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스타의 탄생
빅스퀘어 빌딩의 성공적인 퍼포먼스를 축하하기 위해 그날 저녁 재즈클럽에서는 유례없는 파티가 열렸다.
이미 재즈클럽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찼고 손님들의 요청으로 야외 테이블까지 설치해서 누구나 기쁜 이 날을 축하해줄 수 있게 마련했다.
이 모든 비용은 행사 주최자인 로건이 감당했다.
재즈클럽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흥분한 로건이 말했다.
“오늘은 아주 기쁜 날입니다. 뉴욕 예술 역사상 기록에 남는 일이기도 하고요. 제가 빅스퀘어 빌딩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오늘 같은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로건이 오한결과 리나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손을 뻗고 말했다.
“저 두 주인공께서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천재 예술가 오한결, 천재 싱어송라이터 리나! 오! 신이시여, 부디 저 두 분에게 당신의 축복을 내려 주소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들리자 오한결과 리나가 일어나서 재즈클럽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로건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갑자기 스탠딩 코미디를 이어가는 바람에 사람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관심이 식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오한결과 리나의 멋진 퍼포먼스로 흥분한 마음을 달래고자 재즈클럽을 찾아온 것이지 로건의 원맨쇼를 보려고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썩거리던 재즈클럽도 잠잠해지자 자연스럽게 손님들은 맥주와 안주를 먹으며 테이블에서 각자의 수다에 빠져들었다.
오한결과 최하늘, 리나는 조용한 자리에 앉아 산다라에 대한 얘기를 기어갔다.
“여기 사진 보세요. 산다라가 어머니를 안고 있잖아요.”
리나가 휴대폰을 내밀자, 산다라와 어머니의 다정한 사진이 보였다.
“30년 만에 만남인데, 어쩜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요.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가 봐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최하늘이 그렇게 말하자, 오한결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요. 아니면 산다라의 성격일 수도 있죠. 워낙 붙임성이 좋잖아요.”
“맞아요. 일단 마음을 정하면 직진하는 스타일이니까요. 호호.”
리나가 오한결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대답하자, 오한결도 크게 웃었다. 두 사람이 너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같아 최하늘도 지지 않으려고 무조건 크게 웃었다.
“오호호호. 그렇군요. 오호호호.”
오한결과 리나가 살짝 당황하자 민망해진 최하늘이 어떻게든 말을 이었다.
“한국에 가면 산다라를 볼 수 있겠군요. 벌써 보고 싶어지는데요.”
리나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럽네요. 저도 산다라를 보고 싶은데 두 분은 좋겠어요.”
“리나도 한국에 오세요.”
최하늘은 순수한 마음으로 제안했지만 리나는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사실 해외 여행은 꿈도 못 꾸죠. 당장 방세도 힘든걸요.”
“하하하.”
갑자기 오한결이 웃자, 리나가 은근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심각해요. 작가님.”
“리나는 앞으로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예요. 아마 평생 해외에 거주하며 전 세계 수많은 팬들과 만나야 할 겁니다. 스타의 삶이란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하던 오한결이 주변을 둘러봤다. 리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
그것은 뛰어난 예술가를 바라보는 존경의 눈빛이자, 그들의 우상으로 자리 잡은 리나를 스타로 바라보는 팬심이었다.
오직 리나만이 그들의 시선의 진정한 의미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이 경험한 실패가 무척 그녀의 삶을 옥죄고 있는 걸까?
재즈클럽 밖에서도 리나의 얼굴을 보려는 팬들이 몰려들어 소동이 벌어지자, 오한결과 최하늘이 한껏 미소를 지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최하늘이 더 흥분한 상태로 말했다.
“리나가 팬서비스를 해줘야 할 것 같은데요.”
리나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있자, 최하늘이 답답한 듯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리나 주위를 둘러보세요. 여기저기서 리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겠다고 팬들이 몰려들었잖아요. 리나가 손 한 번 흔들어 주세요.”
당황한 리나는 최하늘에 말에 슬그머니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끼약, 하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한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래 한 곡 불러주세요. 모두 그것을 원하는 것 같은데요.”
리나는 주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몹시 낯설면서도 평생을 원했던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사람들이 알아보고 그 노래로 팬들과 소통하는 것만큼 가수로서 영광스러운 게 또 있을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리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는 긴장된 마음으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리나에요.”
끼약~! 몇몇 극성팬들이 큰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웃으며 그들도 크게 박수를 쳤다.
리나는 그들의 그런 반응이 싫지 않은지 훨씬 긴장이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빅스퀘어 빌딩에서 불렀던 노래를 한 곡 불러드릴게요.”
리나가 말을 마치자, 소란스럽던 주위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모두 상당히 집중한 표정으로 리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리나는 오한결의 그림을 떠올렸다.
푸른 하늘에 하얀 뭉개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는 평화로운 어느 날.
한 여인이 아들과 함께 산책에 나선다.
향긋한 꽃향기를 품은 봄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자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바람에 펄럭이는 옷자락의 떨림을 느끼며 걷는 여인의 행복한 표정을 생각한다.
리나는 그렇게 오한결의 그림 속 인물이 되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뭉실뭉실한 구름 따라∼♬”
오한결의 그림을 봤던 관객들은 리나의 천상의 목소리에 이끌려 다시금 빅스퀘어 빌딩 앞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거대한 스크린에서 보이는 평화롭고 행복감을 안겨주는 그림.
오한결 역시 리나의 목소리에 이끌려 과거의 한 시점의 추억으로 되돌아갔다.
오한결은 그렇게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오직 최하늘만이 그 노래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오한결이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던 순수하고 행복한 표정에 은근히 질투가 나기 시작했다.
‘아……. 알고 싶지 않아.’
* * *
새벽까지 재즈클럽에서 놀고 호텔에 도착한 오한결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아, 씻고 자야 하는데…….”
하지만 피곤 때문인지 몸이 무거워 오한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띠링. 띠링.
슬슬 잠이 들려는데 휴대폰 문자 알람 소리가 오한결을 깨웠다.
슬쩍 몸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본 오한결은 애써 힘을 내 몸을 일으켰다.
“친구들 연락이라면 받아야지.”
「노을: 오한결 작가님 축하드려요! 작품 완전 대박.」
「최무열: 누나! 뉴욕은 새벽이란 말이야. 이건 좀.」
「서정익: 뉴욕은 잠들지 않는 도시라고 하죠. 새벽에도 에너지가 넘친다는.」
「최무열: 그게 아니라…… 오한결 작가님은 지금 잠들어 있겠죠.」
「노을: 그런가? 아이고, 내가 왜 문자를 보냈지. 너무 흥분했나. 호호.」
이미 단체 대화 문자 때문에 잠이 깬 오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문자를 보냈다.
「오한결: 괜찮아. 아직 안 자니까. 하하. 다들 잘 지내고 있지?]
「노을: 우와! 작가님이다! 무열아, 봤지? 아직 안 자고 계시잖아. 호호.]
「최무열: 알았어. 알았다고…….]
「서정익: 작가님 굉장한 퍼포먼스였어요. 우리도 새벽에 아트화랑이 모여서 다 같이 봤거든요.]
「오한결: 너무 고맙네. 시차 많이 나서 실시간으로 보기 힘들었을 텐데. 사실 나도 너희들이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든든한 팬들이 있어서 더욱 열심히 했던 것도 있고.]
「노을: 저희도 기쁜 소식 있어요. 우리도 정식으로 작품 제안을 받았어요. 해산 군청에서 작품 의뢰를 했거든요.]
「오한결: 정말로? 이야, 대단하다. 신인 작가에게 그런 기회는 흔치 않잖아.]
「노을: 맞아요. 호호. 그래서 더 걱정이에요.]
「오한결: 어떤 부분이?]
「노을: ‘야옹이 마을’에 맞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데, 사실 저희는 동물 보호와 관련된 작품을 제작하고 싶거든요.」
「최무열: 노을 누나가 요즘 동물 보호에 꽂혔거든요. 흐흐.」
「오한결: 그럼 주제를 그거로 정해서 하면 되잖아.」
「서정익: 문제가 생겼어요. 갑자기 해산 군청 사무관이 귀엽고 예쁜 캐릭터를 크게 만들어 달래요. 관광지에 어울리게요.」
「오한결: 아……. 당혹스럽겠네. 그래서 회의는 잘 안 된 건가?」
「노을: 전화만 주고받았고, 정식으로 만나서 회의는 아직 안 했어요.」
「오한결: 그럼 회의 때 진지하게 말해. 어떤 방향으로 하겠다고.」
「노을: 그렇게 했다가 우리한테 의뢰한 거 취소하면 어떡해요? 무서워요.」
「최무열: 안 하면 되지!」
「노을: 싫어! 꼭 하고 싶단 말이야!」
「서정익: 싸우지 마세요.」
오한결은 세 사람의 대화를 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오한결: 그렇다고 억지로 싫은 걸 할 수는 없잖아. 우선 솔직하게 얘기해 봐.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는 거지.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어. 그들도 노을의 실력을 믿고 의뢰한 거니까. 함부로 취소 얘기를 꺼내진 못할 거야.」
「노을: 그럴까요?」
「최무열: 음. 너무 좋은 말이네. 나중에 나도 써먹어야지. 서정익 작가님도 한 마디 해주세요. 나름 경력이 많으시잖아요.」
「서정익: 아, 그게……. 사실 누가 제 작품 방향을 정해준 적이 없어서 잘 몰라요.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다들 좋아해 줬으니까.」
「최무열: 아, 부럽다…….」
* * *
번잡하고 어수선한 뉴욕 거리가 신수진 이사장의 등장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똑딱, 똑딱.
분명하고 완고한 구둣발 소리를 내며 신수진 이사장이 걸어가자, 주변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자리를 비켜줬다.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렇게 뉴욕 거리를 본인만의 런웨이로 바꾼 신수진 이사장이 뉴욕 지하철 입구 앞에서 멈춰 섰다.
“흠! 여기에 타이론 학생의 작품이 있다고?”
낡고 지저분한 뉴욕 지하철 입구에 신수진 이사장이 서성이자, 지하철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이 쉽게 비켜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답답한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서성거렸다.
그들의 기척을 느낀 신수진 이사장이 훅 뒤를 돌아보자, 행인들이 화들짝 놀랐다.
“어머! 제가 길을 막았군요. 먼저 들어가세요.”
신수진 이사장이 몹시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고 비켜서자, 행인들은 그녀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지하철로 내려갔다.
잠시 뒤 신수진 이사장도 어둡고 눅눅한 지하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뉴욕의 지하철은 한국과 전혀 달랐다.
오래된 시설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가 지하철 곳곳에 서려 있었다.
신수진 이사장은 그런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특히 여기저기 그래피티가 보였는데 자유롭게 예술적 표현을 하는 그들의 세계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유롭네. 좋아.”
퇴근 시간과 겹쳐서 그런지 지하철을 이동하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자 신수진 이사장은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작품을 보고 나가야 할 텐데.’
그때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낙서가 신수진 이사장의 눈을 사로잡았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