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진실의 노랫말
평화로운 아침, 명일그룹 회장실에서 신태진 회장이 CNN 뉴스 칼럼의 충격적인 제목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뉴욕 작가의 미래 오한결, 그를 주목한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칼럼을 읽어 내려갔다.
잠시 뒤, 양승호 비서가 커피를 가지고 들어왔는데도 신태진 회장은 칼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양승호 비서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제야 커피향에 정신을 차린 듯 신태진 회장이 옅은 탄성과 함께 정신을 바짝 차렸다.
“살다 살다 이런 기이한 칼럼은 처음일세.”
방금까지 기분 좋은 표정을 짓던 신태진 회장의 얼굴에 근심이 서려 있자 양승호 비서가 바짝 긴장한 채 물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오한결 작가 얘기야. CNN은 오한결이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소개하고 있어.”
“네? 그게 말이 되나요?”
“그러니까.”
여전히 멍한 눈빛의 신태진 회장은 CNN 칼럼이 보이는 태블릿 피씨를 양승호 비서에게 내밀었다. 양 비서는 빠르게 영문 칼럼을 읽어 내려갔다.
전 세계 예술인들이 모여드는 뉴욕에 그들의 예술적 다양성을 대표할 수 있는 작가가 나타났다는 얘기다. 그건 오한결 작가였고 현재 뉴욕의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역사적인 이벤트를 미국의 대표 기업인 ‘페이스 픽쳐스’와 함께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자고로, ‘페이스 픽쳐스’는 항상 뉴욕의 예술가와 작업을 했고 그 성과는 현대 예술사에 길이 남을 만했다고 한다. 오한결 작가가 ‘페이스 픽쳐스’와 작업했다는 건 뉴욕 예술가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겠다는 그의 의지의 표명이며 이번에 발표하는 작품은 뉴욕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을 거라고 했다.
뉴욕을 선택한 오한결을 환영하며, 앞으로 뉴욕시도 오한결을 뉴욕출신 작가로서 극진한 대접을 할 것을 주문했다.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이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세. 대한민국의 자랑인 오한결 작가가 미국을 대표한다고 하다니.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아……. 그래서 신수진 이사장님이 뉴욕에 가신 거군요.”
신태진 회장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우리 수진이가? 뉴욕에 갔어?”
“네, 워낙 출장을 많이 다니셔서 크게 신경 안 썼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까 오한결 작가 때문에 가신 것 같습니다. 오늘 새벽에 출발하셨습니다. 아마 지금쯤 비행기 안에 계실 것 같습니다.”
신태진 회장은 양 비서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수진이가 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이건 CNN의 사설일 뿐이야. 단지 극단적인 주장할 뿐, 우리는 무시하면 되네.”
“사실 단순한 문제는 아닌 듯 싶습니다. CNN에서 단독으로 오한결 작가의 퍼포먼스를 생중계하지 않습니까? 그때도 자막에 뉴욕의 대표 작가로 표시한다면 그것도 큰 문제 아닐까요?”
그 말에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신태진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건 안 되지! 이런, 보통 일이 아니야. 그래, 자네가 생각하기에 수진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나?”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수진 이사장님이라면 분명 뭔가를 보여줄 것도 같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천천히 자리에 다시 앉고 피식 웃었다.
“하긴 수진이라면, 분명 쉽게 물러서지는 않겠지. 아마도 뉴욕을 발칵 뒤집어 놓고 올지도 몰라. 하지만 그러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양승호 비서는 자신을 바라보던 신수진 이사장의 강렬하고 당당한 눈빛이 생각났다.
‘사고라도 치시는 건 아니신지……. 으, 누가 말려.’
* * *
재즈클럽의 어두운 조명 아래 더욱 창백해 보이는 산다라가 힘없이 술과 안주를 서빙하고 있다.
그녀의 위태로운 모습을 오한결과 최하늘, 리나가 한쪽 테이블에 앉아 지켜보고 있다.
오한결이 리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사장님이 쉬라고 했는데도 저렇게 나온 거라고요?”
“네, 좀 쉬지. 왜 저렇게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어요.”
산다라가 주방 입구에서 살짝 휘청이자 최하늘이 놀라 일어서며 말했다.
“어머! 휴, 다행히 안 넘어졌네요. 아마도 책임감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요? 제가 산다라를 옆에서 지켜보니까 완벽주의 성격이더라고요. 맡은 책임은 몸이 부서져도 해내겠다는 의지가 항상 보였어요.”
그들은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산다라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눈빛을 기가막히게 알아채고 다가왔을 산다라지만 오늘만은 주변의 시선 따위 무시하고 오로지 일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어느덧 자정이 넘어서자, 힘겹게 일을 마친 산다라가 천천히 오한결이 있는 테이블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는 맥주 한 병을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늘 참 별로인 날이네요. 몸이 따라 주지 않아요.”
오한결이 산다라의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집에 가서 쉬세요. 몸이 안 좋아 보여요.”
산다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집에 가면 더 힘들어요.”
그러면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여러 개의 눈을 알아채고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좀 결벽증이 있어서, 집에만 가면 청소를 하거든요. 호호. 오늘은 술을 좀 마시고 들어가자마자 잠들어 버려야겠어요.”
산다라는 오한결 곁에 앉아 있지만 물과 기름처럼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멍하니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 모습을 보던 리나가 오한결에게 속삭였다.
“안 되겠어요. 오늘 하면 어떨까요? 저는 준비됐는데.”
“아, 하늘 씨, 이젤하고 스케치북 혹시 구할 수 있나요?”
“네. 제가 미리 무대 뒤에 갖다 놨어요.”
오한결이 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해요. 그게 좋겠어요.”
잠시 뒤, 흑인 가수가 상당한 리듬감으로 재즈를 기가 막히게 부르자 모두 그녀를 향해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무대가 텅 빈 것을 확인한 리나가 무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던 산다라가 놀라서 물었다.
“어머! 내가 착각했나? 오늘은 리나 공연이 아닌 걸로 아는데.”
오한결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오늘은 산다라를 위해서 준비한 무대에요. 기대해 주세요.”
오한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산다라가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무대를 바라봤다.
무대에 리나가 오르자 사람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누가 뭐래도 재즈클럽에서는 리나를 진정한 가수로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재능을 사랑했고 그녀의 목소리를 무척 아꼈다.
무대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른 리나가 이젤 앞에 앉은 오한결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자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였고 리나가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산다라는 오늘따라 유난히 구슬프고 진정성이 담긴 리나의 목소리에 빨려들 듯 집중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 노랫말을 듣던 산다라가 화들짝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저건 설마…….’
리나는 눈을 감은 채 노래로 스토리텔링을 이어갔다.
젊고 아름다웠던 한 여인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사랑하는 이야기.
하지만 경제적 문제로 그 아이를 보육원에 잠시 위탁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
그러나 행정적 실수로 아이는 미국으로 입양 보내지게 되고.
애타게 딸을 찾는 어머니. 그러나 직원의 무책임한 발언과 행동이 이어진다.
어머니의 간절함과 다르게 세상은 매몰찼고 아이는 그렇게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성장하게 된다
아이를 애타게 찾는 어머니는 딸의 오해로 만남을 거부당하는데.
그렇게 가슴 아픈 세월을 보내게 된다.
산다라는 그 노랫말을 들으면서 할 말을 잊어버렸다. 무척 낯선 이야기, 하지만 가슴 한쪽에 있었던 ‘어쩌면’이라는 가정과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왜 리나는 지금 이 시기에 이런 노래를 부른 걸까?
산다라는 자신을 쳐다보는 리나의 촉촉하게 젖은 눈빛과 진정성에 전율을 느꼈다.
‘설마 내게 하는 얘긴가? 하지만 아닐 거야…….’
산다라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가슴아픈 사연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간절한 어머니의 소망을 외면했던 고집스러운 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수없이 자신을 버린 한국을 원망하며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뿌리를 내렸다.
어쩌면 가슴 속 독버섯처럼 자라는 ‘원망’은 산다라의 삶의 에너지이지 않을까.
그렇게 점점 시들어가던 산다라에게 리나는 그게 아니라고 모든 것이 오해라고 말하고 있다.
산다라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생각했다.
리나의 노랫말은 그저 창작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이야기이다. 최근 몸이 허약해지면서 마음이 약해진 게 틀림없다. 괜한 공상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리나 옆에서 그림을 그리던 오한결을 보는 순간 굳건한 그 마음은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오한결의 손에서 그려지는 인물은 노년의 여인이었다.
산다라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강렬한 끌림과 동시에 이런 단어가 터져나왔다.
‘엄마?’
그림 속 여인은 산다라와 무척 닮아있었다.
둥글고 넓은 이마와 살짝 쳐진 눈매 그리고 살짝 패인 보조개까지.
산다라는 아주 어릴 적 이제는 기억에서 모두 사라진 어머니의 이미지를 오한결의 그림에서 발견했다.
‘그렇다면 리나의 가사는 내 얘기란 말인가?’
진실을 알게된 산다라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강력한 충격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극심한 죄책감에 숨을 쉬기가 무척 힘들었다.
스스로를 가두고 살았던 지난 30년의 세월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눈물이 터지자 산다라가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며 산다라를 쳐다봤지만 산다라는 사람의 시선 따위 신경쓰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재즈클럽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나와 오한결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준비한 작은 퍼포먼스를 끝내고 서로를 바라봤다.
“리나, 우리가 성공한 것 같죠?”
리나도 눈물을 머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놀란 표정의 최하늘이 무대 근처로 다가와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산다라를 따라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걱정돼요.”
잠시 고민하던 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뇨, 지금은 혼자 있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요.”
“맞아요. 우리는 산다라가 감당하기 힘든 사실을 전했어요. 이제 그것을 소화하는 건 산다라 본인의 몫이고요.”
오한결과 리나가 강경하게 말하자, 최하늘도 한 발 물러섰다.
“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어요. 산다라는 강한 사람이니까 분명 이겨낼 거에요.”
그제야 오한결의 그림을 보게된 리나가 말했다.
“우리가 산다라의 편지에서 본 그녀의 어머니 사진은 젊었을 때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어요?”
오한결이 산다라 어머니의 그림을 보며 미소지었다.
“상상했어요. 산다라의 어머니는 어떻게 나이를 드셨을까. 그리고 확신했죠. 산다라는 분명 어머니의 얼굴을 알아볼 거라고.”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던 최하늘이 말했다.
“산다라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네요.”
그런 말을 하던 최하늘이 울먹이자, 리나가 당황하며 말했다.
“어머니가 많이 보고 싶은가 보군요. 최하늘 씨도 분명 어머니를 많이 닮았을 겁니다. 참 미인이겠어요. 어머니도.”
훌쩍이던 최하늘이 슬쩍 콧물을 닦고 대답했다.
“전 엄마보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는데요.”
“…….”
리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어쨌든 일이 잘 됐으니 한잔하자고 하자 언제 눈물을 보였나 싶은 듯 최하늘이 신나게 테이블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리나와 오한결이 히죽 웃으며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