이 할 말이 있는지 커피를 한 잔 들고 이사장 근처로 다가왔다.
“이사장님, 잠깐 시간 되십니까?”
“네, 괜찮아요.”
신수진 이사장 맞은편에 앉은 강철 지부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보고를 시작했다.
보고 내용은 타이론에 관한 거였다.
최근 뉴욕 타임즈에서 그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부터 며칠 동안 작업실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
집중해서 보고를 다 들은 신수진 이사장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그 비평이 타이론에게 상처가 되었나 보군요.”
“아마도 그런 듯합니다.”
“혹시 읽어 볼 수 있을까요? 평론 내용이 궁금하군요.”
강철 지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수진 이사장의 휴대폰으로 뉴욕 타임즈 평론 URL 주소를 보냈다.
휴대폰을 통해 평론을 진지하게 읽은 신수진 이사장이 말했다.
“평론에는 문제가 없어 보여요. 다소 과격한 표현이 보이지만 그것도 평론가의 재량이니까요. 10대 아이가 예술을 한다고 평론도 10대 아이의 눈높이에서 할 수 없지 않나요?”
잠시 고민 끝에 강철 지부장이 용기 내 물었다.
“그렇다면 뉴욕 타임즈 평론에 동의한다는 말씀입니까?”
“전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뉴욕 타임즈의 논지에 어느 정도 동의해요. 개인적으로 타이론 학생이 좀 더 자신의 재능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저도 아직 확신이 안 서거든요.”
“오한결 작가도 그 점을 우려했었습니다. 그래서 타이론 학생의 개인전을 저희에게 부탁했고요. 그 전에 이렇게 뉴욕 타임즈가 뒤통수를 때릴지 몰랐습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한결 작가 말대로 기다려 보세요. 개인전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면 그만입니다. 오히려 잘 못 대응하면 긁어 부스럼만 만들 수 있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강철 지부장에게 신수진 이사장이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타이론 학생이 힘내라고 선물을 주고 싶군요. 애초에 개인전은 조그마한 갤러리에서 하기로 했잖아요. 그걸 좀 키워보죠. 현재 가장 활발하게 거래를 하는 미술관이 어디인가요?”
강철 지부장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네? 미술관이요……? 휘트니 미술관과 MOU가 체결돼 있긴 합니다.”
“그럼 거기가 좋겠군요. 타이론이 작품을 완성하면 거기서 개인전을 열어 봅시다.”
“!!”
너무 파격적인 제안에 강철 지부장이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런 강철 지부장의 얼굴을 살피던 신수진 이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오한결 작가는 틀리는 법이 없거든요. 이번에도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요.”
“네,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지금 데이비드 오 교수 작품 관련해서 여러 얘기가 오가고 있거든요.”
신수진 이사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 작품이 거기에 있었나요?”
“아! 모르셨군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20대 후반에 뉴욕에서 만든 작품이 휘트니 미술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요. 휘트니 미술관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구성돼 있잖아요. 거기에 데이비드 오 교수가 왜 있는지 궁금하군요. 임시로 하는 건가요?”
강철 지부장이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데이비드 오 교수 작품은 휘트니 미술과 대표 작품으로 항시 특별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 작가로 소개돼 있고요…….”
놀란 신수진 이사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뭐라고요! 데이비드 오 교수는 뭐랍니까? 항의하지 않았나요?”
“그게…… 제가 휘트니 미술관 작품 때문에 데이비드 오 교수님과 몇 번 통화해 봤지만 특별히 다른 말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잘 기획해서 전시를 해달라는 말씀 뿐이었습니다.”
은근한 배신감에 신수진 이사장이 몸을 살짝 떨었다.
“미국 대표 작가라고? 칫! 강철 지부장님 제가 직접 휘트니 미술관으로 가보겠어요. 직접 보고 판단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