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60화 (160/202)

제160화 압도적 방문

전날 밤, 재즈클럽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오한결이 기절한 듯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그를 깨우는 거친 전화벨 소리에 오한결이 짜증을 내며 눈을 떴다.

“아……. 너무 이른 시간이잖아. 너무하네…….”

휴대폰을 집어든 오한결이 말했다.

“여보세요…….”

[오한결 작가님! 나예요, 산다라!]

예상치 못한 산다라의 목소리에 오한결이 놀라 퍼뜩 몸을 일으켰다.

“산다라! 괜찮은 거죠?”

[호호호. 안 괜찮으면 해결 방법은 있고요?]

의외로 밝은 목소리에 오한결이 한시름 놓으며 대답했다.

“뭐, 그건 그때 생각해보죠. 하하.”

전화기 너머로 매우 분주한 소음이 들리자 오한결이 물었다.

“지금 밖인가 봐요?”

[네. 공항에 왔어요. 지금 한국으로 갑니다.]

“네? 이렇게 갑자기요?”

[왜 그러세요. 그걸 원한 거 아니었나요?]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갈 줄 몰랐습니다.”

[어제 리나와 작가님 퍼포먼스에 용기를 얻어서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어요. 오! 한국의 계신 친어머니요. 무척 기뻐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몇 시간 동안 통화하면서 서로 오해를 풀었어요. 사실 제가 그 편지만 열어봤다면 이미 풀렸을 문제지만, 어리석었던 거죠.]

어제저녁 급하게 마련한 퍼포먼스가 효과가 있었다고 하니, 오한결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네요. 딱 우리가 바랐던 일이네요.”

[오한결 작가님께 감사드려요. 어머니 얼굴을 그려줘서. 덕분에 한국에 가자마자 어머니를 알아볼 수 있게 됐어요.]

“아, 그것도 다행이군요. 하하.”

[신기해요. 편지를 보니까, 30년 전 어머니의 젊었을 때 사진이 들어있었는데, 그걸 그렇게 그릴 수 있죠. 아무튼 멋지게 그렸으니까, 제 편지를 몰래 읽은 건 용서해 줄게요. 호호.]

사적인 편지를 읽은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오한결이 조심스럽게 웃기만 할 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사이 산다라가 먼저 말을 이었다.

[저 비행시간 다 돼가요. 리나하고 최하늘 씨에게도 고맙다고 꼭 전해주세요. 그리고 빅스퀘어 빌딩 퍼포먼스 꼭 보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요.]

오한결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저도 아쉽네요.”

[한국에서 꼭 어머니랑 볼 테니까, 반드시 성공하셔야 합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자신 있으니까.”

[멋지네요. 호호. 아, 저 그만 가봐야 해요. 그럼 한국에서 봬요.]

그렇게 들뜬 목소리로 산다라가 전화를 끊자, 오한결은 지난 밤부터 내내 자신을 짓누르던 불편함이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퍼포먼스는 산다라를 위해 만든 거지만, 그 과정에서 산다라의 개인 편지를 훔쳐 보는 등 다소 개인적인 불쾌감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다시 숙취가 올라오자, 오한결이 침대에 몸을 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두통!!”

* * *

선글라스를 끼고 뉴욕 거리를 당당하게 걷는 여성을 보고 뉴욕 시민들이 흘끔흘끔 곁눈질로 쳐다보고 있다.

그녀가 허리를 펴고 구둣발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해 홍해가 갈라지듯 비켜서기 바빴다.

함부로 그 누구도 그녀에게 접근할 수 없었고 말을 거는 건 더더욱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목적지에 다다른 그녀가 짙은 선글라스를 벗고 건물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여기가 크리스티란 말이지.’

빌딩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의 압도적인 포스를 직감한 경비원이 재빨리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걸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녀가 반듯하게 서서 차갑게 말했다.

“크리스티 소피아 지부장을 만나러 왔는데요.”

“아……. 거긴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미리 선약이 있으신가요?”

“아뇨.”

“그럼…….”

“가서 전하세요. 명일문화재단 신수진 이사장이 왔다고요.”

유리벽 회의실 밖에서 소피아 지부장과 에밀리가 홀로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신수진 이사장을 훔쳐보고 있다.

“저 사람이 명일문화재단 이사장이라고? 세상에 저렇게 무서운 사람은 처음 봤어.”

잔뜩 겁에 질린 소피아 지부장이 중얼거리자, 에밀리도 긴장했는지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이미 사전 조사가 다 끝났습니다.”

“그래? 저 여자를 감당할 수 있단 말이지?”

“아뇨.”

에밀리가 당당하게 말하자, 소피아 지부장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료 조사를 했다며, 그런 대책도 없나?”

“했습니다. 제 결론은 ‘신수진 이사장을 이길 사람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입니다.”

“…….”

잠시 뒤, 신수진 이사장을 대면한 두 사람은 그녀가 뿜어내는 막대한 아우라에 정신이 어찔해질 것만 같았다.

소피아 지부장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신수진 이사장님께서 이렇게 크리스티를 찾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크리스티가 오한결 작가에게 관심이 많아서 한 번쯤 얼굴을 뵈었으면 했거든요.”

“그래요? 그럼 제가 잘 찾아온 것 같군요.”

에밀리는 신수진 이사장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스캔한 뒤 자신이 아는 정보와 매치하며 캐릭터 분석에 나섰다. 잠시 뒤, 에밀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신있게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한결 작가 작품은 최고 수준으로 경매가 진행될…….”

신수진 이사장이 매서운 눈빛으로 에밀리를 쳐다보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무척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명일문화재단과 MOU를 맺었던 몇몇 예술 단체들이 우리와 협력 관계를 끊겠다고 연락을 받았거든요. 대부분 1년 이상 준비한 프로젝트라 저희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갑고 기계같은 신수진 이사장의 말에 소피아 지부장과 에밀리는 숨죽이고 듣고 있다가 서로 눈을 마주 보며 눈빛으로 말했다.

‘CNN 크리스 지부장의 부탁으로 크리스티가 몇몇 단체에 압력을 가했던 사실에 문화재단이 완전히 뿔난 것 같은데요?’

‘어떻게 에밀리? 우리는 저렇게 화를 낼 줄 몰랐잖아.’

신수진 이사장이 같은 톤으로 말을 이었다.

“당장 원래대로 돌려놓으세요. 안 그러면 다음 시즌 크리스티 경매에 애로 사항이 있을 것입니다.”

경매 얘기에 소피아 지부장이 언짢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군요. 크리스티는 전 세계 경매 시장을 이끄는 곳이에요. 그쪽이 함부로 말할 수도, 감히 어떠한 압력을 가할 수도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콧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혹시 이거는 알고 계시나요? 크리스티 경매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명일 문화재단 아뜰리에를 이용하고 있고 작품에 필요한 경제적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그들이 명일 문화재단과 등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요.”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명일문화재단의 영향력을 소문으로 듣긴 했으나, 그렇게까지 예술계 전반에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는지 몰랐던 소피아 지부장이 무척 긴장한 채 대답했다.

“그들에게 소더비를 제안해 볼까 합니다.”

경쟁 업체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소피아가 심각한 현실을 바로 인정했다.

“아……. 무슨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요. 우리는 그저 CNN 크리스 본부장의 조언에 따라 움직였을 뿐입니다. 사실 저희도 문화재단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죠. 하지만 워낙 그가 강경하게 나와서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변명이 이어지자 신수진 이사장이 말을 잘랐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말한 대로 모두 원상복구 해주세요. 제가 이사장으로 있는 한 외부적 압력으로 문화재단 행사가 취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네…….”

“그리고 오한결은 한국 작가예요. 뉴욕이 감히 넘볼 수 있는 작가가 아니에요. 그 점 명심하세요.”

신수진 이사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자, 소피아 지부장과 에밀리도 눈치껏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신수진 이사장이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회의실을 나서자, 그제야 소피아 지부장이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저 사람 정말 장난 아니잖아.”

에밀리는 소피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신수진 이사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피식 미소를 지었다.

“에밀리 왜 그래?”

5천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에밀리는 자신의 멘사 1% 회원에 대한 자부심을 걸고 말했다.

“이제야 신수진 이사장에 대한 분석이 끝났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소피아 지부장이 무척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들어나 보자.”

“신수진 이사장은 무척 냉정한 사람 같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카리스마도 있고요. 우리가 잘 못 걸린 것 같습니다.”

결국 소피아 지부장이 폭발했다.

“에밀리! 허튼소리 작작하고 어서 전화나 돌려. 문화재단 또 찾아오겠다!”

* * *

서울에 깊은 밤이 찾아오자,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아트화랑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엌에서 야식을 준비하던 홍미숙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인사했다.

“어서들 와.”

아트화랑 구석에서 대형 텔레비전을 설치하던 홍철수 사장도 고개를 들고 인사했다.

“너희들 왔구나.”

그 모습을 발견한 최무열이 급히 달려가 홍철수 사장의 일손을 도왔다.

“에이, 사장님. 이건 우리한테 시키시죠.”

“케이블 선만 연결하면 되는데, 뭐. 다들 피곤할 텐데, 신경 안 쓰게 하려고 했지.”

홍미숙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가지고 나오면서 말했다.

“어서들 앉아. 추운데 차 좀 마시고.”

차를 나눠준 홍미숙이 테이블에 앉고 말했다.

“오늘이 타임스퀘어 행사 날이라고?”

“네, 거기에 엄청 큰 빅스퀘어 빌딩이라고 있거든요. 거기 전광판에 엄청 큰데 오한결 작가님의 그림이 걸릴 거예요.”

최무열이 신나하며 말하자, 홍미숙이 환하게 웃었다.

“어머, 그림을 그렇게 크게 걸어? 멋지네.”

서정익 작가가 끼어들었다.

“그림이 아니라 영상일 거예요. 제가 듣기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영상으로 편집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최무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 오한결 형님하고 단둘이 통화한 건 아니죠? 헤헤.”

“작가들 대화방이 있어. 내가 작년에 한국을 빛낸 10대 작가상을 받았잖아. 거기 대화방에 10명의 작가가 있는데, 정보를 공유하더라고.”

서정익 작가의 엄청난 인맥에 놀란 최무열이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아, 맞다. 이 형님 엄청 유명한 작가지. 아, 또 소외감 느껴지네. 쩝.’

노을이 구석에서 휴대폰을 만지며 말했다.

“가만있어 보자, 뉴욕에서 오후 2시에 행사하니까, 여기서는 새벽 3시에 볼 수 있겠네요.”

홍미숙이 살짝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너희들 피곤해서 어쩌니.”

노을이 어깨를 으쓱하며 최무열과 서정익을 한 번 바라보고 말했다.

“사실 우리는 밤샘이 익숙해서 괜찮아요. 솔직히 지금 컨디션이 제일 좋은 시간대거든요.”

서정익이 말했다.

“맞아요. 저는 해 뜰 때 자고, 어두울 때 깨거든요.”

최무열이 서정익 작가를 보며 말했다.

“그건 좀 심하다. 가끔 그런 거죠?”

“아니. 학교 다닐 때부터.”

“네? 학교 수업이 오전에도 있잖아요. 그럼 설마 밤을 새고 갔나요?”

서정익 작가가 두 손으로 머그컵을 움켜 쥐고 차향을 은근히 들이마신 뒤 말했다.

“나는 학교 안 갔어. 학생 때부터 작가로 데뷔해서 개인 작업했거든. 시험 기간 때 과제 몇 개 해서 우편으로 보내면 됐어.”

“뭐라고요! 세상에!”

오한결의 작품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은 사라진 채, 최무열은 천재와 전혀 다른 미대생 생활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서정익 작가를 제외한 모두 최무열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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