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신랄한 비평
리나가 기쁜 마음으로 재즈클럽의 문을 열자, 오한결이 저쪽 구석에서 일행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한결 작가님!”
좀처럼 보기 힘든 화사한 표정으로 리나가 오한결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리나 왔어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한 오한결이 꾸벅 인사를 하자, 리나가 친근한 모습으로 오한결 옆에 바짝 다가와 앉았다. 그러자 그 옆에 앉은 최하늘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로건에게 다 들었어요. 작가님이 괜찮은 음반 제작사를 소개를 시켜 주라고 하셨다면서요. 어쩜 그렇게 제 마음을 잘 아세요?”
“……아, 필요할 것 같아서요. 리나의 재능이 이제 제대로 쓰여야 하잖아요.”
“맞아요. 제가 좀 그쪽으로 트라우마가 있어서 엄청 걱정했거든요. 덕분에 엄청 좋은 곳하고 계약하기로 했어요. 이게 다 오한결 작가님 덕분이에요.”
“에이, 리나의 실력이 만든 결과죠.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빅스퀘어 빌딩 퍼포먼스도 그렇고 이번에 음반 제작사까지. 모두 오한결 작가님 덕분이에요. 모든 영광을 작가님께 드리고 싶어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최하늘은 살짝 느꼈던 질투를 그만 버리고 리나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해 줬다.
“리나는 자격이 있어요. 언제나 최고의 가수였잖아요.”
최하늘의 진심 어린 말에 리나가 화답했다.
“정말 고마워요. 두 분이 뉴욕에 와서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정말 기뻐하는 리나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최하늘이 물었다.
“이제 재즈클럽에서 리나의 노래는 듣기 힘들겠군요. 그 점은 좀 아쉬워요.”
“그러게요. 하지만 이제 음반이 나오면 미디어에서 쉽게 리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네요. 뭐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호호.”
오한결과 최하늘의 대화를 듣던 리나가 꽤 진지한 표정을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재즈클럽에서 계속 노래를 할 거예요.”
“네?!”
“엥?”
놀란 두 사람의 표정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리나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긴 제 고향 같은 곳이에요. 재즈클럽이 없었으면 지금의 제가 당연히 없었겠죠. 물론 더 큰 무대로 가야겠지만, 진심으로 노래만을 위한 공간 하나쯤은 남겨두고 싶어요.”
최하늘이 감동하며 대답했다.
“이곳은 이제 뉴욕의 명소가 되겠군요.”
“부끄럽네요. 호호. 그럼 제가 한 곡 불러도 될까요?”
리나가 주섬주섬 일어서며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오한결이 말하자, 최하늘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해야죠. 오늘은 매우 기쁜 날이니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으로 할게요. 예전에 정말 힘들었을 때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며 썼던 노래에요. 제가 제일 아끼는 곡이죠.”
리나가 천천히 무대에 오르자, 대화를 나누던 손님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리나를 쳐다봤다. 수수한 리나의 모습을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제 스타가 돼서 그런 걸까,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기쁨에 가득한 리나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웠다.
그녀를 바라보던 모든 사람은 그 순간만큼은 노래가 주는 기쁨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지경이었다.
때마침 조용히 재즈클럽의 문이 열리더니 어두운 안색의 윌리가 조용히 오한결 곁에 다가와 철퍼덕 의자에 앉았다.
거구의 윌리를 감당하지 못한 의자 다리가 끼이익 바닥을 긁고 지나갔다.
평소에도 퉁명스럽고 잘 삐치는 성격이지만 오늘따라 무척 예민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최하늘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윌리?”
입을 삐죽 내민 윌리가 빨리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말도 마세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윌리가 가방을 뒤지더니 신문지를 꺼내 내밀며 말을 이었다.
“뉴욕 타임즈예요. 거기 예술 섹션에 뭐가 실렸는지 보시겠어요? 아마 작가님도 불같이 화를 내실 게 뻔합니다.”
최하늘은 설마 오한결의 대한 비판이 다시 시작됐나 싶어 얼른 신문지를 가로챈 뒤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는 예술 섹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어! 이게 뭐지?”
최하늘의 표정에 불안감을 느낀 오한결이 고개를 빼 들고 신문지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오한결이 아닌 타이론 작품에 대한 비평이 써 있었다.
꽤 긴 작품평이라 오한결과 최하늘이 말없이 꼼꼼하게 비평문을 읽어 내려갔다.
잠시 뒤, 최하늘이 한숨을 쉬며 먼저 입을 열었다.
“타이론에 대해 혹독한 평가를 했네요.”
윌리가 흥분하며 대답했다.
“저는 동의할 수 없어요. 타이론 작품을 인정할 수 없다는 거 아닙니까? 거기 보면 작품 자체는 어린아이 낙서에 불과한 것이고 그걸 예술로 인정할 정도로 현대 예술의 문턱은 낮지 않다고 적혀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에 보면, 현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준 이하의 작품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돼 있어요. 작가님! 이게 말이 되나요?”
은근히 타이론의 작품에 공감하기 힘들었던 최하늘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윌리가 같이 맞장구를 쳐주길 바라는 얼굴로 쳐다보자, 최하늘은 어쩔 수 없이 한 마디를 보탤 수밖에 없었다.
“제가 현대 예술 작품을 많이 봤거든요. 솔직히 타이론의 작품이 좀 난해하긴 하지만 오한결 작가님이 인정한 것이기도 하고…….”
최하늘의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윌리가 그녀를 노려보자, 그 따가운 시선에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윌리의 생각은 어때요?”
대뜸 오한결이 그렇게 묻자 윌리가 당황해 버벅거렸다.
“네, 네?”
“타이론의 작품의 예술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그야, 아직은 미숙하지만 엄연히 예술 작품이죠.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거잖아요.”
오한결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윌리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오한결이 타이론의 재능을 알아봤을 때 문득 떠오른 건 윌리였다. 누군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왜 더 예술적 성취를 이룬 작가나 평론가를 찾아가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작가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법이다.
윌리는 자신의 실력에 비해 저평가된 예술가이다. 하지만 분명 그 한계가 명확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 윌리가 자신의 도움 없이는 성장할 수 없는 천재 예술가를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오한결의 예상은 적중했다.
오늘 보니 윌리는 타이론의 재능에 몹시 빠져들었고 그의 예술적 성취를 자신의 것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기다리세요. 윌리.”
하지만 오한결이 해줄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멍한 표정을 짓던 윌리에게 오한결이 말을 이었다.
“예술가는 수많은 비평에 시달릴 수밖에 없어요. 설령 그게 작가의 예술성을 부정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죠.”
“……하지만.”
윌리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자, 오한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제가 하나 약속드립니다. 타이론이 개인전 준비를 마치면 그가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 드릴게요. 타이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건 타이론 자신밖에 없어요.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세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리나는 여러 곡의 노래를 끝내고 다시 오한결 곁으로 돌아왔다. 잔뜩 뾰루뚱한 표정의 윌리를 보며 리나가 물었다.
“윌리? 무슨 일 있어요?”
윌리는 리나의 질문에 대답 대신 오한결에게 말했다.
“기다릴게요. 하지만 저도 제 역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한결 작가님이 타이론에게 개인전 기회를 줬듯이 저도 할 일이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윌리가 거구의 몸을 간신히 일으킨 뒤 재즈클럽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리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최하늘이 빠르고 정확하게 타이론의 상황을 잘 요약해서 전하자, 리나가 진지한 표정을 말했다.
“아, 그랬군요. 제가 타이론의 마음을 잘 알 것 같아요. 그동안 저도 많은 비평에 시달렸거든요. 세상에 제 노래를 칭찬해주는 사람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죠. 오한결 작가님의 말씀이 맞아요.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 그리고 반드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기회가 올 거고요. 저처럼요.”
최하늘은 리나의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오한결의 지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윌리는 타이론이 리나처럼 엄청난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텐데…….’
* * *
재즈클럽에서 돌아온 윌리는 쉽게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물론 오한결 작가의 말은 정답이었다.
좀 더 기다리면 타이론이 여러 작품을 완성할 테고 그걸로 개인전을 열면 되니까. 그땐 세상이 타이론의 실력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대로 기다리는 게 맞는 걸까?’
어쩌면 이 모든 건 오한결이 타이론을 위해 만든 무대일지도 몰랐다. 타이론에게 최고의 작업실을 제공하고 그의 작품이 개인전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도록 만든 아주 잘 짜인 무대였다.
하지만 윌리는 이번만큼은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었다.
지금까지 윌리는 예술을 하면서 항상 조연 역할만 했다.
주변 선후배들이 찬란한 꽃을 피울 때 그 곁에서 박수만 쳐왔다.
윌리가 발표한 작품의 연이은 흥행 실패는 그게 자신의 한계라고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윌리도 가끔은 주인공이 되고 싶은 엄청난 충동에 시달렸다. 항상 자신감 넘치던 옛 시절이 너무나 그리웠다.
윌리가 타이론을 받아들인 이유도 자신의 수동적인 삶에서 벗고 나고픈 욕심 때문이었다.
원석에 불과한 재능있는 타이론을 최고의 예술가로 만드는 일.
비록 예술가로서는 미흡했지만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교육 쪽으로는 노력하면 최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삶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런 의미로 타이론 같은 엄청난 원석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다 잘 되더라도, 타이론을 위해서 윌리는 뭔가를 하고 싶었다.
‘타이론은 나의 첫 제자 아닌가?’
서재로 달려간 타이론은 예술 비평과 관련된 논문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학부 때 공부 자료와 석, 박사 과정 때 읽었던 모든 자료를 긁어모았고, 최신 예술 잡지에 실린 자료도 찾아보았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예술 평론과 관련된 모든 책들을 주문했다.
심지어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된 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상당한 자료를 획득한 윌리는 스탠드 불빛 아래서 은근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많은 시간이 걸리겠는걸. 하지만 정말 재밌겠어.’
사실 윌리는 뛰어난 창의성은 없어도 뛰어난 학습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까지 펜이 아닌 붓을 들고 싶다는 욕심에 그런 자신의 재능을 썩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윌리는 타이론을 비판한 뉴욕 타임즈를 이론적으로 부셔버릴 생각에 이르자, 엄청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윌리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숨겨진 재능이 발견될 것이라는 사실을.
‘타이론의 예술성은 내가 증명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