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영상통화
지하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낙서를 보면서 신수진 이사장을 고개를 갸웃했다.
“꽤 난해하군.”
이미 언론을 통해서 ‘인종차별’을 주체로 그린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유로운 형식으로 작가가 느낌만 표현한 것 같아 해석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게 현대 미술의 특징이지 않은가?
“뉴욕에서 볼 법한 작품이야.”
그녀가 작품에서 느껴지는 어둡고 우울한 감정 사이로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그 옆으로 한 중년의 동양 남성이 서성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작품에 몰입한 신수진 이사장은 그의 존재 자체를 신경쓰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 집중력이 흐려지자 그 남자의 모습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 남자도 신수진 이사장이 신경 쓰였는지 은근슬쩍 곁눈질로 쳐다봤다.
그때 두 사람이 눈이 마주쳤다.
“어?”
“어라?”
박영운 실장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문화재단 신수진 이사장님 아니십니까?”
신수진 이사장도 최대한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박 실장님. 오랜만이네요. 뉴욕에서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신수진 이사장과 인사를 나눈 박영운 실장은 자연스레 옛 생각에 빠져들었다.
박영운 실장이 마지막으로 신수진 이사장을 봤을 때 그녀는 초등학생이었다. 신태진 회장에게 총명하고 명석한 딸이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유명했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해서 예술계의 중심에 서다니, 놀라우면서도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흐뭇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박영운 실장에게 신수진 이사장이 물었다.
“아버지에게 얘기 들었어요. 아직 오한결 작가를 신뢰하지 않으시다고요.”
그러면서 슬쩍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확인하러 오신 거군요. 오한결 작가의 퍼포먼스를.”
신수진 이사장의 직설적인 화법이 마음에 든 박영운 실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사실 좀 민망하군요. 오한결 작가라면 신수진 이사장님이 발굴하고 지원하는 작가잖아요. 하지만 오해하지 않으면 해요. 오한결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그의 재능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네, 이해합니다. 엊그제 타임스퀘어 퍼포먼스를 봤겠군요.”
“물론이죠. 아주 훌륭했습니다. 제가 부끄러워질 만큼.”
신수진 이사장이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 낙서를 보러 오셨고요. 오한결 작가와 관련된 거니까.”
“그렇죠. 안타깝게도 오한결 작가가 뉴욕에서 인종차별을 심하게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그를 위로하기 위해 뉴욕의 작가가 작품을 남겼다고 들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어쨌든, 덕분에 이렇게 만나뵙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동시에 낙서로 가득 찬 지하철 벽을 바라봤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은 그렇게 말이 없이 한참을 작품만 쳐다볼 뿐이었다.
무겁고 어색한 침묵을 깬 건 신수진 이사장이었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드십니까?”
“글쎄요, 예술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호호호. 어쨌든 오한결 작가가 인정한 작품이긴 합니다.”
“아하! 그렇다면 예술성이 있는 거겠군요.”
박영운 실장이 그렇게 말하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확신 없는 웃음으로 애써 상황을 모면하려고 애썼다.
* * *
호텔방에서 오한결이 주섬주섬 단정한 옷을 꺼내 걸쳐보고 있다.
‘음, 이 정도면 되겠네.’
깔끔하고 정돈된 자신의 모습에 심취한 오한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방에 붙어 있는 테라스로 나가 휴대폰을 켜고 영상통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자 어머니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
[한결아! 잘 지내고 있니?]
“네, 엄마! 매일매일 멋진 뉴욕 생활을 즐기고 있어요. 하하.”
[그래,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 음식은 잘 먹고, 잠자리는 안 불편하니?]
어머니의 폭풍 질문을 뚫고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이 무슨 아이야?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는 동생의 얼굴이 어머니 옆에서 나타났다.
[나야! 잘 지내지? 한국은 내가 책임지고 있으니까 걱정 말아.]
동생의 허풍에 오한결이 맞장구를 쳐줬다.
“그래, 고맙다. 나 대신 한국을 잘 부탁한다.”
갑자기 화면에 아버지 얼굴이 잡혔다. 아마도 아버지가 휴대폰을 잡아끌어 자신의 얼굴을 비친 듯 했다.
[한결아! 아버지다. 건강하게 잘 지내지?]
“네, 아버지. 저는 항상 건강하죠.”
[그럼 됐다. 그나저나 언제 한국에 오는 거야?]
“아…… 그게…….”
사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이번 주 안으로 한국에 들어가야 하지만, 방금 전에 데이비드 오 교수가 좀 더 뉴욕에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최하늘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좀 더 머물렀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화재단 뉴욕지부에서 신수진 이사장이 회의를 열었는데, 오한결이 아직 한국에 가는 것보다 뉴욕에서 더 멋진 작품을 선보이고 한국 예술가의 인지도를 높였으면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솔직히 이제 슬슬 뉴욕 생활에 재미가 들린 오한결도 굳이 급하게 한국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보고 싶지만 어차피 며칠 더 머무는 것 뿐이니까.
“뉴욕에 좀 더 있게 됐어요.”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의 반응은 오한결의 생각과 달랐다.
[너무 잘 됐구나! 그런 기회는 흔치 않잖니. 마음껏 즐기고 오렴.]
[형, 너무 부러워. 나도 가면 안 될까?]
동생의 간절한 표정을 보고 오한결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번 뉴욕 일정은 개인 여행이 아닌 문화재단 공식 출장이기에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 돼. 나중에 내가 데리고 올게. 약속할 수 있어.”
[아……. 어쩔 수 없군.]
오한결은 그렇게 부모님과 그간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말하며 즐거운 수다를 떨었다. 부모님도 오한결이 들려주는 모든 에피소드를 하나도 빠짐없이 집중하며 들었고 멋진 예술을 하는 아들을 진정으로 존경하는 눈빛도 보여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꽃을 피우던 그때 이제 화상통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잠시 화면에서 사라졌던 동생이 낯익은 한 청년을 데리고 왔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뉴욕에서 멋진 활약상 잘 보고 있어요.]
노진홍이 히죽 웃으며 오한결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국립예술교육원에서 발레를 전공하는 노진홍은 오한결과 깊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는데 최근 한라산 등반까지 동생과 함께 했었다.
‘근데? 집에도 놀러오는 사이였나?’
오한결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듯이 동생이 눈치채고 대답했다.
[진홍이랑 작품 준비하고 있어. 이번에도 발레 뮤지컬 쪽으로 갈 것 같아. 뭐 아니면 전통 발레를 해볼까? 하하.]
“아, 진홍이가 콩쿠르 준비로 바쁘다고 들었는데, 괜찮겠어?”
[사실 콩쿠르 때문에 하는 거예요. 다시금 친구들의 순수한 마음을 느껴보고 싶거든요. 테크닉만 갈고 닦을 게 아니라, 춤에 대한 열정을 좀 더 살려보고 싶어서요.]
어쨌든 노진홍과 동생이 친하게 지내며 작품 활동까지 같이 하는 모습을 보니 오한결로서는 기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좋아. 뭐든 하면 되지. 그래,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면 그때 더 얘기해줘.”
오한결이 작별 인사를 하자, 가족들과 노진홍이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전화를 끊은 오한결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테라스에 기대어 뉴욕 도심 풍경을 바라봤다.
앞으로 더 멋진 일이 생길 것 같아 은근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노을의 옥탑 작업실에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다.
뭉치는 노을의 무릎에 앉아 골골골 대며 행복한 꿈속 여행을 하는 중이다.
노을이 뭉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해산군청 사무관이 한 시간 뒤에 여기로 온대.”
최무열이 커피를 홀짝 마시며 대답했다.
“여긴 찾아오기도 힘든데, 좀 더 편한 곳에서 보면 좋지 않아?”
“그러니까. 근데 꼭 작업실 환경을 보고 싶다는 거야.”
서정익 작가는 밤을 새웠는지 몹시 초췌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저는 여기도 마음에 들지만, 명일문화재단 아뜰리에도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아니면 제 작업실도 좋았을 텐데.”
유럽식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문화재단 아뜰리에 이미지를 떠올린 노을이 무척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 내가 그걸 생각 못 했네요. 그럼 더 멋지고 있어 보였을 텐데요.”
서정익 작가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노을이 직접 구해온 재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노을 씨 작업실은 진짜 작가의 작업실이에요. 꾸밈없고 솔직한 예술가의 공간이죠. 제가 생각하기엔 해산군청 사무관도 여길 엄청 좋아할 것 같은데요?”
서정익의 말에 용기를 얻은 노을이 애써 웃음을 보였다.
“고마워요. 헤헤.”
그사이 뭉치는 몸을 뒤척이며 나름 제일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은근히 긴장감으로 가득 찬 한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누군가가 옥탑 작업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노크 소리에 놀란 뭉치가 눈을 번쩍 뜨더니 단잠을 깬 것에 기분 나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이야옹!
노을이 문을 열어주자, 정장을 입은 말끔한 중년 신사가 하얀 건치를 드러내며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노을 작가님이신가요?”
“네, 이태종 사무관님?”
“아이고, 반갑습니다. 통화만 하다가 이렇게 직접 뵈니 너무 반갑군요.”
이태종 사무관이 능글능글하고 능청스러운 말투로 말을 건네자, 딱딱한 공무원을 생각했던 노을의 마음이 스르르 불리는 것 같았다.
“들어오세요. 조금 누추하지만.”
이태종 사무관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노을의 작업실을 구경했다.
무엇보다 벽을 따라 구석에 쌓여 있는 폐타이어와 철근 덩어리 등 거칠고 야생적인 작업 자료에 흥미를 느꼈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하시나요?”
“제가 발품을 팔아서 구해와요.”
녹이 슬어 붉은색이 감도는 쇳덩어리를 손끝으로 만져보며 이태종 사무관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멋지군요.”
이태종 사무관이 꼼꼼하게 노을의 작업실 구경을 마치자,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가 인사를 건넸다.
“노을 작가와 함께 일하는 작가들이에요. 저는 최무열, 이쪽은 서정익 작가님!”
“아! 그렇군요. 노을 작가님께서 많은 말씀해주셨습니다. 팀으로 움직인다고요? 한 분은 한국 최고의 명문 미대 학생이고, 다른 한 분은 꽤 이름이 알려진 작가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서정익 작가와 인사를 나눈 이태종 사무관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민망하게도 제가 예술을 잘 몰라서요. 저명하신 작가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영광입니다. 작가님.”
“네…….”
사회성이 좋지 못한 서정익 작가는 상대방이 느끼기에도 차가운 음성으로 대충 대답했다.
살짝 당황한 이태종 사무관이 다시금 건치를 활짝 드러내며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다.
“제가 많이 꼼꼼한 성격이라서요. 해산군청과 함께할 작가님의 작업실부터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어디서 찾아보니까 작가의 작업실은 그 작가의 정체성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꼭 와보고 싶었습니다.”
어색한 미소를 짓는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를 번갈아 보던 이태종 사무관이 좀 전과 다른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좀 우려스럽군요. 저희가 원하는 예술 방향과 맞을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노을이 대답했다.
“솔직히 말이 계속 바뀌셔서 좀 그래요. 처음에 제게 전화주셨을 때는 작가의 예술적 재량에 맡기겠다고 하시더니, 이제는 관광지 조형물이라 하시니…….”
이태종 사무관이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제가 홍보팀을 맡은 게 이번이 처음이라 혼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튼 지금 해산군청은 야옹이 마을을 유명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답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 확인하고 싶었어요. 저희가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신지.”
노을이 침묵하자, 이태종 사무관이 힘들게 말을 이었다.
“아쉽게도 작업실로만 봤을 땐,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희는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를 원하거든요.”
고양이 캐릭터라는 말에 모두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푹 쉬기 시작했다.
노을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뭉치가 구석에서 갑자기 나타나 이태종 사무관을 향해 꼬리를 치켜들고 위협했다.
이야옹!
평소 고양이를 무서워하던 이태종 사무관이 기겁을 하며 뒤로 자빠졌다.
“엄마야!”
엉덩방아를 찐 이태종 사무관을 서정익 작가가 일으켜 세우며 그의 귀에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해해요. 저도 고양이가 무섭거든요. 맹수는 언제 사람을 공격할지 알 수 없죠.”
뭉치 때문에 콘셉트로 잡은 점잖은 이미지가 무너지자 이태종 사무관이 틱틱대며 말했다.
“아무튼 작가님들이 해산군청의 요구를 받아들이실지 결정해주세요.”
단호한 말을 남기고 이태종 사무관이 작업실로 나서자, 최무열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하지 말자, 누나! 우리가 무슨 캐릭터를 만들어?”
서정익 작가도 거들었다.
“맞아요. 저 사람은 노을 씨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모르는 거예요. 노을 씨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과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노을의 생각은 확고했다.
꼭 이번 프로젝트를 맡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야옹이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과 할머니의 미소가 노을을 그곳으로 이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게 방법이 있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훗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