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57화 (157/202)

제157화 진실의 편지

산다라가 재즈클럽에 무단결근한 다음 날 오전.

오한결과 최하늘은 긴장된 마음으로 산다라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리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나와 말했다.

“어서 오세요, 지금 산다라는 잠이 들었어요.”

“설마 밤새 간호하신 거예요?”

“산다라가 새벽에 혼자 있는 게 무섭다고 전화를 했어요. 무척 땀을 흘리며 힘들어 하더라고요. 병원에 가자고 해도 도통 말을 안 들으니 참 걱정이에요. 다행히 제가 옆집에 살아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오한결과 최하늘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바라보며 생각보다 산다라의 심각한 상태에 대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런 잠깐의 긴장감을 깨는 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잠시 차를 마시고 있으면 산다라가 깰 거예요.”

집안은 산다라가 아팠기 때문인지 무척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전에 왔을 때 엔티크한 거실 풍경도 오늘따라 낡고 오래된 그저 그런 가정집처럼 느껴졌다.

좁은 부엌에 오한결과 최하늘이 나란히 앉자, 미리 준비한 커피를 가지고 왔다.

오한결이 커피를 마시고 물었다.

“산다라는 뭐래요? 별다른 말 없었나요?”

“말을 안 해요. 분명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자꾸 회피하려고만 해요.”

곰곰이 생각하던 최하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안타깝네요. 저희가 도움을 주려면 힘들지만 그 원인을 말해주면 좋을 텐데요. 하지만 강요할 수만은 없잖아요.”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듣던 오한결이 순간 눈빛을 번뜩였다.

“우리가 알아볼까요?”

리나가 호기심과 걱정스러운 마음을 모두 내비쳤다.

“어떻게요? 저도 시도는 해봤는데…….”

“아뇨. 우리가 직접 알아봐요. 분명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최근 산다라에게 특이할 만한 일이 있었나요? 아니면 그녀가 뭔가에 흥분한 적은요?”

“보통은 한국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화를 많이 냈어요. 그리고 무슨 편지 얘기를 하던데요.”

“편지요?”

산다라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그게. 사실 산다라는 평생 해외여행을 했기 때문에 전 세계에 친구들이 많아요. 그들이 종종 편지를 보내곤 하는데 그거일 거예요.”

하지만 오한결은 최근 산다라의 심경 변화의 중심에 나타난 편지가 분명 그녀에게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지금으로선 다른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일단 그 편지에 대해 알아보는 게 급선무일 것 같다.

“혹시 편지에 대해 산다라가 더 말을 하지 않았나요?”

“아뇨. 그러고 보니 급하게 말을 돌렸던 것도 같아요. 정확하지 않지만.”

리나의 말에 최하늘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아, 정말 뭐가 있는 걸까요?”

잠시 고민하던 오한결이 자리에서 일어나 산다라의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낡고 오래된 가구며 그녀가 전 세계에서 사들인 기념품들이 오한결의 눈에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집중해서 관찰하던 중 거실 구석에 두꺼운 책 아래에 살짝 드러난 편지 봉투 모서리가 보였다.

오한결이 책을 들춰내자 두꺼운 편지로 가득한 편지 봉투가 그 존재를 드러냈다.

“여기 편지가 있네요.”

오한결의 말에 최하늘과 산다라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오한결 곁으로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리나가 조심스럽게 편지를 들어 올렸다.

“이거 최근 한국에서 온 거네요. 어머! 정말로 이게 산다라의 어지러운 마음을 풀 수 있는 열쇠인 걸까요?”

오한결이 편지를 받아 들었다.

“아마도, 이 안에 편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겠죠.”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죠. 사생활이잖아요. 주인한테 허락을 맡고 봐야 해요.”

리나가 편지 봉투를 이리저리 살피는 오한결을 보며 살짝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오한결은 아쉬운 마음에 편지 봉투를 쳐다봤다.

물론 리나의 말이 옳았다. 사생활을 무척 중시하는 뉴욕 사람들, 특히 미국에서 성장한 산다라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편지를 봤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척 불쾌함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산다라에게 편지가 뭐냐고 묻는다면 솔직하게 말할까?

그녀는 편지를 숨길 것이고 영영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산다라를 도울 방법은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한결의 생각과 같은지 최하늘이 무척 고민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대로 포기하긴 너무 아쉽네요. 진심으로 산다라를 돕고 싶거든요.”

그때 방에서 산다라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분명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울부짖음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놀란 리나가 오한결과 최하늘에게 거실에 있으라고 말한 뒤 방으로 뛰쳐들어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산다라의 서러운 울부짖음이 이어졌고 서서히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조용하고 불편한 침묵이 집안을 감싸고 돌았다.

무척 지친 표정의 리나가 거실로 나와서 말했다.

“무서운 꿈을 꿨나 봐요. 지금은 안정을 찾고 다시 잠이 들었어요. 병원을 가자고 해도 또 고집을 부리네요. 친구가 저렇게 망가져 가는 걸 지켜보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워요.”

최하늘이 다시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산다라가 편지를 읽고 이렇게 됐다면, 우리도 읽어 봐야 해요. 그래야 도움을 줄 수 있어요.”

리나가 머뭇거리는 사이 오한결이 편지 봉투를 살피며 끝이 찢긴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음, 산다라는 이 편지를 읽지 않은 것 같아요. 분명 읽으려고 봉투를 찢긴 했는데, 지금 상태로 봐선 편지지가 외부로 나온 흔적은 없어요. 입구를 더 찢어야 편지지를 꺼낼 수 있는 것 같거든요.”

리나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 다행이네요. 편지 때문이 아니라는 얘기잖아요. 혹시 진짜 건강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오한결이 리나를 쳐다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니요. 산다라는 분명 이 편지 때문에 아플 거예요. 여기 찢긴 부분을 보면 상당히 주저한 흔적이 보이거든요. 이 편지 존재 자체에 그녀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오한결의 말에 충격을 받은 리나가 거의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 안에 산다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내용이 있겠군요. 혹시 협박이라도 받는 걸까요?”

오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닐 거예요. 발신인을 보면 한국에서 온 편지에요. 리나도 잘 알고 있잖아요. 산다라가 한국출신 입양아라는 사실을. 아마도 입양 관련된 내용일 수도 있겠군요.”

최하늘이 긴장했는지 두 손을 마주 잡고 물었다.

“아, 혹시 산다라가 오랫동안 친부모를 찾은 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 결과가 이 편지에 담겨 있고요. 근데 막상 그 사실을 마주하려니 두려움 때문에 몸이 아픈 거고요.”

오한결이 최하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이 편지를 보지 않으면 우리는 단순한 추측만 할 뿐이에요. 이걸로는 산다라를 도울 수 없어요.”

“죄송해요.”

리나는 끝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한결과 최하늘도 그녀의 뜻을 존중해 편지를 보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또 다시 방 안에서 산다라의 절규가 들렸다. 아마도 잠꼬대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놀란 리나와 최하늘이 급히 방으로 들어가서 산다라를 진정시키고 나왔다.

생각보다 산다라의 상태가 심각한 것을 확인한 최하늘이 리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산다라가 많이 아파 보여요. 나중에 잠에서 깼을 때 편지를 숨겨버리면 영원히 우리는 산다라의 고통을 옆에서 두고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심각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리나가 오한결 손에 들린 편지를 낚아채 끝을 마저 찢고 편지지를 꺼내 활짝 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오한결과 최하늘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게 조용하게 편지를 읽어가던 리나가 펑펑 눈물을 흘리며 편지지를 오한결 손에 다시 쥐여주었다.

오한결과 최하늘은 편지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빠르게 읽어 나갔다.

그렇게 편지를 다 읽은 세 사람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침묵을 유지했다. 그들은 부엌에 식탁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계속 리필해서 마시고 있었다.

오한결은 고개를 돌려 거실 구석에 놓인 편지를 유심히 쳐다봤다.

‘산다라가 저 편지를 봐야 할 텐데. 평생 자신을 괴롭힌 오해를 풀려면.’

편지 안에는 그녀의 친어머니의 필체로 적힌 가슴절절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산다라의 친모는 어린 나이에 산다라를 임신하게 되었지만 찢어 지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산다라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그때 남편과 상의 끝에 잠깐 보육원에 몇 달 맡겨두고 취직을 하면 산다라를 다시 데려오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몇 달 후 보육원을 찾게 된 산다라 부모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됐다.

당시 행정적 실수로 산다라를 입양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일을 주도한 보육원 관계자는 이미 시설을 떠난 후였고 입양 사실을 알게 된 산다라 부모의 하소연을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는 세상은 나이도 어리고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산다라 부모에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백방으로 산다라는 찾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산다라는 친부모가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한 번도 만날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산다라 부모는 절대로 산다라를 버린 게 아니라 그 모든 게 불운한 세상이 만든 실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외침은 허공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렇게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수십 년이 흘렀고 이제 산다라 부모는 나이가 들어 병을 얻었는데 마지막으로 딸에게 하소연하는 심정으로 그간의 사정을 편지로 정리해서 보낸 것이다.

리나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산다라가 오해를 풀었으면 해요.”

“너무 가슴아픈 사연이네요. 산다라는 절대로 부모에게 버림받은 게 아닌데, 너무 오랫동안 오해하고 마음의 문을 닫고 산 거 같아요.”

리나가 눈을 번쩍이며 대답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네요. 산다라는 어려서부터 전 세계를 여행 다녔어요. 낯선 미지의 세계만이 자신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다고 믿었던 거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색다른 자극의 한계가 명확해 보였어요. 언제나 뿌리를 잃은 나무처럼 시들어갔죠.”

“산다라는 여행이 필요한 게 아니라 자신을 품어줄 집이 필요했던 거군요. 그 사실을 본인도 잘 몰랐던 거고요.”

오한결이 말을 잇자, 리나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리나가 자신의 집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았어요. 이 편지를 산다라가 읽으면 돼요. 편지를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더는 도망치지 말고 진실을 받아들이라고. 그 진실은 절대 두렵고 외로운 게 아니라고. 이제 산다라를 애타게 찾는 가족 품으로 돌아가라고.”

“이제 오랜 여행을 끝낼 때가 됐군요.”

최하늘이 이렇게 대답하자, 리나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요. 이제 오랜 여행을 끝내야죠. 산다라는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한국으로.”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리나는 산다라가 과연 편지를 읽을까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회의적인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가 그냥 얘기해 줄까요. 사실은 이렇다고.”

“아니요. 그럼 역효과가 날 수 있어요. 자연스럽게 내용이 전달돼야 해요. 하지만 어떻게 하죠?”

리나와 최하늘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는데, 오한결의 경쾌한 말소리가 들렸다.

“제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요.”

“네? 그게 뭔데요?”

“어머! 빨리 말해줘요.”

오한결이 히죽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며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 계획을 듣던 리나와 최하늘도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연식 끄덕였다.

“좋아요!”

“대박! 멋지네요.”

0