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62화 (162/202)

제162화 익명의 후원자

CNN에서 오한결 퍼포먼스 방송이 끝나자, 어느덧 날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신태진 회장이 졸린 눈을 비비며 창밖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날을 꼴딱 세웠구먼.”

회장 옆에서 기지개를 켜던 이현미가 대답했다.

“젊었을 때는 이런 적이 많았죠.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으니까. 그리고 항상 새로운 걸 배우는 재미도 있었는데 말이죠.”

“허허허. 오한결 작가 덕분에 그때 그 기분을 다시금 느껴보는구먼.”

주변을 정리하던 이현미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하! 그러고 보니 CNN에서 오한결을 한국 작가라고 소개하던데요. 걱정 많았잖아요. CNN 칼럼에서 오한결을 뉴욕의 대표 작가라고 말한 것 때문에요.”

신태진 회장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 장면 봤지. 딱 자막에 한국 대표 작가 오한결 이렇게 써 있더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왜 갑자기 이런 변화가 생긴 거죠?”

신태진 회장은 최근 신수진 이사장이 급하게 뉴욕으로 떠났다는 보고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마도 수진이가 해결한 듯싶소. 지금 뉴욕에 있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현미 관장이 몹시 놀랐다.

“네? 수진이가요? 워낙 해외 출장이 잦아서 어딜 갔겠지 싶었는데. 지금 뉴욕에 있군요.”

“수진이라면 충분히 해결하고도 남지. 워낙 고집도 세고 능력도 있잖아.”

신태진 회장은 서서히 밝아져 오는 하늘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딸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어릴 적 에피소드를 아내에게 읊어대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데, 너무나 조용해 무심코 얼굴을 돌리자, 아내가 깊게 잠들어 있었다.

“이런 내가 너무 떠들었구먼. 뭐 덮을 거 없나.”

민망한 신태진 회장이 하품을 크게 하며 일어서자 바닥에 복실이가 신태진 회장을 쳐다보다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신태진 회장과 눈이 마주친 복실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댔다.

* * *

윌슨 앵커가 다니엘 피디와 함께 CNN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크리스 본부장이 해외 지사로 갑자기 발령이 난 거예요?”

윌슨 앵커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자, 다니엘 피디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좌천된 거지 뭐. 그렇게 까불더니.”

윌슨 앵커는 충격받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크리스 본부장이라면 이 바닥에서 숱한 어려움을 이겨낸 베테랑 중에 최고 아니었던가. 그랬던 그가 최근 오한결 작가와 관련해 뭔가를 꾸민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 건가?

‘오한결 작가 뒷배에 무시무시한 권력자라도 있는 건가?’

생각을 정리한 윌슨 앵커가 말했다.

“저는 크리스 본부장은 CNN 본사에서 영원할 줄 알았거든요. 솔직히 충격입니다.”

다니엘 피디가 더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그러니까, 오한결 작가는 건들면 안 돼. 크리스 본부장이 그걸 몰랐던 거지. 어쩐지 요새 너무 기고만장했어.”

“오한결 작가를 보호하는 세력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군요.”

“그 실체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충격적인 얘기는 듣긴 했어.”

“뭐죠?”

몇몇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 라운지로 몰려오자,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몸을 사렸다.

그리고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인적이 거의 없는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혹시 모르니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니엘 피디가 말했다.

“내가 얼핏 들었는데, CNN 스폰서 중에 엄청나게 큰손이 있나 봐. 지금까지 익명으로 후원하고 있어서 그 존재를 아무도 몰랐는데, 글쎄…….”

다니엘 피디가 말을 멈추고 다시금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엊그제 그 후원자가 사장님과 독대를 했나 봐!”

“네? 와우. 그 정도면 직접 영향력을 행세하겠다는 거겠네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윌슨 앵커가 긴장했는지 몸을 한껏 움츠리며 물었다.

“과연 뭐라고 했을까요? 후원금을 끊겠다고 했겠죠?”

“아마도 그게 제일 유력하지.”

“사장님 식겁했겠네요. 사실상 공익 프로그램은 후원자들의 돈으로 제작하니까요. 만약 후원금이 끊기면 프로그램 두세 개는 접어야 하고 내년까지 공익 프로그램 자체 제작이 힘들겠네요.”

“맞아. 그게 두려웠겠지. 그러니까, 사장이 부랴부랴 크리스 본부장을 좌천시킨 거야. 실질적으로 내쫓은 거지.”

윌슨 앵커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에, 믿을 수가 없어요. 근데 그게 누군데요? 혹시 정보 있어요?”

“아니.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니까. 하지만 하나 흥미로운 건 있어.”

“뭔데요?”

“엄청난 카리스마를 지닌 동양 여성이었대. 그리고 사장실 비서가 그러는데, 사장님도 그 여성한테 한 시간 동안 꼼짝 못하고 혼났다는 거야.”

“사장님이요? 와우, 믿을 수가 없네요. 그 무서우신 분이 어쩌다가.”

“그 말을 듣는데 불쌍하더라고.”

“정말요?”

“음……. 통쾌해 해야 하는 건가. 하하하.”

“하하하.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 * *

신수진 이사장이 명일문화재단 뉴욕 지부에 들어서자, 강철 지부장이 정중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이사장님.”

“잘 지내셨나요? 지부장님. 뉴욕 지부는 참으로 오랜만에 오네요.”

두 시간 전 신수진 이사장이 강철 지부장에게 갑작스레 전화를 했다. 현재 뉴욕에 와 있는데 시간이 남아 뉴욕 지부에 들리겠다는 내용이었다.

강철 지부장은 신수진 이사장의 방문이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 CNN과 크리스티가 오한결을 두고 여러 논쟁거리를 만들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최근까지 오한결 작가가 뉴욕 출신 작가로 편입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찾아보니 CNN에서 오한결 작가를 미국 작가라고 소개한 칼럼도 지금은 홈페이지에서 사라져있었다.

‘결국 신수진 이사장님이 움직인 거군. 근데 어떻게 하신 거지?’

모든 사정을 짐작했지만 강철 지부장은 신수진 이사장에게 따로 묻지 않았다.

그건 신수진 이사장의 역할이었고 충분히 성공적이었다면 그 자체로 묻어 두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신수진 이사장도 강철 지부장이 자신의 출장의 목적을 잘 이해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캐묻지 않아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신수진 이사장이 사무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강철 지부장님이 딱 중심에 서 있으니, 무척 무난하게 사무실이 돌아가는 것 같군요. 최근에 제가 알아야 할 이슈 같은 게 있나요?”

강철 지부장은 신수진 이사장의 등장에 뉴욕 지부 직원들이 과도하게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빨리 그녀를 사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사장님, 혹시 얘기 들으셨나요? 오한결 작가가 후원하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요?”

신수진 이사장이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래요? 첨 듣는군요.”

강철 지부장은 오한결과 타이론의 만남을 소개하고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상당한 관심을 보이던 신수진 이사장이 말했다.

“재밌군요. 그럼 뉴욕 지부에 타이론 학생의 작업실이 마련됐다고요?”

“네, 지금도 작업하고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보고 싶어요. 안내해 주세요.”

강철 지부장은 신수진 이사장을 모시고 타이론의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 문 앞에 도착한 강철 지부장은 혹시나 타이론의 작업에 방해 될까봐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페인트와 락커 냄새가 코를 찔렀고 그의 작업 판자는 어지럽게 바닥에 쌓여 있었다.

그동안 외출도 거의 안 하고 작업만 한듯한 흔적이 보였다.

강철 지부장의 갑작스런 방문에 타이론이 재빨리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그러면서 재빨리 그 옆에 서 있는 엄청난 카리스마의 여성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마치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타이론의 겁먹은 표정 따위 관심 없다는 듯 신수진 이사장은 짧게 인사를 하고 그의 작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린아이 같은 낙서에 불과했다.

나름 실험적인 방식을 썼는지 여러 개의 작품들이 모두 형식이 제각각이었다.

신수진 이사장은 그 중 해골 모양을 낙서처럼 그린 작품 앞에 섰다.

‘음, 낙서잖아…….’

도저히 어떤 해석으로 이 작품을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던 신수진 이사장은 타이론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작품 설명 좀 해주세요.”

한 눈에 봐도 강철 지부장보다 높은 사람 분위기를 풍기는 신수진 이사장에게 타이론은 벌벌벌 떨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음, 제 마음인 거죠. 어지럽고, 음. 때론 기분 나쁘고. 음, 그러니까. 아마도, 그림을 그릴 때 기분이, 음.”

“그만!”

작업실 가득 신수진 이사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더욱 긴장한 타이론이 입을 다물고 눈만 멀뚱멀뚱 떴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설명 충분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신수진 이사장의 대답에 타이론의 긴장감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강철 지부장님. 그러니까, 오한결 작가가 이 그림에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고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요청했습니다. 타이론 학생이 개인전 작품을 준비할 수 있도록 작업실을 마련해 달라고요.”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돌려 강철 지부장을 쳐다봤다.

“지부장님은 이 낙서들이 예술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게…… 오한결 작가가 있다고 하니까요.”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한결 작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하지만 신수진 이사장은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현대 예술의 범위가 넓다고 하나, 이건 단순한 낙서에 불과한 거 아닌가? 왜 자신은 여기서 예술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이 아이는 뉴욕대 조교가 훈련 시키고 있습니다.”

“뉴욕대 교수도 아니고 조교가요?”

“네, 윌리라고 무척 개성 있는 조교가 있습니다. 혹시 만나 보시겠습니까?”

“아뇨.”

신수진 이사장의 단호함에 타이론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와, 나 저런 엄청난 사람 처음 봐. 멋지다.’

민망해진 강철 지부장이 오한결이 겪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뜻에서 그렸던 뉴욕 지하철 벽화를 신수진 이사장에게 태블릿 피씨로 보여주었다.

작품을 유심히 관찰하던 신수진 이사장이 말했다.

“매우 흥미롭군요. 저도 뉴스에서 보긴 했어요. 아직도 지하철에 작품이 남아 있습니까?”

강철 지부장이 대답하기 전에 타이론이 얼른 대답했다.

“네. 있어요. 뉴욕시가 잘 보존해 주기로 했습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호기심을 보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뉴욕에 온 김에 한 번 보고 하도록 하죠.”

“아, 그럼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저 혼자 보려고요. 지금 타이론의 작품을 보고 깨달았어요.”

타이론이 한껏 기대한 눈빛을 발산했지만, 기대는 어긋나고 말했다.

“타이론의 작품은 해설 따위 의미 없다는 사실을. 제가 직접 보고 판단할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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