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멋진 작업실
타이론이 좁고 어두운 자신의 방에 앉아 스케치북에 끄적이듯 뭔가를 그리고 있다.
잠시 뒤 뭔가 맘에 들지 않는 듯 스케치북을 멀리 치워버리고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을 둘러봤다.
오래되고 낡은 벽지 사이사이에 피어난 곰팡이가 눈에 띄었다.
‘이런 데서 무슨 작업을 할까?’
당장 밖으로 나가 오래된 회색 벽에 마음껏 낙서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윌리가 ‘뉴원 애비뉴’를 극도로 싫어하니까, 더는 그럴 수 없었다. 굳이 그가 싫다는 걸 또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중에 전시를 하려면 다른 작가들처럼 옮길 수 있는 재료에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거리에서 자유롭게 그림만 그린 타이론에게 그런 재료 따위는 없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쓸만한 스케치북을 구하긴 했지만 낯선 재료를 가지고 신나게 작업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윌리에게 부탁해볼까. 하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타이론은 가진 건 없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싶었고 그게 자신의 예술의 원천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때마침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명일문화재단 강철 지부장입니다.]
타이론은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경계를 풀지 않았다.
“무슨 일이죠?”
[혹시 시간 되면, 뉴욕 지부로 한 번 오시지 않겠어요? 보여드릴 게 있거든요.]
“네? 저를 아세요?”
[네, 잘 알죠. 오한결 작가님이 많은 말씀을 해주셨거든요.]
오한결 이름이 들리자 그제야 타이론이 경계심을 풀었다.
“아, 오한결 작가님이요. 근데 정확히 무슨 일로…….”
[일단 한번 오세요. 그래야 타이론도 더 기쁠 테니까요.]
전화를 끊은 타이론은 잠시 망설였다. 뜬금없이 자신을 오라는 전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하지만 다시금 자신의 좁고 어두운 방이 눈에 들어오자, 타이론은 외투를 거치고 밖으로 나왔다.
‘뭐, 어쨌든 외출은 하고 싶었으니까.’
한인타운 근처에 이른 타이론은 쉽게 명일문화재단 뉴욕지부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건물 외관은 주변 거물처럼 허름해 보였지만 1층 통유리창으로 카페가 얼핏 보였는데 무척 세련된 뉴욕의 어느 까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1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강철 지부장이 타이론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어서오세요. 타이론. 저는 아까 전화했던 강철 지부장입니다.”
쭈뼛쭈뼛하며 악수를 한 타이론이 낯을 가리며 말했다.
“타이론입니다. 근데 왜 저를 이곳에…….”
강철 지부장이 환하게 웃으며 갑자기 앞장서 걸어가며 말했다.
“일단 따라오세요. 보여드릴 게 있으니까.”
강철 지부장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자, 고급 조명과 대리석으로 장식한 복도가 나왔다. 타이론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관찰하자 강철 지부장이 걸음을 잠시 늦춰 그를 기다려줬다.
그리고는 복도 끝에 있는 붉은색 문을 덜컥 열더니 들어가 보라고 손짓했다.
타이론이 긴장된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가자 너무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이게 뭐예요? 세상에.”
흰색으로 칠해진 커다란 공간에는 그래피티 작업용 널빤지와 락커 그리고 각종 미술 도구들이 한쪽 구석에 잘 정리돼 있었다.
강철 지부장이 타이론의 얼굴에 만족하며 말했다.
“여기가 타이론 학생의 작업실이에요. 마음껏 예술적 기량을 뽐내시기 바랍니다.”
너무 좋으면서도 불안감을 느낀 타이론이 슬쩍 물었다.
“왜 제게 이런 걸 주시는 거예요? 혹시 윌리가 부탁했나요?”
“윌리요? 아니에요. 오한결 작가님이 부탁했어요.”
역시 윌리는 아니구나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오한결의 배려에 다시금 기분이 좋아졌다.
“아, 너무 좋긴 한데, 제가 이걸 받을 자격이 되나 싶어요.”
강철 지부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거야 저는 모르죠.”
“!!”
“증명해 주세요. 여기서 타이론이 자신의 작업이 예술적이라는 걸 증명하시면 돼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타이론은 강철 지부장의 솔직한 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무조건 잘할 거라는 말이 아닌 증명하라니. 부담되면서도 왠지 도전 정신에 불을 지피는 말이었다.
“네! 반드시 보여줄게요. 감사합니다!”
* * *
뉴욕대 앤드류의 연구실.
앤드류의 초대로 함께 식사한 오한결은 그의 연구실에 앉아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앤드류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오한결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오한결 작가와 관련해 뉴욕 예술계에 흉흉한 소문이 돌던데,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아니요. 사실 관심 없습니다.”
이제 예술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오한결은 어디까지나 신인 작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신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대중의 관심과 평론가의 지적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한결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얘기에 관심없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가?
그런 오한결의 태도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오한결이 예술 세계를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 오한결 작가를 따로 보자고 한 건 할 말이 있어서예요.”
“방금 말씀하신 뉴욕 예술계 때문이군요.”
앤드류가 천천히 커피를 들이마셨다.
“맞아요. 프로 작가는 작품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랍니다. 작품 하나가 갖는 문화적 가치와 그게 거래될 경우 경제적 이익도 상당하기에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죠. 제 작품 때문에 복잡한 문제가 생겼나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작품이 아니라 오한결 작가 때문에요.”
의외의 대답에 오한결이 호기심을 보였다.
“그래요? 정확히 어떻게 말이죠?”
“며칠 후면 CNN 칼럼이 하나 나갈 겁니다. 오한결 작가를 뉴욕의 대표 예술가로 소개하는 내용으로요. 그리고 크리스티에서도 이미 오한결 작가를 뉴욕의 예술가로 분류한 모양입니다. 어떤가요? 그래도 상관없나요?”
오한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회귀 전 평생을 뉴욕 대표 작가로 활동한 이력이 있어서, CNN의 행동에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가?
한국에서 작품을 시작했고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꿈을 이룬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한결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제가 한국작가인데 그들이 뭐라고 한들 달라질 게 있을까요?”
오한결의 여유에 앤드류가 답답한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들은 작가님이 거절하지 못할 뭔가를 제안할 모양입니다. 작가로서 승승장구할 기회를 말이에요.”
오한결은 속으로 ‘굳이 쓸데없는 짓을’이라고 되뇌였지만 겉으로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제가 미국 작가가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앤드류가 오한결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야 아무도 모르지요. 그들은 깜짝 제안을 할 거에요. 아마도 흔들리지 않을까 싶어요. 작가님은 데이비드 오 교수가 아끼는 작가지 않은가요? 작가님의 선택이 데이비드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해요.”
오한결은 끝까지 여유를 부리며 대답했다.
“일단 그들의 제안을 들어보고 결정하죠. 흥미로울 것 같네요.”
오한결의 대답에 앤드류가 오히려 더 불안감을 느꼈다.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 * *
명일 글로벌 무역센터 박영운 실장이 뉴욕 JFK 공항에 도착했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공항 근처에서 택시를 탄 그는 기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타임스퀘어로 가주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택시가 타임스퀘어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에 도착한 박영운 실장은 호텔보다 먼저 타임스퀘어를 선택했다.
오한결이 곧 어마어마한 퍼포먼스를 할 그 장소를.
신태진 회장이 오한결 작가에 대한 신뢰를 보여왔지만 박영운 실장은 끝끝내 두고볼 일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명일 글로벌 무역센터는 대명그룹의 운명을 좌우할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오한결 작가에게 무역센터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로비 디자인을 맡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태진 회장이 괜히 엉뚱한 곳에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박영운 실장은 자신이 뭔가를 놓쳤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오한결이 세계 최대 이벤트인 빅스퀘어 빌딩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뉴스를 접한 뒤로 자신이 최고의 작가를 알아보지 못한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래서 직접 봐야겠어. 오한결 작가의 작품을 말이야.’
어느덧 택시가 뉴욕 타임스퀘어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린 박영운 실장은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타임스퀘어 거리를 걸었다.
주변 건물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수많은 광고가 화려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번쩍이는 불빛에 눈이 시릴 정도로 이곳의 분위기는 무척 생소했고 흥미로웠다.
지나가다가 슬쩍 명일그룹의 광고도 보게됐다. 외국에서 명일그룹의 존재를 확인하자 평생을 바친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더욱 생기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걷고 또 걷다 보니, 빅스퀘어 빌딩이 눈앞에 나타났다.
다른 건물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층 건물로 특이하게도 건물 외벽 전체가 스크린으로 돼 있었다.
지금은 전원이 꺼진 상태지만, 만약 100미터가 넘는 저 스크린에 영상이 펼쳐진다면 얼마나 웅대하고 비현실적일까 박영운 실장은 생각했다.
‘오한결 작가가 이런 꿈의 무대에서 작품을 공개한다고?’
현장에 오니까 다시금 오한결 작가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이 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대형 프로젝트에서 자신의 작품을 공개한다는 건, 사실상 평생 예술가로서 칭송을 받았던 작가들도 그 기회를 잡기 힘들 것이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바로잡고 이제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빅스퀘어 빌딩의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전원이 꺼져 시커멓던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자, 주변의 어둠이 사라지고 그 일대가 환한 대낮처럼 밝게 빛났다.
너무 눈이 부셔 박영운 실장이 눈을 찌푸리며 화면을 보고 있는데, 스크린이 파랗게 변하더니 일렁이는 바닷물의 영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 압도적이다. 그리고 고품격 화질로 보는 이로 하여금 실제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착각을 일으킨다. 너무 무섭다.’
충격과 흥분으로 화면을 보던 박영운 실장은 다시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고래가 바다에서 떠올라 유유자적 헤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다가 꼬리로 물 표면을 세게 내리치자, 엄청난 물방울이 화면에서 펴져나갔다.
영상을 보던 박영운 실장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물을 막으려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건 화면 속 영상일 뿐이었다.
박영운 실장은 거리 한복판에서 잔뜩 자신의 움츠린 모습을 보고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스케일의 이벤트잖아. 저런 멋진 영상을 만든 디자이너를 제치고 오한결이 자신의 작품을 저 거대한 스크린에 보여준다는 거지?’
뉴욕에 오기 전까지 오한결의 실력에 의문을 품었지만, 빅스퀘어 빌딩의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본 박영운 실장은 이제는 오한결의 작품이 무척 궁금해졌다.
아마도 지금 자신이 본 고래 영상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은 이상하게 그가 꼭 그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